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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향 Apr 05. 2023

왜 그렇게 많은 짐을 가지고 다닐까.

성급하게 떠나보낸 나의 슈트케이스

  인천 공항에서 밤을 지새우며 의자에 앉아 있다가 무심코 카트에 실어 놓은 슈트케이스에 눈이 갔다. 어머나! 바퀴가 언제 이렇게 갈라졌지? 어쩐지 잘 안 밀리더라니... 4개의 바퀴 중 한 개가 쩍 하니 양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이 슈트케이스를 산 게 언제였더라. 족히 10년은 넘었던 것 같다. 그동안 유럽을 수차례 다니며 유럽 소도시 곳곳의 울퉁불퉁한 돌길을 수많이 굴렀고, 중국에서 지낼 때도 틈틈이 중국의 도시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었다. 충분히 바퀴가 탈이 날 때도 됐다 싶었다. 


  그래도 무사히 인천 공항에 도착해서 바퀴가 터진 것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노쇠한 당나귀가 끝까지 제 몸을 바쳐 주인 곁에서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처럼 나와 함께 긴 시간 동안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주고, 인천 공항까지 버텨 준 나의 슈트케이스에게 그동안 수고했다는 인사가 저절로 나왔다.  


<왼쪽 돌아올 때 나의 짐. 오른쪽 슈트케이스의 쫙 갈라진 바퀴>

  

  이 슈트케이스는 28인치 사이즈인데, 여행을 하다 보면 짐이 계속 늘어나기 마련이어서 확장을 해도 돌아올 때쯤이면 겨우겨우 가방을 온 힘을 다해 꾹 눌러야만 잠글 수 있었다. 이번에도 갈 때는 슈트케이스 속에 넣어갔던 겨울 코트를 일회용 가방에 따로 빼고 나서야 어렵게 잠겼다. 그것도 사 오고 싶은 여러 가지 물건과 선물들을 겨우겨우 단념하고 포기해서 최대한 짐을 줄인 상태였다. 


  여행 고수들은 짐을 간소하게 잘 꾸리고 다닌다. 나는 여행은 꽤 많이 다닌 편이나 그런 면에서 절대 여행 고수가 될 수 없었다. 필요할 때 찾는 물건이 없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여 이것저것 필요할 만한 것을 다 챙겨 다니니 늘 짐이 많다. 갖가지 상비약은 물론이고, 일회용 수저와 비닐팩, 반짇고리, 알코올 소독제, 손세정제, 세탁비누, 간식류, 외국인들에게 줄 선물 등 반드시 필요하지 않지만 있으면 좋을 것들까지 바리바리 챙겨 짐을 싸니 가방은 늘 포화 상태이다. 


  "나는 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는데, 딱 한 곳은 절대 못 갈 것 같아."

  사람들과 여행 이야기를 나눌 때, 내가 자주 하는 말이다.  

  "그게 어디인데?"

  "산티아고 순례길."

  "왜?"

  "짐이 많아서 배낭에 절대 짊어질 수가 없어."


  한 도시에 머물면서 슈트케이스를 숙소에 두고 여행을 할 때에도 기본적으로 백팩과 보조가방을 가지고 다닌다. 백팩에는 여행 책자, 카메라, 보조배터리, 물병, 간식, 휴지와 물티슈, 선크림, 수첩 등을 넣고, 보조가방에는 여권, 카드, 휴대폰 등 필수품 등을 갖고 하루종일 다니느라 늘 어깨가 묵직하고, 뼈 마디가 아래로 쑥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어떤 날은  이것저것 챙긴 백팩 안의 물건을 거의 꺼내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늘 갖고 다녀야만 마음이 편안하다. 


  비단 여행 다닐 때만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가방에 휴지, 물티슈, 핸드크림, 손톱깎이, 립밤 등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챙겨야만 안심이 되어 주로 큰 가방이나 에코백을 갖고 다닌다. 작고 예쁜 미니 백을 갖고 있지만, 휴대폰과 지갑 정도만 겨우 들어가는 가방은 아무리 예뻐도 장롱 깊숙한 곳에서 수년 째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나는 왜 이리 늘 많은 짐을 가지고 다니는 걸까. 생각해 보니, 결핍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향 때문인 것 같다. 무언가가 부족하거나 필요한 게 없으면, 그 상황을 견디기가 몹시 힘들다. 그래서 안 쓰거나 남겨서 도로 가지고 오더라도 필요할만한 모든 것을 넉넉하게 챙겨야만 안심이 된다. 


