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웃음의 본질에 관해서
나는 남을 웃기는 재주를 타고나지는 않았다. 그런데 가끔, 나의 액션에 상대방이 웃을 때가 있는데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상황이 있다.
첫째, 상대방이 가족이나 친구처럼 내가 잘 아는 대상일 때 종종 나는 그들을 웃긴다. 웃기고자 노력했다기보다는 너무나 속속들이 잘 알기에, 자연스럽게 그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아낸다. 웃기는 재주는 없지만, 유일하게 자신 있는 대목이다. 둘째, 처음 본 낯선 상대와 있을 때. 더욱이 상대방이 말이 없는 경우에 외향적인 성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한다. 셋째, 웃기려는 의도가 없었는데 상대방이 웃을 때가 있다. 무의식중 나의 시니컬한 태도가 피식, 웃음을 자아내는 것 같다. ‘Cynical’을 번역하면 ‘냉소적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냉소(冷笑) ’는 다시 ‘찰 냉’, ‘웃음 소’를 의미한다.
이처럼 누군가를 웃길 때는, 상대방의 리액션을 동반한다. 상대방이 웃어주어야 ‘웃음’의 본질이 완성된다. 문제는 그 상대방이 ‘불특정 다수’라는 점이다.
누군가를 웃겨야 하는 코미디 영화나 예능, 개그 콘텐츠를 볼 때 사람들이 박장대소하는 지점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을 때이다. 액션을 취했는데, 돌아오는 리액션이 예상치 못하면 사람들은 웃는다. 뻔하지 않은 새로움! 둘째는 극사실주의 재현으로, ‘어, 저거 내 이야기인데?’이다 싶으면 공감의 실소를 터뜨린다. 이 외도 다양한 지점이 있겠지마는, 두 가지 모두의 공통점은 ‘웃음’에는 ‘대상’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소재로 사용되거나 듣는 사람을 의미하는 이 ‘대상’ 역시도 ‘불특정 다수’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누군가는 웃어도, 웃지 않는 아니 웃지 못하는 사람도 섞여 있기 마련이다. 가령, 한때 주현영이 연기하는 ‘주기자’ 캐릭터가 떴을 때, 마음 편히 웃지 못하는 사회초년생도 존재했을 것이다.
물론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여 마주했을 때의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 때문일 수도 있고, 너무 가까운 시기의 일이라 당시 상황에 따르는 심리적 고통이 재발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기자 캐릭터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이유에는, 그 시기를 많이 지난 대다수 사람들이 이제는 추억이라 곱씹으며 하하호호 웃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웃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개 소수이고 약자이다. 인종, 장애인, 외모 등 관련한 희화화가 늘 문제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때로는 ‘웃자는 예능에 죽자고 덤벼드나?’라는 댓글을 심심찮게 발견하는데, 이들은 불편을 제기하는 이에게 ‘프로 불편러’라며 서슴없이 불쾌함을 내비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웃자는 일에 왜 죽자고 덤벼드냐고? 그렇지 않으면 변하지 않으니까.
그냥 웃기는 정도를 떠나서, ‘웃어넘기는 태도’는 때때로 사회의 다양하고도 첨예한 문제들을 흐지부지하게 만든다. 그래서 ‘대상’이 되는 이들은 날을 세울수밖에 없다. 더욱이 집단주의 사회 내에서 기득권자들은, ‘웃어 넘기는 태도’를 이용해 약자에게 혐오가 되는 문제들을 웃음으로 퉁쳐버렸기 때문에, 웃자고 하는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는 경직되고, 갈등은 두터워지고. 우리는 서로에게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그러면 모두를 건강하게 웃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최근 유명한 개그 유튜브 채널 <장삐쭈>, <피식대학>, <숏박스>, <빵송국> 등을 키운 ‘한국 최초 코미디 레이블’인 <메타 코미디> 정영준 대표의 말을 잠깐 인용해보면, 코미디란 ‘양날의 검’이라고 한다.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자신의 손이 다치고, 맥락을 조금만 놓쳐도 엉뚱한 곳을 찔러 엄한 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실패한 농담은 때때로 파국을 빚기도 하는데,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사회자 크리스 록이 배우 윌 스미스에게 ‘실시간 폭행’을 당한 장면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불편하지 않은 코미디를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정 대표는 이야기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웃기기 위해 그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웃음과 불편함의 경계를 찾아 나선다고 한다.
