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미 Dec 21. 2023

나 여기 있어요_1

그림_윌리엄 아돌프 부게로 <Song of The Angels 1881>

혜원은 새벽 공기를 마시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연다. 차가운 공기가 그녀의 몸을 감싸고 들어오고 새소리가 연이어 귀를 즐겁게 한다. ‘이 순간을 위해 이 집을 골랐지.’ 혜원은 이번에 이사 온 집이 그녀의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시켜 줄 것 같았다. 그러나 예상보다 쌀쌀한 날씨가 혜원의 따뜻해진 마음을 금세 식혀 버린다. 한숨을 한번 쉬고 창문을 닫아버린 후 의자에 풀썩 주저앉는다. 의자에 앉아 둘러보는 집은 낯설다. 무기력증에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짐들. 가장 신경 써서 옮긴 피아노에는 잡동사니들이 올려져 있다. 혜원이 소파 수술을 받은 지 6개월이 넘어가고 있다. 이번이 혜원의 네 번째 유산이었다. 지칠 대로 지친 혜원과 선우는 이사를 결심했고 조용하고 사람 없는 곳으로 오게 되었다.   

   

“우리한테 아이는 찾아오지 않을 모양이야. 그냥 우리 둘이 잘 살자.”    

  

병원에서 혜원이 선우에게 말한 이 한마디 “그냥 우리 둘이 잘 살자.” 쉽게 말한 거 같지만 그녀의 가슴속에서 피멍이 들고 있었다. 혜원의 가슴속 피멍은 6개월이 지났는데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반복적인 유산에 감정이 무뎌졌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면 시어머니 같은 사람. 하지만 내 살점 같은 존재가 떨어져 나가는 고통에 어떻게 무뎌질 수 있을까. 주말 아침 혜원은 선우에게 앞산에 가자고 한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적당한 언덕 같은 산은 혜원이 매일 오르리라 결심한 산이었는데 항상 발목을 잡는 무기력증 때문에 실천을 못하고 있었다. 선우는 혜원을 기다려 준다. 그의 마음도 무너지지만, 몸으로 아기의 존재를 느꼈던 혜원의 고통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저 아내의 상처가 낫길 기다려 준다. 산에 갈 준비를 하는 데 혜원이 애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좋은 신호라고 생각해 본다.  

    

“이 산은 다 좋은데 입구에 계단이 너무 많아.”

“계단 오르기 운동도 되고 좋지 뭐.” 혜원이 대답한다.

산에 올라가는 입구에 가파르고 높은 계단이 있다. 등산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계단 때문에 땀이 송골송골 날 정도다. 계단을 지나 숨을 고르면서 부부는 본격적으로 등산을 시작한다. 요 며칠 비가 오다가 그쳐서 땅이 살짝 젖어 있는 상태이다. 질퍽한 부분이 있지만 둘은 개의치 않고 말없이 걷는다. 습한 공기에 나무 사이로 가로지르는 햇살이 혜원의 눈에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순간 ‘삐~~~’ 혜원의 귀에 이명이 들린다. 

“왜? 괜찮아?” 멈칫하며 귀를 만지는 혜원에게 선우가 놀라서 물어본다. 

“어…. 오른쪽 귀에서 갑자기 삐- 소리가 나서. 이제 괜찮아.”

이명은 종종 혜원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독 크게 들려 혜원을 멈추게 했다. 혜원은 일부러 더 멀리 바라보며 성큼성큼 걸어가 본다. 정상을 향한 첫 번째 푯말이 보인다. 이 산은 정말 만만한 산이라 생각하며 계속 걸어간다. 혜원의 귀에 이번엔 멀리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산에서 웬 아기 울음소리야?” 

“울음소리? 안 들리는데?”

“정말 안 들려? 계속 들리는데?” 

둘은 잠깐 멈추고 서로를 쳐다본다.

“갑자기 조용해졌어.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지. 아기 옹알이 소리인가?”

“이젠 옹알이 소리도 들려?”

선우는 아무리 귀 기울여도 새소리와 다른 등산객들 지나가는 소리만 들린다. 혜원의 눈빛을 보면 헛소리하는 것 같지는 않다. 

“나 내일 정신과 가볼게. 이비인후과에 가야 하나? 도저히 안 되겠다. 계속 올라가자.”

옹알이 소리는 정상에 거의 다 왔을 때 더욱 선명하게 들렸고 정상에 다다르자, 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이제 소리는 멈췄어. 그래도 정상까지 왔다 가네.”

그 소리 때문에 둘은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바로 내려온다.




‘아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해도, 환청까지 듣다니….’ 혜원은 운동화 끈을 질끈 묶으며 생각했다. 이비인후과에서 아무 이상이 없다는 소견을 듣고 돌아와 정신과에 가기 전에 다시 한번 산에 올라가 보기로 결심한다. 미쳤다는 소리 듣기 전에 한 번 더 확인해 보고 싶었다. 혜원은 등산로 입구 높은 계단 앞에 서서 시작도 하기 전에 한숨부터 쉰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는데 계단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이 마치 숲으로 들어가는 동굴을 만들고 있는 것 같다. 가쁜 숨을 내쉬며 빠른 걸음으로 올라가는 혜원은 마음이 조급하다. 혜원은 소리에 너무 집중해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마저 크게 들린다. 그날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곳에 가까워져 오자 누군가가 멈춤 버튼을 누른 것 같이 모든 소리가 멈춰 조용해지나 싶더니 희미하게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아 미치겠네. 또 들린다.’ 잠시 나무에 기대고 서서 마음을 가다듬어 보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혜원은 두 번 생각할 필요 없이 소리가 나는 방향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산 정상이 보이고 소리는 정상에 이르기 바로 전 오른쪽에서 났다. 바로 거기서 옹알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혜원이 오른쪽으로 꺾으니, 위에서는 안 보이던 오솔길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점점 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아기의 옹알이 소리가 이렇게 신비로운 소리였단 말인가. 분명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옹알이가 힘없이 멈추는 동시에 혜원도 멈춰 섰다. 그곳을 둘러보다 혜원의 시선이 땅에 머물고 가슴이 북을 치듯 쿵쾅쿵쾅 울린다. ‘이 느낌은 뭐지? 땅에 뭐가 있나?’ 그녀는 본능적으로 땅을 파본다. 순간 뭔가가 손에 걸린다. 분홍색 얇은 이불의 모서리 부분이다. 혜원은 더 이상 땅을 팔 용기가 나지 않아 그대로 주저앉아 떨리는 손으로 선우에게 전화를 걸고 그가 오길 기다리기로 한다. 그러나 다시 옹알옹알 아기의 소리가 같이 놀자는 듯 둥글둥글하게 들린다. 혜원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그 소리가 마치 같이 있어 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것 같은 건 왜일까. 혜원은 보지 않아도 그 안에 아기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 손을 얹고 선우를 기다린다.

이전 06화 글이 사라졌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