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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꼼지 Oct 11. 2022

참아야 할 때와 참지 말아야 할 때

  두번째 회사 출근하던 첫날, 엘리베이터 앞에서 가수 김종민을 보았다. 출근길에 연예인을 만나자 정말 방송국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게 방송국에 출근하는 맛이구나! 드디어 제대로 된 직장을 찾 것 같았다.


  이전 회사에서는 들어본 적조차 없었던 인수인계도 했다. 전임자에게 들어보니 구인공고에 올라온 모든 내용이 사실이었다. 정말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9 to 6로 일하면 됐고, 정말로 주급이 30만원이었고, 정말로 식대가 제공되었다.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팀 카드로 결제하면 되는데, 심지어 밥이 아주 맛있다고 했다. 밥값도 안주는 회사에서 60만원 남짓 받으며 노동력을 갈취당했던 나는 고작 월급 120만원에 식대제공만으로도 눈이 뒤집혔다. 뭐든지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알아둬야 할 건 없는지 주의사항을 묻는 내게 전임자가 말했다.

  "일은 크게 힘들지 않아요. PD님조심하면."


  그러고보니 PD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면접은 메인작가와 봤고, 인수인계를 하던 날에도 PD는 없었다. 인수인계를 마치고 메인작가와 조연출, 그리고 나의 전임자인 구 막내작가와 함께 밥을 먹으러 갔다. PD의 어떤 점을 조심해야 하는지 궁금했으나 차마 물어볼 수 없었던 나는 묵묵히 밥만 먹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메인작가가 구 막내작가를 향해 "네가 고생만 하다 간다."고 했다. 그녀는 본인의 고생에 대해 부정하지 않겠다는 듯 웃었다.

  "네가 대본으로 맞은 게 공개방송 때였나?"

  "네."

  "그 때 대본 왜 던진거지?"

  "대본을 A4용지에 출력해서 글씨 잘 안 보인다고요."

  대본을 A4용지에 출력했다는 이유로 맞았다고? 그러면 대본을 어디에 출력해야 하는 거지? 의문을 해결할 틈도 없이 식사자리가 끝났다. 사를 하고 떠나는 구 막내작가의 얼굴이 몹시 개운해보였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사람이 메인작가에게 인사하며 눈짓으로 내가 누군지 물었다. 메인작가가 "이번에 새로 온 우리 막내."라고 하자 상대가 "A씨는 관뒀어요?"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나를 보며 "고생하시겠네."하는데, 그 눈빛에 뭔가 애잔함이 묻어있었다.

  "A씨가 얼마나 있었죠?"

  "두 달 있었지."

  "또 두 달이구나."