다시 한번 위의 질문을 복기해보자. 과연 모두를 위한 코미디는 존재하는가?
어렵겠지만, 그래서 우리는 '본질'에 다가서야 한다.
웃기는 재주는 없지만, 웃기는 재주가 없기에 (그만큼 웃기가 어려운 상황이니까) 나의 액션에 웃었던 (서두에 언급했던) 세 가지 상황에서 어쩌면, ‘웃음’의 본질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첫째, 나는 내가 잘 아는 대상은 잘 웃길 수 있다. 이 말인즉슨,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웃게 해줌으로써 행복함을 느낀다. ‘웃음’의 본질 중,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만큼 그 기초가 되는 건 없다.
둘째, 어색한 사람과의 대화를 이어 나갈 때, 약간의 유머는 관계에 있어서 윤활유 역할을 해준다. 누군가의 ‘웃음’을 끌어내는 일은 사회생활에 있어서 꽤 중요한 요소이다. 혹은 아주 심각한 상황이나, 해결 못할 갈등 상황에서 ‘웃음’은 중재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웃음’은 ‘위트’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동물은 흔히 싸움의 형태의 놀이를 즐기는데, 놀이가 자칫 싸움으로 비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웃음’이 진화했다고 한다.
셋째, 냉소는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인 태도나 관점으로 접근했을 때 나올 수 있는 웃음이다. 절망적인 상황도 멀리서 보면 ‘그렇게 심각한 거 아니었네’라며 냉소로 응수함으로써, 심적으로 매우 안도감을 취할 수 있다. 가까이서 보면 너무 감정적이어서 비극으로 치닫을 수 있지만, 멀리서 보면 ‘별거 아니네’라고 안도의 웃음을 취할 수 있는 것. 이 또한 ‘웃음’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종합해보면, ‘웃음’은 나의 행복을 위한 사회적인 행동이다. 즉, 사회적 동물이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웃음’은 빼놓을 수 없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갈수록 세상에 웃음이 적어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웃어야 하는 혹은 함께 웃어야 하는 대상, 그 ‘불특정한 다수’가 전세계적 단위로 넓어지면서, 우리는 점점 마음 편히 웃기가 어렵다. 다양한 관점과 다양한 개인을 염두해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남을 웃기는 것을 업으로 삼은 개그맨, 코미디언들도 이런 점에 어려움을 분명 느낄 것 같다. 그나마 보편적인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연애, 군대, 과거(추억팔이) 등을 소재로 한 공감개그 등이 요즘 트렌드인 것을 보면 그 세태를 반영한 듯 하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하지 않을 수 있는 소재, 이런 소재로 한 개그들이 최근에 흥행을 많이 한다.
하지만 ‘불편함’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끔 화두를 던질 때에도, ‘웃음’이 필요하다. 필자 지론으로는 민감한 문제도, ‘웃음’을 제대로 활용하면 강력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웃음’이 돌려 말하는 ‘수단’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직설적으로 무언가 말할 때 갖춰야 할 ‘기초(베이스)’이다. 문제 제기 있어서, 웃음과 함께 자연스럽게 곁들인 메세지는 진한 여운을 남긴다. 웃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웃고 생각할 여지를 남기는 것. ‘웃음’이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코미디’라는 장르가 그런 역할까지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풍자, 해학, 블랙코미디의 존재감이 여실히 드러나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발 뻗고 마음 편히 웃었으면 좋겠다. ‘내가 웃는 게 맞나?’ 자기 검열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때로는 무해하고 본능적인 웃음이 삶의 중요한 원동력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TV 앞에 앉아 코미디 프로그램을 가족과 함께 보며, 비슷한 지점에서 함께 웃을 때 우리는 살아있음을 느끼지 않나. 각자의 방에서 각자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불편한 것도 적당히 인내하며 함께 웃는 것도 필요하다. 웃고 끝나지 않으려면, 우리는 ‘웃음’이 사회적 행위라는 것을 필히 기억해야만 한다.
참고
한국일보, <피식대학·숏박스 키운 ‘코미디 불도저’, 940만 명을 웃기다>, 2022.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