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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향 Sep 23. 2023

<소설 티처스-안녕하세요, 선생님!> 8화 (1)

8화. 정신의학과 진료 (1)

  15년 만에 처음 병가를 쓰고 있지만, 은혜는 단 하루도 편하게 쉬지 못했다. 경찰 수사 관련해서 계속 신경을 써야 했으며, 학교 상황에 대해서도 파악해야만 했다. 

  “선생님, 경찰에서 사건을 남부경찰청 여성청소년과로 이관한다고 연락이 왔어요.”  

  오랜만에 권 변호사한테 온 연락이었다. 

  “만 13세 미만 아이들이 있어서 경찰청으로 이관하는 것이고, 수사 과정은 똑같아요. 이제야 이관되었으니 경찰 조사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


  은혜는 앞으로 수사가 어떻게 진행될지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경찰 조사받을 거 생각하니 마음이 좀 많이 힘드네요.”

 혹시 엄마 방에까지 통화 내용이 들릴까 봐 은혜는 방문을 잠그고, 드레스룸 쪽의 베란다로 가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은혜는 가족 누구에게도 이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결혼해서 지방에 살고 있는 오빠는 어차피 명절이나 가족 행사 때나 만나는 사이였다. 혼자 겪어도 억울하고 힘든 일을 다른 가족들까지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병가를 냈다는 것도 엄마한테 말하지 않았다. 엄마는 코로나가 심해져 재택근무와 출근을 병행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은혜는 어떤 날은 동네 도서관에 하루 종일 있거나 공원에서 걸었고,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혼자 감당하고 있는 모든 상황이 은혜에게는 지독하게 버거웠고 그럴수록 마음은 아득하고도 무겁게 침잠했다.      


  “제가 전에 힘드시면 정신의학과 진료받으라고 말씀드렸는데, 아직도 안 받으셨어요?”

  “그때 두 군데 예약해서 아직 대기 중이요. 초진이면, 두세 달은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예약 취소된 자리 있으면 먼저 연락 준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병원 꼭 다니시고, 병가라고 집에만 있으면 더 우울해지니까 어디 가셔서 기분 전환이라도 하고 오세요.”


  은혜는 권 변호사와의 통화를 마치고 침대에 맥없이 누웠다. 이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앞이 막막했다. 자꾸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병가 일주일 만에 얼굴은 훨씬 더 수척해졌다. 그나마 학교에서 부장들 덕에 챙겨 먹을 수 있었던 점심 한 끼마저 못 먹으니,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식사를 안 했다. 어제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과일 몇 조각과 빵 한쪽으로 하루를 때웠다. 같이 살고 있는 일흔이 된 엄마와는 오래전부터 따로 식사를 했다. 엄마와 입맛도 너무 달랐고, 식사 시간도 달랐다. 밥 때문에 다툼이 많아지자 은혜가 밥은 각자 알아서 해결하자고 했었다. 은혜는 하루하루 자신이 시들어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학생인권 부장 경호가 가끔 은혜에게 전화해 수사 관련한 소식을 전해주기도 했다.

  “부장님, 서부경찰서에서 경찰이 얼마 전에 학교로 나와서 해당 아이들 조사하고 갔어요. 부장님, 아셔야 할 것 같아서 전화했어요.”

  “경찰이 뭐라던가요?”

  “진술서 쓴 아이들 한 명씩 불러서 물어봤지만, 직접 피해를 입은 학생과 간접 피해 학생을 구분하는 것이 애매하다고 했어요. 그래서 경찰청에서 직접 판단해서 수사하라고 아이들이 처음에 쓴 사실확인서를 넘긴다고요. 학교에 원본 대조필 찍어서 사실확인서 보내달라고 해서 보냈어요.”


  “학교에서 받은 과장된 사실확인서가 그대로 경찰 수사 자료로 넘어갔다고요?”

  아이들끼리 모여서 쓰면서 부풀리고 왜곡된 내용의 사실확인서가 결국 경찰 수사 자료로 그대로 넘어가다니 은혜는 망연자실했다. 수사 기관에서 아동 피해자의 진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권 변호사가 했던 말이 떠올라 불안하고 가슴이 거세게 쿵쾅거렸다.     

  “참, 시청 아동보육과에서도 학교로 나와서 관련 학생 상담한다고 하기로 했어요.”


  은혜는 연락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 오른쪽 가슴에 찌릿찌릿 통증이 느껴졌다. 새벽까지 잠도 오지 않았다. 은혜는 자신에게 휘몰아친 상황을 생각할수록 분노와 억울함과 수치심과 비참함에 고통스러웠다. 입맛도 잃었고, 기운도 없었다. 절망의 늪에 빠져 마음이 한없이 피폐해졌다. 작은 일에도 큰 소리로 웃던 얼굴은 무표정해졌고, 총명하게 빛나던 눈빛은 퀭해졌다. 미소가 사라진 얼굴엔 진한 주름이 새겨졌다. 머리는 지끈지끈 쑤셨고, 온몸이 아팠다. 숨 쉬는 것도 힘에 겨웠다.      



  은혜는 빠르게 진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더 알아보았다. 다행히 H 정신의학과는 며칠 만에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초진이라 수많은 검사 문항에 한참 동안 답을 하고 나서야 진료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예순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 의사였다. 염색을 하지 않은 흰머리 때문에 더 늙어 보였다. 은혜는 힘들게 입을 뗐다. 겪고 있는 아픈 이야기를 꺼내는 게 쉽지 않았다. 중간중간 목소리가 떨리고, 눈물이 흘렀다. 책상 위에 놓인 티슈로 눈물을 닦아내며 그간의 이야기를 겨우 마쳤다. 은혜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의사가 입을 열었다.


  “내가 정은혜 씨를 탓하는 건 아니지만, 은혜 씨도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요즘 아이들이 선생님이 혼낸다고 말을 듣는 것도 아니고... 열정만 가지고 지도한다고 해서 어디 아이들이 바뀌나요.”

   노 의사의 나무라는 듯한 차가운 말에 갈라진 가슴이 더 후벼 파는 것처럼 쓰라렸다. 겨우 힘들게 받게 된 정신의학과 진료에서 위로와 공감은커녕 따끔한 질책만 받고 진료실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애써 시간과 비용을 지불한 정신의학과 진료가 이런 거라니 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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