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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미 Jan 11. 2024

기다림의 방

그림_에드가 드가 <Waiting 1882>

장바구니를 챙겨 마트에 장을 보러 가는 길에 보이는 짱오락실. 아들과 에어하키게임, 볼링게임을 즐기는 짱오락실을 눈으로 훑고 지나간다. 가끔은 혼자서 스트릿파이터나 버블버블을 하고 싶지만 어른 혼자 평일 오전시간에 게임을 하고 앉아있다는 게 어쩐지 우스워 그냥 상상만 하고 넘어간다. 오락실 안 쪽 구석에 안 보이던 낡은 부스가 보이지만 지금은 장 보러 갈 시간이니 그것도 지나친다.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를 매일매일 반복해서 생각하다 보면 이건 정말 할 짓이 아닌 거 같다. 어디 가족 기숙사 같은데 없나? 단체 급식 가능한 가족 기숙사에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장을 본다. 아이의 입맛에 맞추다 보니 별로 살만한 게 없지만 내 할 일을 안 할 수 없다. 주중에 장 보고 뭐라도 만드는 건 엄마의 일 아닌가. 고심해서 산다고 샀는데 장바구니가 너무 무거운 건 싫어서 적당히 주워 담고 마트를 나선다. 할 일을 했으니 아까 오락실에 있던 부스를 좀 자세히 보기로 한다.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부스 앞으로 가는데 고장 난 코인노래방 부스 같기도 하다. 옆쪽에 플라스틱 바구니가 달려있고 그 위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핸드폰을 바구니에 두고 20분간 부스에서 시간을 보내세요."라고 적혀있다. 부스의 주위를 천천히 살펴보니 문 위 중앙에 '기다림의 방'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한다. 초등학생이 적은 글씨로 보이는 게 누군가가 장난을 친 것인가.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은데 평소에 돌아다니던 알바생도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보이지 않는다. 분명 모든 게임기는 켜져 있는데 이 부스도 이용 가능한 것일까. 보통 코인노래방의 문은 유리로 되어 있어 어느 정도 보이지 않나? 왜 이 문은 다 가려져 있는 것일까. 어쩌면 코인노래방이 아니었는지도 모르지. 호기심이 발동하여 문을 슬쩍 열어본다. 나무로 만들어진 부스는 분명 최근에 만들어진  코인노래방 부스는 아니다. 옛날에 이런 좁은 방에 들어와 본 거 같은데 무슨 용도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 1인 사우나였나?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포장마자에나 있음 직한 파란 플라스틱 의자 하나가 달랑 놓여 있다. 장난하나. 자연스럽게 나의 시선이 빛을 찾는다. 진짜 들어갈 생각인가 보다. 아무도 없으니까. 에라이, 일단 핸드폰을 바구니에 넣고 장바구니는 그 밑에 옮겨 놓고 부스로 들어간다. 아무도 없는데 눈치를 보면서 문을 천천히 닫는다. 다행히 나무판으로 만들어진 부스라 틈에서 빛이 들어온다. 빛은 아주 얇고 가늘게 들어와 내 손을 얼굴에 가까이하면 겨우 보일 정도로 깜깜하다. 의자는 생각보다 편하다. 그러니 포장마차에서 밤새도록 이런 의자에 앉아 술 쳐 먹어도 불편한지 몰랐던 거겠지. 어둠 속에 앉아서 생각한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웃음이 피식 나온다. 


'기다림의 방'이라..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누구를 기다리나. 몇 분이라 그랬지? 20분? 그러고 보니 핸드폰이 없는데 20분이 지나는 걸 어떻게 알아? 하하하하! 너무 웃겨서 소리 내서 웃는다. 누가 들으면 미친 사람인 줄 알겠어.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려 웃다가 멈칫한다. 


"저기, 20분 후에 제가 알려드릴게요. 제가 화장실 갔다 오느라 계신 줄 몰랐네요."

"아, 네..." 

"아, 그리고 죄송한데 이 부스 이용료는 천 원입니다."

"네?? 이게 게임도 아니고 그냥 앉아 있는데 천 원이에요?"

"네, 여기 사장님이 정하신 거라.."

"아.. 네.. 여기요."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를 포켓에서 꺼내 알바생에게 건넨다. 천 원을 받은 그는 문을 닫고 나간다. 나는 자꾸 웃음이 나는 걸 참느라 5분을 흘려보낸다. 왜 이렇게 웃기지? 나는 그렇게 혼자 어둠 속에 앉아 있는다. 어둠 속에 혼자 핸드폰 없이 앉아 있던 적이 있던가 생각해 보니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똥을 누는 것도 아니고 사우나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닌 이 상황이 갑자기 새롭게 느껴진다. 난 이런 경험 처음이야. 그제야 여기 사장님이라는 사람의 의도가 조금은 이해가 가기 시작하면서 이왕 생각한 거 시간도 있겠다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이 사장님은 왜 이런 걸 만들었을까? 나는 또 왜 들어와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나무 냄새가 스멀스멀 난다. 편백나무 냄새 같기도 하고. 냄새를 맡으며 나는 깜깜하지만 눈을 감아본다. 밖에서는 게임기에서 나오는 음악과 소리가 그대로 들려 완전히 조용하지도 않아 명상을 할 분위기도 아니다. 그럼 명상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무슨 용도인 거야? 뭘 하라는 거지? 하긴 뭐 꼭 용도가 있어야 하나? 아니 천 원을 받았으면 용도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하긴 밖에 있는 게임기도 내가 뭔가 조정을 하는 거 같지만 결국은 게임오버로 끝나는 건 마찬가지. 잠시 즐기는 것 외에는 별다른 용도는 없다. 살면서 어떤 목적 없이 기다려본 적이 있던가. 나는 그저 기다림을 기다린다. 나는 평소에 무엇을 기다렸지? 남편이 빨리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밥을 차려 놓고 아이가 밥 먹길 기다린다. 아이의 하원 시간이 되면 무사히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또다시 아이가 등원하기를 기다린다. 주말을 기다린다. 빨리 육퇴 하기를 기다린다. 아파트 대출을 갚길 기다린다. 그러고 보니 내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좀 억울하네. 누가 날 좀 기다려주면 안 되나.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었구나. 갑자기 슬퍼진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깐. 어쩌면 이 미치도록 빨리 변하는 시대에 제대로 기다리는 사람이 결국 이기는 거야. 분명 그럴 거야. 그렇게 믿고 싶네. 아,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


"20분 지났습니다!" 그때 알바생이 밖에서 소리친다. 아니 20분이 이렇게 짧았어? 핸드폰 없이 있는 20분은 2시간 같이 느껴질 줄 알았는데 순식간이다. 당황해하며 문을 열고 나와 핸드폰을 확인하고 장바구니를 챙겨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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