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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미 Nov 30. 2023

엄마는 괜찮아

“엄마 손가락 어때? 내가 해보란다고 진짜 하네. 엄마도 참.”

아들이 웃으며 말한다. 아직도 손가락이 아리다. 잘린 손가락을 너무 늦게 병원으로 들고 가서 제대로 붙일 수가 없었다. “엄마는 괜찮아.” 한 마디 하고 정신을 잃었던 탓이다. 한참을 기절해 있다 일어났을 때는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근데 대박 신기하더라.”

아들의 말에 나는 아무 말 없이 고통을 삼킨다. 아들은 나에게 고통을 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힘을 얻는 걸까. 아들의 마음을 알고 싶어 시간 날 때마다 도서관에 가서 유아심리학부터 아동 발달심리학, 뇌과학에 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는다. 그리고 내가 써 놓은 육아일기와 그 시기에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찾아내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이런 시간마저도 아들이 그나마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다 오거나 여행을 갈 때나 가능하다. 하지만 그 소비한 시간이 무색할 만큼 찾아낸 단서가 없다. 어쩌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게 있는 걸까?     

이번엔 아들이 이렇게 묻는다.

“엄마. 고흐는 왜 자기 귀를 잘랐어?”

“음…. 여러 추측이 있는데 정신이상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엄마도 잘 모르네.”

“정확하게는 모르지.”

“엄마 고흐 좋아하잖아. 정신이상인 화가를 왜 좋아해?”

“아…. 나는 고흐 그림을 좋아하는 거지.”

“실망인데. 엄마가 좀 더 알아내 봐. 내가 실망 안 하게.”

“어?”

“엄마 나 어렸을 때 맨날 그랬잖아. 모르는 거 있어서 물어보면 엄마 실망 안 하게 스스로 알아내라고. 나 그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엄마도 한 번 알아내 봐. 고흐가 왜 귀를 잘랐는지.”

몸이 떨려 대답을 할 수 없었지만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어넘긴다. 하지만 살기 위해 알아내야만 한다는 것을 직감한다. 처음 작은 장난으로 시작한 아들의 괴롭힘은 점점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아니 이미 나는 답을 알고 있다. 모두 나의 잘못이다. 


아이가 네 살쯤 됐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기억력이 너무 좋아 천재 소리를 곧잘 들었던 아들에게 점점 욕심이 생겼다. 말은 3세 이전부터 잘했고 4세 때 한글을 거의 다 읽을 줄 알았으며 동화책을 스스로 읽기 시작했다. 아이의 머리가 비상하다는 것을 안 뒤로는 여러 종류의 책을 쌓아놓고 읽게 했다. 갑자기 질문을 하여 대답을 못 하면 스스로 알아내라고 독촉했다. 욕심에 눈이 먼 나는 조그마한 아이에게 수학과 과학까지 가르치며 아이가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을 즐겼다. 내가 못 하는 것을 아이가 척척 해낼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언제나 나는 천재들의 행동과 인생에 관심이 많았다. 신기하면서도 알 수 없는 쾌감. 그것은 대리만족 그 이상이었다. 사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은 그 어느 것 하나 잊지 않고 다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가 모르는 걸 알아내는 것을 퀴즈 놀이처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들이 성인이 된 후, 그러니까 나의 통제 하에서 벗어나면서 우리의 관계는 역전되고 말았다. 성인이 된 아들은 모든 걸 알면서 저렇게 나한테 질문을 툭 던진다. 자신이 엄마한테 문제를 던지고 알아내게 하고 고통을 줌으로써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지. 내가 느꼈던 쾌감. 그 쾌감을 아들이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신’. 

정말 신이 있다면 아들을 제발 멈추게 해 주셨으면. 그전에 내 죄부터 용서해 달라고 빌어야 하겠지.




아들은 주말 동안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고 하고 나갔다. 자신이 돌아오자마자 질문의 답을 알려달라는 말과 함께. 아들이 나가고 바로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결국 도서관으로 향한다. 나는 옛날 사람이니까, 검색으로 알아낼 답을 원해서 물어본 게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다. 도서관에 도착해 고흐에 관한 책을 쌓아놓고 하나하나 펼쳐본다. 시간이 없다. 빨리 찾아야 하는데 나는 고흐의 한 그림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앉아있다.

