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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미 Dec 14. 2023

글이 사라졌다

귀뚜라미도 잠을 자는 고요한 밤이다. 어김없이 밤이 찾아오니 얼마나 다행인가. 고요함을 깨고 싶지 않지만 난 버릇처럼 노트북을 연다. 요즘은 노트북이 나의 마음을 받아주는 유일한 친구다. 밤에 커피를 마시고 싶지만 집안에 커피 향을 퍼트리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이 시간에는 피곤이 밀려와 차라도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글을 쓰던 파일을 열어둔 채 자리에서 일어난다. 머그잔을 꺼내고 캐모마일차 팩을 컵에 넣은 뒤 정수기의 온수를 누른다. 낮에 비하면 조용하긴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밤에도 온갖 소리가 들려온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 가전제품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밤에 안 자는 내가 내는 소리. 초고를 쓰는 것이니 일단 다 적어놓고 나중에 고치자는 다짐으로 생각나는 것을 다 쓰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글이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가는 게 문제지만. 요즘은 육아하며 힘들었던 시기에 관해 쓰고 있다. 모유 수유를 하던 때, 아이가 막 걷기 시작했을 때, 쪽쪽이를 떼던 때 등을 쓰는데 아기 시절은 정말 힘들었지만,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린 것 같다. 그런데 가끔 썼던 것을 또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음 날 저녁을 먹으며 나는 남편한테 내가 쓰는 문장이 지워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 전날 쓴 것을 어제 다시 쓴 것 같다고 얘기하는데 남편은 피곤해서 기억을 못 하는 것이라며 무리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런가. 내가 정말 잘못 기억한 것일까? 출산 후 깜빡깜빡하긴 하지만 뭔가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그날도 어김없이 밤이 왔다. 노트북을 열어 놓고 화장실에 갔다 오는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아이가 내 노트북 앞에 서 있다. 예원이? 우리 예원이 거기서 뭐 해? 아이한테 가까이 가는데 아이는 노트북의 딜리트 버튼을 마구 누르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노트북 빛에 반사되어 보일만도 한데 어둡다. 아이의 얼굴을 보려고 어깨를 당기는데 아이가 사라진다.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며 나는 잠에서 깬다. 꿈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남편한테 꿈에 관해 이야기한다. 남편은 느닷없이 글을 그만 쓰는 게 어떻겠냐고 말한다. 아니 나는 이럴수록 더 열심히 써야겠다고 대답한다. 나는 책을 내야겠다고. 예원이와 나의 책. 남편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뭐가 그렇게 걱정스러운지 모르겠다. 예원이가 꿈에 나왔으니 대박 날지도 모르는데. 어젯밤 그렇게 잠들어버려서 오늘은 꼭 기억을 살려 제대로 써보겠노라 다짐한다. 사실 나는 불면증이 심한데 어제는 어쩌다가 잠이 들었다. 오늘은 어떤 글이 사라졌을까. 노트북을 열어본다. 누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아이가 나를 닮아서 좋은 점 혹은 나를 닮아서 안 좋은 점을 쓴 부분에서 뭔가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나를 닮아서 아토피가 있었고 많이 아팠던 아이에게 정말 미안했다고 썼었는데 미안함을 느꼈던 부분이 교묘하게 지워져 있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나오는 것을 애써 참아본다. 손 쓸 수 없는 유전자를 탓하면 뭐 하겠는가. 나는 글을 쓰며 울만큼 울었고 더 이상 우느라고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 밤의 시간은 나만을 위한 시간이고 아무도 나를 방해할 수 없다. 그래 육퇴. 육퇴라는 단어를 쓴 게 언제인가 기억을 더듬어 본다. 나는 육퇴를 왜 그리 좋아했을까. 육퇴를 아쉬워할 순 없었을까. 엄마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육퇴에 관해서도 조목조목 쓰기로 한다.     



