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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향 Sep 16. 2023

<소설 티처스-안녕하세요, 선생님!> 7화 (2)

7화. 천태만상 사람들 (2)

 “탄원서는 최대한 많을수록 좋아요. 이왕이면 자필로 쓰는 게 더 좋고요. 뒷면에 주소와 연락처, 신분증도 되도록 첨부하세요.”

  은혜가 병가에 들어간다고 전하자 권 변호사는 동료들의 탄원서를 미리 받아두라고 했다. 탄원서의 정해진 양식은 없지만, 참고할 샘플 자료를 보내준다고 했다. 부장 언니들은 은혜에게 동료 교사의 탄원서는 자신들이 받아줄 테니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3학년 부장 조영심은 3학년 담임들에게, 교육과정 부장 홍선영은 전문적 학습 공동체 교사들에게, 정보 부장 김현정은 각 부장들에게, 은혜를 걱정하며 부장들은 각자 친분이 있는 동료들에게 탄원서를 받아주었다. 국어과에서는 박수현과 민유진이 나서주었다. 박수현은 직접 자신이 쓴 탄원서를 샘플로 제공해 주었다.

 

  은혜가 힘겨운 순간마다 같이 부장을 했던, 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선영과 현정, 영심, 은숙을 비롯한 부장들이 큰 위로와 힘이 되어 주었다. 그들은 한 달 동안 은혜의 밥을 챙겨주며 기어코 은혜가 점심을 먹게 했다.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어 수척해진 은혜가 그나마 쓰러지지 않았던 건 부장 언니들과의 점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점심시간마다 걸쭉한 입담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바람에 은혜는 잠시라도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고,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을 때도 있었다. 가족을 잃은 장례식장에서도 웃음이 나온다더니, 은혜는 괴롭고 힘든 상황에서도 먹고 웃는 자신을 보니, 강인하고 끈질긴 것이 바로 삶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향진중에서 같이 근무하다 바로 앞에 있는 향진고 교무부장으로 간 박향선이 은혜에게 연락을 해 왔다. 향진지구 맘카페에도 이미 “향진중 아동학대 교사” 관련한 게시물과 댓글이 뜨거운 감자로 이슈화되고 있었다. 향선은 향진1 지구에 사는 학부모이기도 한 친한 동료를 통해 은혜 일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향선은 공강 시간을 알려주며, 향진고로 꼭 찾아오라고 했다. 은혜는 탄원서를 부탁할 겸 향선을 만나러 갔다.      


  “향진 맘카페에서 거론된 국어 교사가 자기 일 줄은 정말 몰랐네. 나중에 자기 얘기라는 거 알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은혜는 지역 맘카페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거론되고 있는지 무서워졌다.

  “자기처럼 수업에 열정적인 사람이 어디 있다고. 요즘은 열심히 하는 교사가 오히려 다치는 세상이라니까.”  

  향선은 은혜가 리더인 수업친구 전문적 학습 공동체도 같이 참여했었고, 은혜의 수업 방식이나 수업에 대한 열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은혜에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전해 들은 향선은 연신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잘 될 테니 기운 내라고 했다. 은혜는 향선에게 조심스럽게 탄원서를 써 줄 수 있는지 부탁했다. 순간 마스크 위로 향선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내가 글재주가 없어서... 나보다는 지금 같이 근무하는 향진중 선생님들이 써 주는 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부담스러우시면 안 써 주셔도 돼요. 괜찮아요.”

  은혜는 애써 웃어 보였다. 조금 전까지 걱정하며 향선이 건넨 말은 으레 하는 인사치레였던 걸까.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시무룩하게 내려온 입술은 안 드러났지만 실망스러운 눈빛은 숨길 수가 없었다.     

 


