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서 눈이 떠졌다. 남편은 일찍 출근했고 아이들은 주말인데 어디 안 가냐며 나를 흔들며 깨웠다.
물놀이 가고 싶다는 요구에 주섬주섬 아이들 짐을 챙겨 집 근처 워터파크로 향했다.
보호자 혼자 덩그러니 가는 건 싫어서 친구 엄마에게 함께 가자고 연락했다. 친구는 오후에 합류하기로 하고 나는 먼저 아이들과 출발했다.
물놀이 마지막 날이라서 워터파크 안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빈자리를 찾으며 주변을 계속 돌아보고 있었다.
“어머 연아 엄마! 여기서 보네요? ”
“안녕하세요.”
“아니 근데 애들 데리고 혼자 오신 거예요?”
“아…. 아니요. 혼자 아니고 연아친구도 같이 오기로 해서요.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상대의 물음에 마치 변명을 하듯이 혼자가 아님을 강조했다. ‘혼자’라는 말에서 의식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단독으로 있는 상태에 대한 불편함을 늘 갖고 있었다.
어렸을 적 부모님은 일하러 가시고 나 혼자 있곤 했다. 언니들은 모두 등교하고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던 나는 혼자 집에서 덩그러니 있는 날이 허다했다. 놀이터에서 언니들의 하교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가족들이 빨리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랬던 어린 나에게는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엄마가 출근하러 갈 때면 혼자 있는 게 너무 싫어서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곤 했었다. 엄마의 회사에서도 기다리면서 혼자인 시간이 있었지만, 같은 공간에서 혼자인 것과 오롯이 나 혼자서의 시간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혼자라는 말이 불편한 건 어쩌면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않고 단독인 상태인 쓸쓸한 기다림이 너무 두려워서가 아니었을까.
어렴풋한 유년 시절 가족 누구도 없는 적막함이 깃든 긴 하루가 나에겐 늘 버거운 숙제였다.
최근에는 주말에 직업 인문학 수업을 아이와 듣고 있다. 웹툰 작가란 직업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작가분이 본인 작업을 보여주시고 각자 그림을 그려보는 시간을 가졌다. 웹툰 작가분은 아이 그림을 빤히 쳐다봤다.
“그린 캐릭터가 너무 재밌게 표현했어요. 아이가 나중에 이 일을 하겠다고 하면 어머님은 뭐라고 하실 건가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나는 골똘히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아…. 글쎄요…. 이렇게 어려운 일을 아이가 할 수 있을지를 볼 것 같아요. 작가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아무나 할 수 있지 않다는 말을 한참을 얼버무렸다. 어쩌면 그 말은 혼자 있는 그 힘겨운 시간을 견디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일지도 모른다.
오롯이 혼자서 해내야 하는 고독한 작가의 길을 걷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엄마를 보며 자라는 둘째 아이는 장래희망 중에 ‘작가’가 있다.
유년 시절의 막무가내 기다림처럼, 언젠가 내 그림이 인정받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버티는 막연한 시간을 아이에게 내가 먼저 권하고 싶지 않았다.
늘 혼자인 시간의 외로움이 두려웠다.
그렇게 적막함의 터널이 시작될 때면,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시간들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묵직한 침잠속의 고독을 즐기기 힘들었다. 아무도 없다는 불안함에 억눌려 지내야 했던 안쓰러운 내가 있다.
그렇게 어른이 된 나는 늘 바쁘게 스케줄을 짜곤 했다. 그때의 분주한 약속을 잡고, 타인을 통해 허기진 마음을 달래고 있던 젊은 날의 나를 안아주고 싶다.
이제는 괜찮다고 기다림에서 오는 암흑 같은 고독이 너만의 외로움이 아니었음을 뜨겁게 위로해주고 싶다.
혼자여도 묵묵히 너의 곁에서 응원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말이다.
누군가와 함께하지 않는 시간을 늘 외로워했던 내 모습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혼자라는 기억이 나에게는 서글픈 기다림의 연속이었기 때문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