왜 하필 고흐일까? 반 고흐가 어떻게 죽었지? 총에 맞고 정신병을 앓다 쓸쓸히 죽어가지 않았던가. 그는 너무나도 처절히 외로웠던 게 아닐까. 누가 그를 진심으로 이해했을까? 동생이? 아니 형이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의 반도 동생은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나는 잘린 귀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그의 죽음 깊은 곳으로 빠져든다. 아들이 원했던 것이 이것일까? 잘린 귀는 결국 죽음을 말하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그림을 보며 구렁텅이에 빠져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림들이 나에게 속삭인다. 네가 잘못했다고, 다 네가 잘못했다고. 순간 정신을 차리고 정리해 본다.

     

‘1888년 고갱이 아를에 있는 고흐를 찾아갔고 거기서 함께 지내다가 싸우게 되어 그 정신적 충격으로 고흐는 귀를 자르게 된다. 하지만 고갱이 잘랐다는 소문도 있고 동생 테오의 결혼 소식을 듣고 불안감에 귀를 잘랐을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아무리 읽어도 무엇 하나 정확한 게 없다. 인생이라는 것, 엄마가 된다는 것, 아이를 키운다는 것도 마찬가지지 않을까. 무엇 하나 정확한 것이 없다. 홀로 아이를 키워야 했기에 엄격하게 대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독립적이니 아이도 독립적으로 강하게 자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확신하면 안 되었다. 강하게 자란 건 맞을지도 모른다. 다만 강한 악마로 컸다는 게 문제다.

나는 사랑을 잘 몰랐던 것 같다. 쓸데없는 욕심, 과도한 관심을 사랑으로 착각했던 걸까. 내가 사랑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랑도 모성애도 그 무엇도 아닌 괴물을 만드는 레시피였나 보다. 집중해서 자료를 찾다 보니 피로가 몰려온다. 집에 가서 항우울제, 아니 수면제를 먹고 억지로라도 자야 할 것 같다. 나는 나의 이런 상태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다. 천재아들을 가진 축복받은 엄마라고 주위에서는 나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그 비결이 궁금해서 안달이니까. 사실 나는 무엇이라도 붙잡고 살려달라고 외치고 싶다. 왜냐하면 아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이는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4살 때부터 복수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반 고흐의 책들을 다 빌려서 집으로 들고 왔다. 이 책들이 날 구해줄 수 있을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재미있게 공부해서 알아낸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설명해 줘야 할 텐데. 

잠깐 잠이 들었다가 화들짝 놀라 깼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약을 먹고 잠들어서 어떻게 된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일요일이다. 주말이 끝나간다. 아들이 저녁 전에는 올 텐데. 다른 생각 할 틈도 없이 세수하고 몽롱한 잠에서 깨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커피를 진하게 내려 급하게 마시니 속이 쓰려온다. 아들한테 보여줄 자료들을 다시 확인해 본다. 잠시 종이들을 옆으로 밀어버리고 나는 고흐의 그림을 출력한 종이에 연필을 들고 편지를 쓴다.

‘아들. 네가 물어본 거 엄마 열심히 찾아봤어. 그러다 깨달았지. 그 누구도 반 고흐를 진심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거야. 혹시 울 아들도 엄마한테 그렇게 느낀 거야? 외로웠니? 엄마가 너를 외롭게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더구나. 그렇다면 미안하다.’

아들이 올 시간이 다 됐다. 나는 편지를 쓰다 멈췄다. 진짜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으므로. 마음속으로 아들한테 편지를 쓴다. 엄마가 찾은 반 고흐의 귀에 대한 자료들은 분명 너의 마음에 내키지 않을 테고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사실 엄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고흐도 이런 마음으로 자기 귀를 자른 것이 아닐까. 다른 사람이 고통받기보다 그냥 내가 고통을 받아들이자. 사랑받지 못한 고통, 창작의 고통. 그의 인생은 고통 그 자체였으리라.      

아들이 아파트 입구로 들어오는 알람음이 울린다. 나는 자주 쓰는 빵칼을 한 손에 들고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나의 왼쪽 귀를 드러낸다. 아들이 만족할 만한 답을 준비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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