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렇게 많은 짐을 가지고 다닐까.

성급하게 떠나보낸 나의 슈트케이스

by 은향

인천 공항에서 밤을 지새우며 의자에 앉아 있다가 무심코 카트에 실어 놓은 슈트케이스에 눈이 갔다. 어머나! 바퀴가 언제 이렇게 갈라졌지? 어쩐지 잘 안 밀리더라니... 4개의 바퀴 중 한 개가 쩍 하니 양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이 슈트케이스를 산 게 언제였더라. 족히 10년은 넘었던 것 같다. 그동안 유럽을 수차례 다니며 유럽 소도시 곳곳의 울퉁불퉁한 돌길을 수많이 굴렀고, 중국에서 지낼 때도 틈틈이 중국의 도시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었다. 충분히 바퀴가 탈이 날 때도 됐다 싶었다.


그래도 무사히 인천 공항에 도착해서 바퀴가 터진 것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노쇠한 당나귀가 끝까지 제 몸을 바쳐 주인 곁에서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처럼 나와 함께 긴 시간 동안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주고, 인천 공항까지 버텨 준 나의 슈트케이스에게 그동안 수고했다는 인사가 저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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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돌아올 때 나의 짐. 오른쪽 슈트케이스의 쫙 갈라진 바퀴>


이 슈트케이스는 28인치 사이즈인데, 여행을 하다 보면 짐이 계속 늘어나기 마련이어서 확장을 해도 돌아올 때쯤이면 겨우겨우 가방을 온 힘을 다해 꾹 눌러야만 잠글 수 있었다. 이번에도 갈 때는 슈트케이스 속에 넣어갔던 겨울 코트를 일회용 가방에 따로 빼고 나서야 어렵게 잠겼다. 그것도 사 오고 싶은 여러 가지 물건과 선물들을 겨우겨우 단념하고 포기해서 최대한 짐을 줄인 상태였다.


여행 고수들은 짐을 간소하게 잘 꾸리고 다닌다. 나는 여행은 꽤 많이 다닌 편이나 그런 면에서 절대 여행 고수가 될 수 없었다. 필요할 때 찾는 물건이 없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여 이것저것 필요할 만한 것을 다 챙겨 다니니 늘 짐이 많다. 갖가지 상비약은 물론이고, 일회용 수저와 비닐팩, 반짇고리, 알코올 소독제, 손세정제, 세탁비누, 간식류, 외국인들에게 줄 선물 등 반드시 필요하지 않지만 있으면 좋을 것들까지 바리바리 챙겨 짐을 싸니 가방은 늘 포화 상태이다.


"나는 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는데, 딱 한 곳은 절대 못 갈 것 같아."

사람들과 여행 이야기를 나눌 때, 내가 자주 하는 말이다.

"그게 어디인데?"

"산티아고 순례길."

"왜?"

"짐이 많아서 배낭에 절대 짊어질 수가 없어."


한 도시에 머물면서 슈트케이스를 숙소에 두고 여행을 할 때에도 기본적으로 백팩과 보조가방을 가지고 다닌다. 백팩에는 여행 책자, 카메라, 보조배터리, 물병, 간식, 휴지와 물티슈, 선크림, 수첩 등을 넣고, 보조가방에는 여권, 카드, 휴대폰 등 필수품 등을 갖고 하루종일 다니느라 늘 어깨가 묵직하고, 뼈 마디가 아래로 쑥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어떤 날은 이것저것 챙긴 백팩 안의 물건을 거의 꺼내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늘 갖고 다녀야만 마음이 편안하다.


비단 여행 다닐 때만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가방에 휴지, 물티슈, 핸드크림, 손톱깎이, 립밤 등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챙겨야만 안심이 되어 주로 큰 가방이나 에코백을 갖고 다닌다. 작고 예쁜 미니 백을 갖고 있지만, 휴대폰과 지갑 정도만 겨우 들어가는 가방은 아무리 예뻐도 장롱 깊숙한 곳에서 수년 째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나는 왜 이리 늘 많은 짐을 가지고 다니는 걸까. 생각해 보니, 결핍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향 때문인 것 같다. 무언가가 부족하거나 필요한 게 없으면, 그 상황을 견디기가 몹시 힘들다. 그래서 안 쓰거나 남겨서 도로 가지고 오더라도 필요할만한 모든 것을 넉넉하게 챙겨야만 안심이 된다.


