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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smupet Dec 15. 2020

소설을 못 읽는 사람

이런 날에는 이런 향기

소설을 못 읽는다.

특히 슬픈 소설일 때 더 그렇다.

소설을 읽다 보면 내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소설 속 어떤 인물이 차지한다. 소설 속 인물이 귀신이라면 이건 빙의다.


"안 읽으면 그만이지 뭐."


간단한 줄 알았다. 소설만 그럴 줄 알았을 때는.

삶에서 소설 같은 일이 일어날 때, 살아있는 사람이 내 자아를 밀어내고 그 공간을 차지할 줄은 몰랐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 반복적으로. 그래서 소설을 안 읽기로 했던 때처럼 나는 그 일을 안 하기로 했다. 그 일만 피하면 될 줄 알았다.

피하고 피하고 피하며 살다 보니 내 자아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게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정해진 게 아니었다. 빙의가 잘 되는 사람이었던 거다. 귀신 말고 타인의 감정에.


오늘 오전 분석 심리학을 배우는 시간, 인간이 직접 대면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원형의 에너지를 안전하게 만나는 방법에 대해 배우는 중이었다. 맨 눈으로 신을 보면 눈이 먼다는 말처럼 원형을 직접 맞닥뜨리면 우리는 미쳐버린다고 한다. 자아가 원형의 에너지에 잡아먹히는 것이다. 평생 원형과 마주칠 일이 없으면 상관없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으로 나는 소설책을 피하고, 나의 일을 그만두었다. 이렇게 간단한 일이면 좋겠는데 그렇지가 않단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는 성벽처럼 단단한 게 아니라 만두피처럼 얇아서 언제든 무의식에 잠들어있던 원형이 만두피가 터지듯 툭 튀어나와 의식에 파고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쩌지? 원시인들이 찾은 해법은 리츄얼(ritual)이었다. 형식을 갖춘 의식을 통해 자아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에너지를 밖으로 빼낼 수 있었다. 거기서 종교가 시작되었다.


내가 그 원시인이 되어본다. 나의 의지로 원시인에게 빙의가 되어본다. 우연히 불을 피우는 법을 발견한 원시인, 그의 세상에서 불은 신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었다. 벼락이 쳐서 숲에 불길이 이는 것 말고는 불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불은 원형의 에너지가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 불을 어쩌다가 자신이 피우게 되었다. 거기에는 어떤 의도도 없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어마 무시한 사고를 친 것이다. 밤마다 신이 나에게 불벼락을 내리치는 악몽을 꾸기 시작한다. 바람에 나뭇잎이 바스락 거리기만 해도 신이 나를 벌주러 온 게 아닐까 벌벌 떤다. 이대로 있다가는 내가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 선수를 치자. 신에게 먼저 이실직고를 하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이 불은 당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 아니었냐고 말해보자. 불 피우는 법을 알게 되었는데 안 쓸 수는 없잖아? 이렇게 좋은 걸. 재빨리 신에게 바칠 재물을 마련한다. 신에게 감사하는 의식을 치른다. 고해성사를 하고 나오는 것 마냥 마음이 가벼워진다. 이제 나는 이 불을 잘 다루는 법만 익히면 된다. 불이 번져 집이 다 타버리는 일이 없도록 아궁이 안에서 필요한 만큼만 불을 지피는 법을 익히면 된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떠올랐다. 우리의 일상에 이런 리츄얼이 얼마나 남아있는가? 종교 조차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덮치려는 거대한 원형의 에너지를 밖으로 빼낸단 말인가?  나처럼 소설 속 인물에게 자아의 자리를 강탈당할까 봐 무서워 책 하나 제대로 못 읽는 이에게는 어떤 방법이 있단 말인가?


함께 수업을 듣는 이들은 거의 다 상담을 하는 분들이다. 한 사람이 나의 질문에 답을 한다.

"자아를 강하게 만들면 돼요."


내가 대답한다.

"제가 알고 싶은 게 그 방법이에요. 어떻게 자아를 강하게 만들 수 있죠?"


또 한 사람이 답을 한다.

"글을 쓰세요."


어떤 글을 쓰면 될지 묻자 내 자아의 공간으로 파고드는 소설 속 인물에 대해 글을 쓰란다.


그렇지!

글쓰기, 그건 나를 공간의 주체로 만든다.

나의 공간을 파고드는 것에 내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면 그 공간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여긴 내 자리야"라고 버티며 아무것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나는 성장할 수 없다. 어떤 배움도 나에게 들어오지 못한다. 나의 자리에 들어온 것을 내 방식대로 배치할 수 있어야 한다. 주객이 전도되는 일만 없으면 나에게 들어온 건 나의 공간을 풍성하게 해주는 하나의 오브제가 될 수 있다.


글을 쓰면서 눈치를 채긴 한 것 같다.

에세이,

나에 대한 글쓰기는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나를 보게 해 주었다. 가끔 아니 자주 내가 쓴 글에 내가 우는 주책을 부리기도 한다. 새로움을 마주했을 때, 무언가 내 안으로 파고들 때 그것에 대한 나의 감정과 생각, 반응을 글로 쓰다 보면 껄끄럽게만 느껴지던 것이 어느새 말캉말캉해져 어울리는 자리를 찾아가기도 한다. 거기서 나의 공간을 풍성하게 해주는 하나의 오브제가 되어준다.

예전에 회피했던 것, 자아의 자리를 자꾸만 점거해버려서 아예 대면하지 않기로 했던 것에 대한 글쓰기도 나는 이미 하고 있었다. 내가 그만둔 나의 직업에 대한 이야기. 사실 그 글을 쓸 때면 많이 아프다. 그 당시의 감정이 나를 짓눌러서 답답해진다. 공황장애로 도망친 곳인데 그곳을 떠올리는 게 쉽다면 거짓이겠지. 그럼에도 쓰는 건 그게 전부가 아니라 과정 중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 공간에서는 알지 못했던 걸 글을 쓰면서 알아챈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나의 어떤 부분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는 눈치채지 못했던 타인의 손길이 문득 떠오른다.  그게 주는 위로가 너무나 따뜻해서 글쓰기에 동반되는 회상, 거기에 묻어있는 날카로운 감정마저 결국엔 녹아내린다.

이제 다시 소설을 읽어야 할까? 나의 글쓰기를 거기까지 확장해야 할까?

오늘 질문에 대한 답을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 빙의되었다가 글 쓰기를 통해 빠져나오는 것, 그걸 이제 해볼까?


아무래도 프랑킨센스와 샌달우드의 향기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다. 프랑킨센스의 향기가 흔들리는 나를 잡아주면 샌달우드의 향은 타인의 감정에 포획된 나의 마음을 다시 나에게 돌려준다. 나무에서 추출한 향기로 나무를 배운다. 땅에 깊숙하게 뿌리내리고 자신을 오가는 모든 존재를 품어주는 나무처럼 나도 이 자리에 앉아 내면을 오가는 모든 것들을 글로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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