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제리아 달 포르노
뉴발란스 992 드로우에 당첨돼 성수동에 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형형색색 우산들 사이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신발만 가져오려 했는데, 귀여운 포켓몬 양말을 사고, 좋아하는 아티스트 프레임 안에서 사진까지 찍었다. 성수동에선 지갑을 마음을 단단히 묶어놓지 않으면 소중한 내 돈이 훨훨 다 날아가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조금은 비어버린 지갑과 마음을 안고 성수를 빠져나와 왕십리로 향한다.
비 때문일까, 성수동에 다녀와서일까 왕십리는 오늘따라 더 고요하고 차분해 보인다.
작은 우산 아래 숨듯 걸어 도착한 곳은, 왕십리역 6번 출구에서 멀지 않은 작은 핏제리아다.
이름부터 도발적이다. 혀 끝에 한 번 굴려보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아슬아슬한 기분이 든다.
「핏제리아 달 포르노」
너에 대한 욕망이 화덕 속에서 부풀어 올라 팡— 하고 터질 듯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기대와는 달리(?) ‘달(Dal)’은 ‘~로부터’라는 이탈리아어 전치사고, ‘포르노(Forno)’는 화덕이라는 뜻이다.
화덕으로부터 라니...! '화덕 로맨스'라는 주제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이 있을까 싶다.
가게는 따뜻한 간접 조명 아래 차분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가 내리는 덕분에 더 낮게 깔리는 분위기,
그 따뜻한 무게감 속으로 몸을 눌러앉는다.
분명 맛있을거라는 확신이 들어 오늘만큼은 2판을 주문해본다.
마르게리따와 풍기 피자 중 마르게리따가 먼저 테이블 위에 놓인다.
피자 크러스트가 유독 팽팽하고 크게 부풀어있다.
마치 잘 발효된 빵처럼 탄력 있고 탱글한 그 모습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피자를 한 조각 베어 문다. 토마토와 바질이 마치 숨겨뒀던 비밀이라도 말하려는 듯 서로 입 안 깊숙이 쳐 들어와 마구 뒤섞인다. 향은 진하고 강렬하다. 갓 구워낸 도우의 고소함과 약간 타버린 크러스트의 쌉싸름함이 만나 더 풍성하게 어우러진다.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면 바스러져버리는, 군데군데 검게 탄 작은 부분들은 피자의 완벽한 마침표다. 이 살짝 그을린 부분이 없다면, 내가 좋아하는 화덕피자의 맛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비 오는 날이면 한국인들은 항상 "파전에 막걸리"라는 말을 인사말처럼 하고 다닌다.
하지만 나에겐 자연스레 너부터 생각난다. 예전에는 파전을 '코리안 스타일 피자'라고 부르기도 했으니
네가 생각나는 게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비 오는 한적한 거리를 바라보며 네 부푼 마음을 끝까지 꼭꼭 집어삼켜본다.
풍기 피자가 나와야 하는데, 버섯을 잔뜩 치장한 너를 보고 싶은데, 화덕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서버에게 물어보니 주방과 홀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 보다.
당일 준비한 도우가 다 소진되었단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하지만 괜찮다. 우리가 그 날 너를 만난 마지막 손님이었을테니.
그리고 이 정도의 여운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번 방문할 테니까.
이번 에세이 시리즈를 핑계 삼아 일주일에 한 번은 너와 뜨거운 맛남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 괜스레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