  향진고를 나오는 은혜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갑갑한 마음을 정리하려 학교 근처의 공원을 걸었다. 힘든 일을 겪게 되면, 누가 내 편인지 아닌지 사람들이 딱 정리된다더니 그 말이 꼭 맞는 것 같았다. 향선과는 같은 부서에서도 근무하며 꽤 친밀한 사이라고 생각했었다. 향선이 일반 승진을 위해 교무 부장 자리가 빈 향진고로 가고 난 뒤에도 2년 넘게 꾸준히 연락하고 가끔 만나기도 했다. 교감 승진 대상자가 되어 연수를 받고 있는 중이라서 몸을 사리는 것일까. 탄원서는 경찰에 제출하는 것이라 교육청하고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 생각하지도 못한 향선의 거절에 은혜는 일종의 배신감마저 들었다.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진심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었고, 사람과의 관계도 참 어려웠다. 친하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고, 친밀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 은혜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3학년 국어과 김정희를 생각하니 섭섭함이 밀려왔다. 은혜가 작년에 장기 출장을 가게 되면서 교육청에서 위촉받은 일을 못하게 되어 대신 정희를 추천해 주었다. 정희는 은혜에게 고맙다며 감사 인사를 몇 번이나 했었다. 한 학기 육아 휴직 후 돌아온 정희에게 온라인 수업 방법과 도구들을 따로 시간 내어 알려주기도 했다. 이번에 은혜 일이 터지고 나서 정희는 태도가 돌변했다. 국어과 선생님들의 탄원서를 박수현이 건네주며, 정희는 바빠서 못 썼다고 전해 주었다. 은혜 대신 보강 수업을 하고 교과 부장을 떠맡게 되어 힘이 들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3학년 국어과 서주현은 은혜와 특별한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은혜가 국어 교사들에게 자신 때문에 보강하게 해서 너무 미안하고 고맙다고 전체 메시지를 남겼을 때, 가장 먼저 주현이 장문의 답글을 보내왔다. 학교 일은 잊고, 말고 수사가 잘 마무리되도록 거기에만 신경 쓰라고 진심으로 걱정해 주었다. 탄원서에도 은혜가 얼마나 수업에 열성적인 교사인지 구체적인 사례까지 밝히며, 열심히 훈육하는 교사를 신고하고 수업 배제시키는 현실을 개탄한다는 진정성이 가득한 내용의 글을 세 페이지나 써 주었다. 은혜는 특별히 주현에게 도움 준 일도 없는데, 그토록 진심 가득한 내용의 탄원서를 받으니 고맙기 그지없었다.

 

  이번 일을 겪으며 은혜는 사람 관계는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듯이. 모든 일은 나쁜 면만 있지는 않았다. 이번 일을 계기로 누가 정말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인지 걸러낼 수 있게 되어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공원에서 한참을 걷고 나서 5층 교무실로 올라갔다. 진로부장 지수가 새로 뽑힌 50대 후반의 기간제에게 업무 인수인계를 막 끝내고 인사를 나누던 참이었다. 은혜가 또다시 오해받고 싶지 않다고 해서 업무는 진로 부장이, 수업은 1학년 국어과 장영미가 인수인계하기로 되어 있었다. 지수는 학교 경험이 처음인 50대 후반의 기간제에게 나이스 접속부터 시작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알려주어야 했다. 어찌 보면 손이 많이 가는 나이 많은 계원을 모시게 되었음에도 속이 깊은 지수는 전혀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은혜 샘, 어디 다녀와요? 오늘까지 출근이라 마무리할 게 많죠?”

  “아니에요. 이번엔 인수인계도 제가 안 했는걸요.”

  “선생님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나 같으면 벌써 힘들다고 병가 들어가고 말았을 거예요. 샘처럼 계속 교장 찾아가서 수업 복귀 요청하고, 해당 아이들이나 학부모와 자리 마련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직접 해결하려고 못 했을 것 같아요.”

  “그럼 뭘 해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는걸요. 결국엔 이렇게 떠밀려서 병가 들어가잖아요.”

  “아니에요. 그것만으로도 정말 멋져요. 샘은 할 만큼 했어요. 이제 더 신경 쓰지 말고, 병가 기간 동안 좀 쉬고 바람도 쐬면서 기분 전환도 하고 그래요. 수사에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고요."

  지수는 끝까지 은혜를 걱정하고 염려해 주었다.

  “부장님께는 죄송하다는 말밖에 드릴 말씀이 없네요. 하나밖에 없는 계원이 이런 일에 휘말려서 신경 쓰이게 하고, 도와드린 것도 없고 너무너무 죄송해요.”

  “별말씀을요. 새로운 학교 와서 적응 못하고 있을 때 샘이 보여준 배려와 여러 가지 정보가 얼마나 도움이 되고 힘이 되었는데요.”

  지수는 따뜻한 눈빛으로 미소 지었다. 건강 잘 챙기라며 은혜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은혜의 눈시울이 금방 붉어졌다. 지수는 그 뒤로도 퇴근하면서 은혜에게 전화로 안부를 물었고,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계속 신경 써 주었다.      


  선영과 현정, 영심도 짐을 챙기고 있는 은혜를 찾아와 인사를 건넸다.

  “정 부장, 일단 지금까지 받은 탄원서야. 그 일은 변호사한테 맡기고 일단 잘 쉬어.”

  현정은 두툼한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정말 고마워요.”

  “어이구, 정 부장, 우리 한 번 안아보자.”

  선영이 은혜를 안으며 살며시 토닥였다.

  “교회에서 예배 끝나면 가끔 만나서 밥 먹어요.”

  선영의 말에 영심이 끼어들었다.

  “같은 교회 다닌다고 둘이서만 만나지 말고, 주말에 같이 만나. 우리가 연락하면 바로 나와, 알았지?”

  “네에.”

  은혜는 친언니가 없어 늘 아쉬웠지만, 이렇게 따뜻한 언니들이 주변에 있어 참 감사했다. 우여곡절 끝에 은혜는 5월 둘째 주부터 한 달의 병가에 들어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은혜의 병가가 그토록 길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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