  생각해 보니 집에도 그런 물건들이 넘쳐 난다. 버려야지, 버려야지 하면서도 언젠가는 쓸모 있을 것 같고, 필요할 것 같아서 몇 년째 안 입는 옷과 구석구석에 처박혀 잠자고 있는 잡다한 물건, 책들이 온 방을 잠식하고 있다. 많은 짐들을 짊어지고 다니고, 집안 곳곳에는 쌓아두고 사는 것이 갑자기 내 삶을 짓누르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하지는 못하더라도, 이제부터는 많은 짐들을 덜어내고 조금은 간소하게 살아보리라 비장한 다짐을 하고 공항 리무진에 올랐다.  


  집에 도착해서 이틀 후에 몇 천 원짜리 스티커까지 사 붙이면서 오랜 여행 동반자였던 슈트케이스와 쿨하게 작별을 고했다. 물건을 잘 못 버리는 내가 행한 정말 재빠른 이별이었다. 

 

  며칠 후 절친 MK와 오랜만에 만나 리스본 공항 면세점에서 사 온 그린 와인을 마시며 여행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래전에 처음 유럽 여행을 준비하며 급하게 슈트케이스를 사야 했을 때, MK는 자신이 산 슈트케이스를 추천해 주어서 그녀와 똑같은 것을 샀었었다. MK에게 슈트케이스가 망가져서 버렸다고 했더니 그녀가 말했다.               

  "그걸 왜 버려? 바퀴 한쪽만 AS 받으면 되는데?"     

  "바퀴  AS가 돼? 바퀴가 나가면 슈트케이스는 끝이라고 생각했어. AS는 전혀 생각도 못했어."     

  "AS가 확실하니까 가격이 더 나가도 브랜드 있는 제품을 사는 거잖아."     

  MK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구나. 몰랐어... 해외 다닐 때마다 커버를 씌우고 다녀서 내 슈트케이스는 10년 넘게 썼지만 겉에 흠집도 별로 없고, 안에도 깨끗한 편인데... 단지 바퀴 하나 망가져서 버린 건데, 너무 아깝네..."     

  "그 형광색 커버를 매번 씌우고 다녔어? 색깔이 너무 튀고 안 예쁜데."     

  "색깔이 튀어서 오히려 짐 찾을 때 눈에 확 띄어서 좋고, 보기에 안 예쁘더라도 가방 외관에  흠집 안 나는 게 더 중요하니까 매번 커버를 씌우고 다녔지. 으아, 괜히 버렸네. 그것도 몇 천 원짜리 스티커까지 사서 버렸는데... 내가 너무 성급하게 버렸어. 어쩌지..."     

  "이미 버렸는데 할 수 없지 뭐. 그냥 그동안 잘 썼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려."     

  "물건 버리는 거 잘 못하고 쌓아두고 사는 내가, 왜!!! 하필 그 슈트케이스는 그렇게 빨리, 쉽게, 확 버렸을까... 으아,,, 생각할수록 너무 아까워...."     


  브랜드 있는, 사이즈가 큰 슈트케이스를 새 제품으로 사려니 가격이 예전에 비해 많이 비쌌다. 당근 마켓을 보니, 바퀴 하나 고장 난 슈트케이스를 팔기도 했다. 키워드 설정을 하고 기다렸는데, 내가 딱 원하는 크기와 브랜드의 슈트케이스가 없거나, 나오면 내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짧은 순간에 거래가 금방 성사되어 아쉽게 놓쳤다. 

  그러게 하던 대로 하고 살걸. 무슨 바람이 들어서, 간소한 삶의 실천을 왜 하필 슈트케이스에서부터 시작했는지... 자꾸만 성급하게 너무 빨리 떠나보낸 나의 슈트케이스가 한없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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