  그렇게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불안해졌다.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방송작가 구인사이트에 들어갔다. 내가 새로 일하게 된 프로그램의 제목을 치자 그동안 이 프로그램에서 올렸던 구인글이 주르륵 떴다. 두세달 간격으로 막내작가를 구하는 글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말인즉슨, 두세달 간격으로 막내작가들이 나갔다는 거다. 그들이 나간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테지만, 내게 그 이유를 말해줄 사람은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이유를 알게 되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 팀 PD는 시도때도 없이 화를 다. 지금의 나라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의 문제에 대해 '분노조절장애'라고 명명할테지만 그 때는 몰랐다. 그냥 '오늘은 PD가 또 얼마나 화를 낼까?' 두려울 뿐이었다. 그는 화가 나면 물건을 던졌다. 원고를 던지는 건 예사였고, 촬영 테이프나 볼펜처럼 누군가 맞으면 다칠 수 있는 물건도 던졌다. 물론, 그가 내던진 물건을 주워야하는 건 그 물건을 맞은 사람들이었다. PD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뭔가를 던지기 시작하면 우리 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옆팀, 그 옆팀 사람들까지 조용해졌다. 그가 허공을 향해 욕을 지껄이며 담배나 한대 태우겠다고 사무실을 떠나기전까지는 다들 숨조차 편히 쉴 수 없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하는 마음으로 그의 비위를 맞춰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는 퇴근시간이 지난 후까지 일을 하던 나에게 "멍청한 것들이 저렇게 야근이나 하지."라고 조롱하며 퇴근했다. 그래서 다음날 6시에 딱 맞춰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일은 할 줄도 모르는 게 퇴근 시간만 따박따박 챙기는구나."라고 했다. 그럴 때 하소연하는 마음으로 메인작가를 보면 그는 그냥 눈을 질끈 감으며 참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사실, 참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그가 화를 내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PD와 가장 많은 시간을 붙어있어야 하는 조연출은 그만큼 그의 화를 가장 많이 받아내야 했다. 메인작가에게는 함부로 뭘 던지거나 하지는 못했지만 원고로 트집을 엄청 잡았다. 팀에서 가장 어리고 경험이 없는 나는 뭐랄까... 그의 모욕과 분노를 받아내는 인간 재떨이가 된 느낌이었다. 우리는 PD가 없을 때 서로를 위로하며 상처받은 마음을 달랬다. 메인작가는 나와 조연출을 달래기 위해 원고료의 절반을 쓰는 것 같았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주 5일동안 9시부터 6시까지 지옥을 견디는 대가로 일주일에 30만원이 입금됐다. 방송국 밥은 듣던대로 맛있었지만 욕설과 물건이 동시에 날아다니는 사무실에 앉아있다보면 소화가 되지 않았다. 밥 대신 구내식당 디저트 코너에 놓인 숭늉으로 점심을 때우는 날이 많아졌다. PD가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면 자료를 찾아오겠다며 자료실로 도망쳤다. 그렇게 방송국을 가는 길에 눈이 번쩍 뜨이게 잘 생긴 남자배우를 봐도 더 이상 기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PD가 나를 부르더니 원고를 써오라고 했다. 원래 나의 업무는 자료조사를 비롯한 잡무이고, 원고를 쓰는 것은 메인작가의 일인데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보통의 PD가 그런 말을 했다면 '이제 나에게 원고 쓸 기회를 주려는건가?'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의도를 알 수 없었으므로 일단 최선을 다해 원고를 썼다. PD에게 가기 전에 메인작가에게 몰래 검토도 받았다. "왜 저한테 원고를 써오라는 걸까요...?"라고 물었으나 메인작가도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PD는 내가 써간 원고를 읽어보더니 다시 써오라고 했다. 다시 써갔으나 이번에도 다시 써오라고 했다. 그렇게 원고를 쓰고 퇴짜맞는 일의 무한반복이 시작되었다. 그 일이  번쯤 반복되었을 때 용기를 내서 어딜 고쳐야 하느냐 물었다. 내 말을 못 들은 건지, 일부러 무시한 건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6시면 사무실을 나가던 사람이 작정한듯 앉아서 똥개훈련을 시키는데 미칠 것 같았다. 어떻게든 통과하기 위해 오타가 있는지 눈에 불을 켜고 뒤졌고, 행간과 폰트와 자간을 다 조절했고, 글의 구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뒤집어 엎지만 소용없었다. 그렇게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도 퇴짜를 일곱 번쯤 맞았을 때,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저녁도 먹지 못한 채 9시가 지나있었다. 문득 엄마가 떠올랐다. 아, 엄마한테 늦는다고 전화했어야 는데. 눈물을 닦으며 화장실로 향했다. 그저 엄마한테 늦는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새 내 입에서는 "엄마, 나 이 회사 못 다니겠어..."라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우는 소리를 잘 하지 않는 딸이 대성통곡을 하자 엄마가 그렇게 힘들면 그만 두는 것도 괜찮다며 위로를 해주었다. 하지만 첫번째 회사만큼 간단하게 관둘 수가 없었다. 첫 번째 회사에 이어 두 번째 회사조차 두 달만에 관둔다는 건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다들 이 정도의 고난은 잘 견뎌내는데 내가 너무 나약한 인간이라 견디지 못 하는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기 때문이다. 관두고 나서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화장실에 서 있는데 메인작가에서 전화가 왔다. "안 들어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장 들어가서 PD의 얼굴에 원고를 던지고 때려칠 게 아니라면 일단 원고부터 해결해야 했다. 퉁퉁 부은 눈을 찬물로 닦고 돌아가 다시 원고를 수정했다. 그 날, PD의 입에서 "가봐."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나는 원고를 열 번 수정해야했다. 열 개의 원고가 퇴짜를 맞은 이유가 무엇인지 몰랐던 것처럼 열 한번째의 원고가 통과된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나의 원고가 좋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PD가 집에 가고 싶었다거나, 아니면 나를 괴롭히는 게 지루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 밤을 보내며 결심했다. 이 팀에서 나가야겠다. 인생을 살면서 참아야 할 때와 아닐 때가 있다면 지금은 참지 말아야 할 때였다. 미친 개가 짖어대는 곳에서 계속 버티다가는 나도 미쳐버릴 것 같았다. 대신 이번에는 옮길 곳을 신중히 고르기로 했다. 생계조차 유지할 수 없었던 첫번째 회사에서 탈출하기 위해 너무 성급히 팀을 옮긴 대가가 이거였으니까. 직접 들어가서 일해보지 않으면 팀의 속사정 같은 건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너무 자주 사람을 구하는 곳은 거르기로 했다.


  그런데 방송작가 구인게시판을 아무리 뒤져도 옮길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가고 싶은 프로그램에서는 사람을 구하지 않았고, 게시판에 올라오는 구인글에서는 거를 게 너무 많았다. 여기는 사람 또 구하네, 저번에 구한 작가가 벌써 나갔나? 여기는 또 80만원이구나. 네 달의 사회생활을 통해 생긴 안목 덕분에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갈 곳이 없는 상태로 뛰쳐나갈 수가 없어 꾸역꾸역 버티고 있던 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OO> 담당 PD입니다. 저희 팀에서 막내작가를 구하고 있는데 혹시 일하실 수 있으신가요?"

  <OO>은 내가 1년 전에 면접을 보았던, 그토록 가고 싶어하던 꿈의 프로그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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