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주차 | 자고 또 자고

낮잠이 필수가 된 나른한 일상

by 고지은


어젯밤 푹 잤지만, 낮잠은 또 얼마나 깊은지!

그래도 끼니는 거르지 않는다. 나의 하루를 아침·점심·저녁으로 구분하는 건 시간이 아니라 식사니까. 세끼 중 하나라도 빠지면 온전한 하루가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이, 30여 년 살아온 내 인생의 철칙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2인분에 가까운 1인분을 든든히 챙겨 먹으며 점심을 연다. 곧바로 설거지를 하고, 바닥에 튄 비눗물을 닦아내다 묻어 나온 새까만 생활 때에 놀라 거실과 방까지 물청소를 했다. 깨끗해진 집안을 돌아보니 만족스러워 머릿속까지 환해진다. 이런 말똥말똥한 맑은 기분은 참 오랜만이다. 반가운 마음에 덮어두었던 소설책을 펼친다. 분명 빠져들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였는데, 깜박 졸다 하마터면 그 장표를 찢을 뻔했다.




툭, 우당탕!

팔이 책상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과 7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다.)이 떨어지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깬다. 온몸의 신경이 바짝 긴장해서 심장이 쿵쾅 거리는 것은 잠시일 뿐. 두 눈은 꿈-뻑 - 꿈 - 뻑, 무겁게 겨우 떠진다. 5분은 지났을까,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의자에서 스르르 일어나 침대로 향한다. 그대로 4시간을 내리 잤다.




자고 또 자고

이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요즘 나는 마치 갓 태어난 아기처럼 자고 또 잔다. 밤에 푹 자고도 아침이나 점심, 아니면 저녁에 한 번은 꼭 단잠을 잔다. 이건 나의 의지가 아니라, 몸이 보내는 강력한 신호를 기꺼이 따르는 것이다. 잘 자고 잘 먹는, 겨우 이 루틴만으로도 온 가족들에게 칭찬받는 삶이라니. 이토록 편하게 살아본 적이 있던가!




아마 선명한 기억이 없는 신생아 때보다 행복수치가 더 높을 거다. 아기라면 배고든 졸리든 우선 울고 볼 텐데, 지금 나는 악을 써서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먹여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먹고, 재워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자니 말이다.




몇 년 전, 임신한 친구가 회사 휴게실에서 몰래 잤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땐 예사로 들었지 이 정도인 줄은 정말 몰랐다. 정해진 시간에 일이나 공부를 반드시 해내야 하는 임산부들은 얼마나 고될까? 임신 초기인 사람들에게 단축근무 제도가 필요한 이유를, 출퇴근하지 않는 나도 아주 깊게 공감한다.




나도 안다. 피곤하거나 졸릴 때 바로 누울 수 있는 건 참 감사하고 다행이다. 하지만 사실, 내 마음은 마냥 편하지는 않다. 어떤 날은 어제도, 오늘도 잠만 잤다는 생각에 조금 한심하기도 하다. ‘0살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이렇게 잠만 자도 되는 거야? 깨어 있는 시간에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임신하고도 일하러 다니는 멋진 여성이 얼마나 많은데!’ 업무 스트레스 없이 오롯이 나의 컨디션에 따라 평온한 일상을 보낼 수 있음에 기쁘다가도 이런 생각에 빠지면 급격하게 속상해진다. 이 생각도 내 의지가 아니다. 뇌 어딘가에서 슬그머니 밀려온 신호일 뿐이다.




남편은 억지로 잠을 이기려 하지 말라고, 엄마가 자야 뱃속의 아기도 잘 자면서 크지 않겠냐며 나보다도 내 잠을 이해해 준다. 시어머니는 본인도 그랬다며, 충분히 더 자라고 하신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고 응원해주시는게 새삼 감사하다.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는, 임산부에게 이보다도 좋을 수 없는 환경인데도 왜 나는 가끔 불편한 마음이 들까? 나는 언제나 일을 잘하는 사람이고 싶었고, 무언가를 성취하려면 치열한 노력이 따라야 의미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모든 일은 나의 <의지>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 기울이는 데는 서툴렀다. 그러니 그저 <본능>에 이끌려 스르르 잠드는 내 모습이 낯설고 어쩐지 석연치 않았던 것이다.




여전히 바쁘게 일하는 친구들이 가끔 부럽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 이룰 수 없는 욕심은 잠시 내려놓기로 한다. 오히려 잘 먹고 잘 자며 지내는 지금의 일상을 내가 더 다정하게 바라보고 아껴야겠다.

오늘도 기특하게, 참 잘 잤네. 잘했어!



아가야,
오늘도 잘 잤어?

아빠는 원래도 잠꾸러기
엄마는 지금은 잠꾸러기
너는 한동안은 잠꾸러기.
지구별에 와서도 잘 자는 건강한 아기가 되길 :)

문득 궁금하다.
내가 단잠에 빠져 있을 때
네가 먼저 깨서, 나를 기다린 적이 있니?

2025.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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