생각해 보니 집에도 그런 물건들이 넘쳐 난다. 버려야지, 버려야지 하면서도 언젠가는 쓸모 있을 것 같고, 필요할 것 같아서 몇 년째 안 입는 옷과 구석구석에 처박혀 잠자고 있는 잡다한 물건, 책들이 온 방을 잠식하고 있다. 많은 짐들을 짊어지고 다니고, 집안 곳곳에는 쌓아두고 사는 것이 갑자기 내 삶을 짓누르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하지는 못하더라도, 이제부터는 많은 짐들을 덜어내고 조금은 간소하게 살아보리라 비장한 다짐을 하고 공항 리무진에 올랐다.


집에 도착해서 이틀 후에 몇 천 원짜리 스티커까지 사 붙이면서 오랜 여행 동반자였던 슈트케이스와 쿨하게 작별을 고했다. 물건을 잘 못 버리는 내가 행한 정말 재빠른 이별이었다.


며칠 후 절친 MK와 오랜만에 만나 리스본 공항 면세점에서 사 온 그린 와인을 마시며 여행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래전에 처음 유럽 여행을 준비하며 급하게 슈트케이스를 사야 했을 때, MK는 자신이 산 슈트케이스를 추천해 주어서 그녀와 똑같은 것을 샀었었다. MK에게 슈트케이스가 망가져서 버렸다고 했더니 그녀가 말했다.

"그걸 왜 버려? 바퀴 한쪽만 AS 받으면 되는데?"

"바퀴 AS가 돼? 바퀴가 나가면 슈트케이스는 끝이라고 생각했어. AS는 전혀 생각도 못했어."

"AS가 확실하니까 가격이 더 나가도 브랜드 있는 제품을 사는 거잖아."

MK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구나. 몰랐어... 해외 다닐 때마다 커버를 씌우고 다녀서 내 슈트케이스는 10년 넘게 썼지만 겉에 흠집도 별로 없고, 안에도 깨끗한 편인데... 단지 바퀴 하나 망가져서 버린 건데, 너무 아깝네..."

"그 형광색 커버를 매번 씌우고 다녔어? 색깔이 너무 튀고 안 예쁜데."

"색깔이 튀어서 오히려 짐 찾을 때 눈에 확 띄어서 좋고, 보기에 안 예쁘더라도 가방 외관에 흠집 안 나는 게 더 중요하니까 매번 커버를 씌우고 다녔지. 으아, 괜히 버렸네. 그것도 몇 천 원짜리 스티커까지 사서 버렸는데... 내가 너무 성급하게 버렸어. 어쩌지..."

"이미 버렸는데 할 수 없지 뭐. 그냥 그동안 잘 썼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려."

"물건 버리는 거 잘 못하고 쌓아두고 사는 내가, 왜!!! 하필 그 슈트케이스는 그렇게 빨리, 쉽게, 확 버렸을까... 으아,,, 생각할수록 너무 아까워...."


브랜드 있는, 사이즈가 큰 슈트케이스를 새 제품으로 사려니 가격이 예전에 비해 많이 비쌌다. 당근 마켓을 보니, 바퀴 하나 고장 난 슈트케이스를 팔기도 했다. 키워드 설정을 하고 기다렸는데, 내가 딱 원하는 크기와 브랜드의 슈트케이스가 없거나, 나오면 내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짧은 순간에 거래가 금방 성사되어 아쉽게 놓쳤다.

그러게 하던 대로 하고 살걸. 무슨 바람이 들어서, 간소한 삶의 실천을 왜 하필 슈트케이스에서부터 시작했는지... 자꾸만 성급하게 너무 빨리 떠나보낸 나의 슈트케이스가 한없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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