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와 청년기의 사이
늦잠을 부르는 주말 아침에 오두방정스럽게 준비해서 나가는 큰 아이다.
오늘 10시에 수학학원보강이 있다고 뛰어나가는 아이를 보며 나도 잠이 안 깬 얼굴로
멍하게 보는데 잠시 후에 전화벨이 울린다.
수학선생님 “어머니, 제가 수업 때 너희 이거 잘 안 하면 일요일 오전에 부를 수도 있다고 얘기했는데 준이가 헷갈렸는지 수업에 왔네요? 그리고 어머니 2월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3월에는 교재도 한 권씩 빠뜨리고
오는 날이 있고요. 숙제도 이 부분인데 다른 곳을 하는 때도 있어서요...”
"네" 하고 끊는데 제대로 수업을 못 들었다는 말이 떠오르면서 부글부글 화가 차오른다.
아침운동을 하고 온 남편에게 아이얘기를 하니 자기가 얘기해 보겠다고
아이방으로 함께 들어갔다.
40분쯤 지났을까. 남편이 나보다 더 씩씩거리는 얼굴로 나온다.
“아무것도 해주지 마라. 자신이 뭐를 잘못했는지도 잘 모르는데 뭘 이렇게 다 해줘?
핸드폰도 압수고 학원이며 수영이며 다 하지 마. 넌 이제 밥만 먹고 학교 집만 다녀!”
초등 마지막 곧 중학교를 앞둔 아이는 요즘에 무슨 말만 하면 따박따박 말댓구에 조금씩 눈에
힘이 들어가 있다.
예전에는 말 잘 듣는 아이였어서 이런 상황이 받아들이기가 좀 힘들다.
아이의 대책 없는 말댓구도 싫고,
남편의 그 욱하는 말도 싫고,
정말 학원을 다 끊어버리면 어떡하나란 생각에 멈칫하며, 남편에게 모든 생활비를 의지하고 사는 내가
그 순간 또 싫었다.
아이 둘을 이만큼 키우기까지 나도 참 힘들었다.
아이 두 명 키우는 게 무슨 유세냐고 하겠지만, 결혼과 육아에 기꺼이 희생을 할 준비되지 않았던 나는 아이들이 커갈 때마다 늘 많이 버겁고 지쳤었다.
결혼생활과 육아를 하면서 기브 앤 테이크를 생각하면 힘들다.
내가 이만큼은 했으니 너도 이 정도는 좀 해야 하지 않아?
내가 한만큼 받고 싶은 그 마음.
어느 정도 혼자서 잘할 수 있는 아이로 잘 키워야 지란 생각을 하면서도
너도 네가 하는 건 최소한 좀 열심히 해야지 하는 아이의 치열한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 말이다.
아이가 나의 이런 나의 노력과 희생을 헤아려줬으면 하는 마음한구석에는
‘내가 이만큼 고생했으니 너도 이만큼은 해야지.’하는
내가 한만큼 받고 싶은 기브 앤 테이크마음이 아니었을까.
많이 갖춰진 환경인 우리 아이들의 세대는 나와 남편의 세대의 절실함과 간절함과는 차이가 있다.
어떤 간절함이 생기기전에 내가 그 부분을 미리 하나씩 채운 것도 있었으리라.
엄마 때는 안 그랬어! 하면 “엄마. 요즘은 다 그렇게 안 해요. 이만큼만 해도 되지요.
다들 이 정도는 하던데요.”
존댓말 속에 따박따박 안 지고 얘기하는 아이가 요즘은 참 밉다.
나는 아이를 보낼 준비가 되어있는가?
이제 6년이 지나면 큰아이는 성인이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들을 생각하면 6년이 먼 얘기는 아니다.
혼자서 독립해서 살게끔 해줘야 하고 그런 것들을 먼발치에서 봐줘야 하는 게 부모의 몫이라면
난 그 몫을 하고 있는 사람인건지...
아이의 독립을 위해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것들을 빠지지 않고 챙기겠다고 다짐하지만 정작
나는 내가 나로서 헌신했던 것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그 환경에서 희생한 나의 엄마가 있었다.
아빠가 일찍 돌아가셔서 상황이 안 좋았었고 그런 상황에서도 자매들 모두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
엄마도 잘 풀리지않는 우리집 상황이 속상했을 거다.
중년이 되어서야 매일 고된 하루에 힘들고 버거웠을 그때의 나의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그때의 나도 지금의 큰아이처럼 부모에게 받는 건 당연하며, 큰소리 뻥뻥 치면서
내 주장을 펼치고 있었는데 말이다.
특히나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내가 희생한 걸 받지 않는다는 기버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나도 내 부모에게 받은 만큼 돌려주는 기브 앤 테이크를 못했으면서 내가 내 아이에게
나만큼의 헌신을 받고 싶은 마음은 욕심이 아닐까 싶다.
저녁시간이 되자 남편은 아이에게 “너 제대로 할 거야? 할 거면 다시 열심히 하고,
각자 위치에서 열심히 하자. 다시 이런 일 있으면 그때도 아빠는 안 참아!”란 결말이 뻔한 얘기를 꺼낸다.
“네! 당연하죠.” 해맑게 웃는 아이에 온 가족이 피식 웃으며 식사를 한다.
아이가 더 커가면서 우리에겐 또 똑같은 일이 반복되겠지.
사춘기 그 어느 지점을 지나는 아이에게 어른의 마음을 이해하고 납득하길 바라는 마음은
나의 큰 욕심이라는 걸 깨닫는다.
언젠가 내 품을 떠날 아이.
내 곁을 떠나서 다른 생활을 꾸릴 아이.
그렇게 많은 시간들이 지나고 내 품을 떠났을 때, “엄마가 그때 그렀겠구나!”라고
내 마음을 어렴풋이 조금은 헤아려줄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지금의 나처럼.
오늘은 엄마가 참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