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강아지 번역가야
내 번역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내 삶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눈물 콧물 쏙 빼며 내가 찾은 답은 이랬다.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다. 그랬다,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었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내가 잘못된 게 아니라 내가 아닌 다른 삶을 살려고 한 게 잘못이었다. 내 문체가 아닌 다른 문체를 흉내 내려고 한 것이 문제였다. 그게 내가 내린 답이었다.
내 안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서 나는 수많은 슬픔과 분노, 죄책감, 두려움, 아픔을 마주해야 했다. 내가 살아오면서 눌러놓았던 아픔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몸에 새겨진 감각으로, 여전히 그렇게. 내가 봐주길 바라면서 내가 안아주길 바라면서. 내 안의 내면 아이가 나를 바라보며 간절히 외치고 있었다.
나 좀 사랑해줘, 나 좀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면 안 돼? 이런 모난 나도, 이런 부족한 나도 괜찮다고 해 주면 안 돼?
나는 완벽주의자였다. 게으른 완벽주의자, 완벽하지도 않으면서 완벽하고 싶은 욕심만 그득그득한 사람. 그래서 나를 늘 다그쳤다. 어쩌면 방어기제였는지도 모른다. 나를 탓하면서 타인에게 미움받지 않으려는 내면의 방어기제, 그래서 내가 나를 때렸다. 가혹하게 못되게 굴었다. 세상에서 제일 아껴줘야 할 나를 가차 없이 못살게 굴었다.
너는 이게 문제야, 그러니까 니가 사랑을 못 받지, 저 사람을 봐 저렇게 사랑받잖아, 니가 잘못된 거야. 그러니까 니가 고쳐야 해. 고쳐야만 사랑받을 수 있어.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왔다는 게 가슴으로 느껴졌다. 그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래서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픈 나를, 조건 없는 사랑에 목말라 있는 작은 나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때마다 나를 안아주기로 했다. 그래, 괜찮아, 다 괜찮아 너가 모자라도 괜찮고 완벽해도 괜찮아. 있는 그대로 너를 사랑해 줄게. 그럴 게 내가 너를 아프게 했다면 미안해. 수도 없이 그렇게 했다. 내면 아이에게 들려주고 또 들려줬다.
있는 그대로 괜찮다고, 내가 그래도 널 사랑할 거라고.
그러고 나니 내 안에 있던 슬픔, 아픔들이 내가 밀어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나를 나답게 만들어 주는 존재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래 이렇게 모난 부분, 상처받은 마음이 있어야 나구나, 그게 고유의 나를 만들어 주는구나. 그래서 완전하다고 하는구나, 나는 이대로 완전하구나, 고칠 것이 없었구나. 이렇게 따듯한 자각이 샘솟듯 솟아나기 시작했다.
세상은 모든 게 연결되어 있다고 했던가. 이런 내면의 자각이 내 안을 채우기 시작하자 번역에서도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왜 처음 샘플 번역 테스트에서는 순조롭게 붙었고, 그 뒤로 연달아 쓴 고배를 마셔야 했는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내면에서 나에게 영감을 던져주듯 내면의 텅 빈 곳에서, 그동안 몰랐던 통찰들이 속속 튀어올랐다.
그랬다. 나는 내 문체를 죽이고 다른 문체를 따라 하려 했다. 연신 떨어지니까, 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뭘 고쳐야 하지, 내가 무얼 잘못한 걸까, 또 떨어질까 봐 무서워, 이런 마음이 내 문체를 눌러버린 것이다.
내 문체는 담백하고 간결하지만 부드럽고 감정을 담은 문체다. 이른바 강아지 문체. 그런데 이런 내 고유의 문체를 누르고 정보 전달에 강한 정제된 문체를 따라 하려다 헛발질을 한 것이다. 강아지가 고양이 흉내를 낸 셈이다. 강아지가 아무리 고양이 흉내를 낸다 한들 고양이가 될 수는 없다. 내가 남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쇼펜하우어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다른 누구와도 자신을 바꿀 수 없다고. 지금 내 모습이 어떻든 지금 이대로의 나, 나의 개성, 그것이 바로 나라고.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으로부터 나아가야 한다고. 나는 이제 이 정답을 안고 살아가려 한다. 누구보다 나답게. 있는 그대로의 나로. 강아지 번역가로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