다음 날 나는 남편에게 다시 일을 시작해 볼까 생각 중이라고 말한다. 남편은 이력서부터 천천히 써보라고 도와주겠다고 한다. 글을 안 쓰기로 했냐고 물어보는데 잠깐 화가 났다가 참고 책은 계속 쓸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어떤 글이 지워졌는지 찾았다고 설명했다. 내가 ‘미안했다.’라고 쓴 부분이 몇 군데 지워졌다고 혹시 당신이 내 글 지운 거 아니냐고 넌지시 물어본다. 내가 아니라는 거 잘 알잖아. 그럼 정말 예원이가 그런 것일까? 남편은 이 말에 대답을 안 하고 자리를 뜬다. 나는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이력서를 쓸 수 있을까? 잡념을 없애고 밤에 조금이라도 자려면 일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정신을 붙잡아 본다. 그날 밤 나는 참다못해 맥주캔을 땄다. 밖에서는 고양이들이 짝짓기 하는지 서로 날카롭게 울어대는 소리가 난다. 아니 싸우는 것일까. 아기 우는 소리 같기도 하다. 아기일까? 나는 나도 모르게 터벅터벅 걸어 운동화를 구겨 신고 밖으로 나가본다. 날카로운 소리를 따라 걸어간다. 어디 있니. 괴로워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고양이 울음소리인지 아기 소리인지가 그치질 않길 바라며 계속 걸어가다 발을 헛디뎌 넘어진다. 나의 넘어지는 소리 때문인지 소리는 끊겨버린다. 어 피. 피가 난다. 무릎을 돌에 부딪친 걸까 피가 제법 많이 난다.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선명한 나의 피. 뭐 이 정도 상처가 대수인가. 이런 거는 아무것도 아니지. 이건 아픈 것도 아니야. 이런 아픔은 진짜 아픔이 아니다. 나는 계속 글을 쓸 수 있을까. 정말 남편 말대로 그만 써야 할까. 무슨 개 같은 소리. 피가 다리를 타고 흘러 나는 다시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돌아와 손을 깨끗이 씻고 상처는 대충 반창고를 붙여 막는다. 상처는 그냥 대충. 항상 그랬지. 어떤 상처든지 대충 막아버리면 된다고. 그러니 상처가 아무는지 다시 곪는지 알 수 없다. 내가 그 아기를 아니 고양이를 찾아서 보듬어주지 못해 아쉬운 밤이다. 그전에 내 상처부터 보듬어줘야 할까. 아쉬운 마음에 맥주 한 캔을 다 비우고 다른 한 캔을 딴 후 술기운에 떨리는 마음으로 노트북을 열었다. 나는 ‘미안했다. 미안하다. 미안했다. 미안하다.’를 연거푸 끼워 넣는다. 이게 왜 다 지워졌을까. 미안하게. 글이 사라지는 것도 누군가가 나와 수수께끼를 하는 듯하다. 무섭다기보다 멍청하게 누군가와 함께 글을 쓰는 것 같아 궁금하기만 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나한테 좋겠지. 갈증이 나서 물을 마시려고 일어나서 부엌으로 갔다. 맥주는 이상하게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난다. 물을 마시는데 어디선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가만히 들어보니 노트북 키보드를 치는 소리다. 내가 많이 취한 것일까. 일어나 있는 사람이 없는데 선명하게 들리는 키보드 소리. 나는 천천히 방으로 걸음을 옮긴다. 키보드 치는 소리는 망설임 없이, 끊임없이 들린다. 나는 일부러 벽에 기대서서 그 소리를 들어본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면 그 소리는 또 끊길 것 같다. 그 어떤 소리도 더 이상 끊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리가 끊긴다면 나는 다시 상처가 날 것이다. 몸에서 식은땀이 나면서 어지러움을 느낀다. 벽에 몸을 기대어 손으로 짚어가며 방으로 간다. 방에 들어가 노트북 앞에서 나는 바로 쓰러진다.     


다음 날 눈을 뜨니 나는 침대에 누워있고 남편이 내 옆에 앉아있다. 남편은 푸석한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술을 얼마나 마셨길래 쓰러졌냐고 핀잔을 준다. 짧은 정적이 흐른 후 남편은 살짝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언제까지 예원이 붙들고 있을 거야. 이제 그만 보내주자. 나는 아무 대답 없이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는다. 눈물이 흐르지만 닦을 힘이 없다. 나를 달래 보려는 남편에게 나는 끝까지 어제 무엇을 보았는지 말하지 못했다. 예원이가 웃으며 노트북을 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내가 쓴 글들이 다 사라진다 해도 나는 글쓰기를 멈출 수 없다는 것을 남편에게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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