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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미 Jan 04. 2024

나 여기 있어요_3

그림_윌리엄 아돌프 부게로 <Song of The Angels 1881>

‘그 여자는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았어.’ 집에 돌아와 혜원은 이렇게 생각한다.

“괜찮겠어? 너무 위험한 거 아냐?” 자초지종을 들은 선우가 걱정을 했다.

“경찰이 조사할 수 없으면 나라도 해야지.”

“혜원아, 위험한 짓 하지 말고 그냥 레슨만 해. 아니다. 레슨도 하지 마. 네가 그 집에 왔다 갔다 하는 거 생각만 해도 소름 끼쳐. 당장 또 이사 가고 싶구만.”

“이건…. 저주일 수도 있고 기회일 수도 있지 않을까.”     


혜원은 일주일에 한 번씩 503호로 가서 피아노 레슨을 했다. 503호 여자는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어 초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초등학생이 치듯이 그녀의 연주에는 아무 감정이 들어있지 않았다. 강약과 리듬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고 혜원은 설명했다. 그녀는 한동안 무표정으로 대답하고 피아노를 쳤다. 그녀가 유난히 무기력해 보일 때 혜원은 그녀에게 연주해 주었다. 혜원이 마음이 힘들 때 연주했던 곡들을 최대한 기억해 내 하나하나 감정을 실어 연주했다.      

차갑고 온기가 하나도 없는 집에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진 지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혜원이 레슨을 하러 현관문이 열려 있는 503호로 들어가는데 여자가 보이지 않는다. 모든 불은 다 꺼져있어 방은 어두웠다. “안 계시나요?” 혜원이 인기척을 내며 들어가 살펴본다. 아기의 옹알이 소리는 이 집에 올 때마다 들리지만 혜원은 절대 내색하지 않는다. 방에 들어가는 순간 검은 그림자 덩어리에 깜짝 놀라 혜원은 소리치며 넘어질 뻔했다. 여자는 방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며 담담히 혜원에게 연주를 부탁한다. 혜원은 잠시 고민한 후 프란츠 골든의 연주곡 중 <Togetherless>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의 연주곡은 부드럽지만 슬프고, 슬프지만 감미로운 곡이다. 연주가 끝나갈 무렵 그녀의 어깨가 소리 없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목이 메어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던 그녀는 결국 꺼억꺼억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고 바닥에 주저앉아 마치 몸 안의 쌓인 것을 다 토해내듯 통곡한다. 혜원은 그날 처음으로 그녀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았다.     



혜원은 그동안 자신한테만 들리는 소리는 일절 안 들리는 척 무시하고 503호 여자에게만 집중했다. 그녀는 감정을 잃은 아픈 여자였다. 그날 혜원은 그녀가 어느 정도 진정될 때까지 지켜보다가 말없이 인사만 하고 나왔고 다음 날 그녀는 경찰에 자수했다. 그녀의 집 냉동고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또 다른 영아의 시신이 있었고 산에서 발견된 아기의 시신도 그 여자 범행인 것이 밝혀졌다. 담당 형사는 앞으로 다른 지역에서도 혜원 씨의 도움이 많이 필요할 것 같다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처음 혜원을 대했던 태도와는 너무 다른 싹싹한 태도였다. 경찰서에서 집으로 돌아온 혜원은 그제야 쌓인 짐들을 정리했다.     

 

'사람들은 영아 시신들이 발견되는 잔혹한 뉴스에 무뎌지고,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듯이 세상은 돌아간다. 신이 나에게 원하는 것은 억울하게 죽은 영아들의 원한을 풀어주라는 것일까. 왜 하필 나일까. 예민한 귀를 가져서일까. 예민한 감성을 가져서일까. 이것이 저주인지 기회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의 마음을 너무 애절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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