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이 쓰나미처럼 몰려든다. 강의 계획서를 짜야하고 출간할 책의 표지와 굿즈디자인도 내 몫이다. 새로운 작업도 게을리해서는 안 되고, SNS도 운영해야 하니까. 수업 때 다루어야 하는 디지털 도구도 연습을 좀 더 해야 한다. 집에서 살림만 하다가 새로운 시도 한 가지를 해도 바쁠 텐데, 한정된 시간에 에너지도 정해져 있는 나에게는 하루하루가 버겁다.
지옥의 스케줄 라인을 보고 있으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다시 일하기 전에 무기력했던 시간이 있었다. 그때는 남편은 늘 바빴고 나는 아이 둘을 보며 집에 있었는데 그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절실함 따위는 하나도 없었고, 침대에서 반나절 이상 누워있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 내가 이렇게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 될 줄이야.
14년 차 부부인 우리는 뜨거운 마음을 다했던 그 시간을 뒤로하고 시들한 눈빛과 생활에 필요한 말만 하며 지냈다. 무기력한 피로에 누적된 남편은 하루 쉬는 주말이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 정말 쉬고 싶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라는 말을 계속 들으며 울분은 쌓여갔다. 이번 주말에는 남편 친구들과 모여서 고기 구워 먹자고 하는데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찡그려졌다. “나 요즘 너무 바쁜데, 나는 다리도 다치고 움직이기 힘들어. 혼자 편하게 다녀와.” 내심 서운한 표정이다. 다들 부부동반으로 오는 모임인데 혼자 가기 싫은지 핸드폰을 뚫어지라 보다가 아이들을 부른다.
“우리 내일 같이 놀러 가서 고기 먹을래?”
약속이 있다던 아이들은 취소가 되었다며 좋다고 했다. 아침 일찍 짐을 싸면서 아이 둘을 한 번에. 사실 지금은 아이들이 다 커서 손이 안 가긴 하는데 그런데도 ‘밥을 안 챙겨도 되는 날이 온 건가?’란 생각에 고개를 빼 곰이 내밀었다.
다음날, 남편이 아이 둘을 데리고 나가는 아침이라니. 결혼하고 살면서 아이 둘 한 번에 데려가서 반나절 이상 놀다 온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 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쿵쾅거려 버선발로 현관 마중까지 나왔다.
“저녁때 올게. 푹 쉬고 있어!”
세상에나. 이런 남편이 있었다니.
전에 시들하고 갈라졌던 가슴은 어디 가고 건조한 마음에 수분기가 차올랐다.
혼자 있는 적막한 집에 오랜만에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 결혼 왜 했냐”는 한탄에서 “이런 남자가 어딨 나. 결혼 잘했네”로 급히 노선변경을 한 중년 주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자꾸만 번져나갔다.
나는 혼자만의 휴식이 필요했었나 보다. 집이 쉬는 곳이라고 하지만 온 가족 쉼을 위한 공간을 준비하는 것도 나의 몫이어서 온전히 그 휴식을 만끽하지 못했다.
동글동글 먼지가 굴러다니고 켜켜이 쌓인 빨래가 가득한 어지러운 거실이지만 지금이 시각이야말로 진정한 쉼이다. 몇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까 콩닥거리는 가슴을 애써 쓰다듬으며 메모지를 꺼내서 시간표를 짰다. 어영부영 보내면 후회할 것 같아서 내게 주어진 반나절의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싶다. 방학 계획표를 짜는 진지한 아이처럼 한 글자씩 또박또박 적어나갔다.
모두가 함께 있어 신경을 곤두세우며 해야 하는 일이 아닌, 오늘은 오롯이 내 일을 집중해서 해나갈 수 있다. 음식물 쓰레기를 치우고 가족들의 침실을 정리하고 옷가지를 정돈하는 시간.
사랑이 식어버린 줄 알았는데 내 마음의 여유가 사라졌었나 보다.
포근해진 마음 가운데 사랑과 배려가 지나갔다.
해야 할 일들을 마치고 차 한 잔을 하면서 창밖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에 눈을 감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커피 향에 달콤함이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