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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꼼지 Oct 17. 2022

좌충우돌 백수 탈출기

  백수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뭘까. 물론 1순위는 일자리겠지만, 일자리를 구하기 전까지 백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매일 규칙적으로 나갈 수 있는 곳이다. 그렇게 억지로라도 리듬을 만들어줘야 생활이 무너지지 않는다. 특히 가족과 함께 사는 백수라면 하루 몇 시간이라도 가족과 떨어져있을 수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든가, 뭐라도 배우러 나가든가, 아니면 강아지 산책이라도 길게 시켜야 한다. 그게 백수와 백수를 지켜보는 가족 모두에게 좋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달쯤 백수로 지낼 때, 팔자좋게 영화를 보고 들어왔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대차게 혼난 경험이 있는 나는 백수생활을 시작하자마자 바로 어학원 수업부터 등록했다. 그것도 한 시간이나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하는 종로에 있는 어학원에. 매일 아침 한 시간동안 지하철을 타고 종로까지 가서 영어수업 한 시간, 일본어 수업 한 시간을 듣고 또 다시 한 시간을 지하철을 타고 돌아왔다. 지하철에 들이는 시간과 비용은 백수인 나와 백수 딸에게 밥을 해줘야하는 엄마의 정신건강을 지키기 위해 지불한 것이었다.


  오전에는 외국어를 배우며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는 취업사이트를 뒤졌다. 다른 친구들이 취업준비를 할 때, 혼자 방송아카데미를 다니며 방송 모니터링에 열을 올렸던 나는 일반 기업의 취업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요즘의 똘똘한 대학생들은 취업을 위해 스터디도 하고, 여기저기서 정보도 많이 얻는 것 같지만 뭘 잘 몰랐던 나는 오로지 취업준비 카페의 정보에 의존하며 혼자 취업을 준비했다.


  그렇게 준비하는 동안 알게 된 건 대부분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기업에서 가장 선호하는 인문 계열의 전공은 경영학이며 나의 두 가지 전공(신문방송학과 국문학)은 취업에 불리한 전공이라는 것. 나의 전공이 그나마 연관되어 있는 것은 홍보팀이나 기획팀인데 그런 팀에서는 신입을 잘 뽑지 않으며 뽑는다해도 한두 명이라는 것. 방송국을 끼적끼적 다니다가 만 나의 경력은 경력으로 치기도 어려우며, 일반 기업의 취직에 그닥 도움이 되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당시의 내가 따로 원하는 직무나 회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방송국에서 최저시급이 될까말까한 돈을 받으며 하루에 열여섯시간씩 일하던 나는 그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9시에 출근해서 6시쯤 퇴근하고, 돈을 한 이백만원 넘게 주는 회사면 다 좋았다.


  여름이 지나자 많은 회사들이 신입사원을 뽑기 시작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이름을 들어본 것 같은 회사면 무조건 지원했다. 애매한 전공과 애매한 경력을 만회하기 위해 자기소개서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담당자들이 자기소개서를 잘 읽어준 건지, 아니면 운이 좋아서인지 서류전형 합격률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문제는 면접이었다. 스터디 한번 제대로 해보지 않은 나는 면접에 대한 준비가 거의 되어있지 않았다.


  면접 전날, 거울을 보며 자기소개 한번 해 보고 들어간 첫 면접은 그야말로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초행길에 지하철과 버스의 환승이 꼬이면서 면접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던 것부터 문제였다. 지각할까봐 안달복달하며 갔더니 예민하기 짝이 없는 나의 장이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꾸륵거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지각은 면했으나 배에서 난리가 났다. 면접대기실에서 내 순서가 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화장실을 계속 들락거렸다. 그렇게 배탈 때문에 정신이 쏙 빠진채로 면접장에 들어갔더니 연습했던 자기소개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같이 들어간 다른 지원자들의 세련된 자기소개를 들으며 망했다는 걸 직감했다. 세상 한심한 자기소개를 끝으로 면접관들은 나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첫 면접을 망치고 나오며 위기감이 밀려왔다. 이렇게 안일하게 취업을 준비하다가는 영원히 백수로 살게 될 것 같았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친구의 친구와 함께 취업스터디를 시작했다. 카페에서 만나 자기소개를 연습하고, 면접 기출문제라고 떠돌아다니는 내용을 뽑아 대답하는 연습도 했다. 지원한 회사의 인재상에 맞춰 나의 정체성을 바꿔가며 자기소개를 준비할 때마다 현타가 밀려왔다.

  "여기는 글로벌인재를 뽑는다는데? 너 글로벌인재야?"

  "몰라. 영어랑 일본어랑 두 개 다 공부하고 있으니까 글로벌인재라고 하면 안 되냐?"


  수없이 많이 지원하고, 그만큼 많이 떨어졌다.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불합격자에게 연락을 주지 않으므로 떨어진 줄도 모르고 있다가 취업준비 카페에서 "저 합격했어요!"라는 글을 보고 나서야 내가 떨어졌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불합격을 반복하는 동안, 자존감과 통장 잔고가 동반하락했다. 방송국에서 한달에 백만원 남짓 받으며 모았던 돈은 진즉에 다 떨어졌고, 동네 중학생들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걸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아이들을 가르쳐서 받은 돈으로 정장을 사 입고 제발 나를 뽑아달라며 이 회사 저 회사를 돌아다녔다. 얇은 여름정장을 겨울정장으로 바꿔입을 때쯤, 나에게는 두 회사의 최종면접이 남아있었다.


  하나는 이름만 대면 모두 알만한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홍보팀이었고, 하나는 대기업이긴 하지만 이름을 대면 "그게 뭐하는 회사지?"할 것 같은 IT회사의 기획팀이었다. 방송국을 얼쩡거리며 살았던 나는 당연히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홍보팀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면접을 준비했다. 초급일본어밖에 못 하는 주제에 자기소개를 한국어, 영어, 일어 세 가지 버전으로 준비했고, 방송국에 다니며 경험했던 것들을 최대한 화려하게 포장해 달달 외웠다. 하지만 너무 간절했던 마음이 독이 된 걸까. 최종면접에서 나는 타들어가는 목을 가다듬기 위해 물을 한모금 마시다가 옷에 물을 엎지르고, 그걸 수습하다가 정신을 놓고, 결국 횡설수설하며 면접을 망치고 말았다.


  어떻게 울지 않고 면접장을 나왔는지 모르겠다. 내년 상반기 공채를 준비해야 하나, 아니면 동네 학원에라도 취직을 해야 하나. 심란한 마음으로 걷고 있는데 발목이 삐끗하며 구두굽이 부러지고 말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부러진 구두굽이 나의 어두운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가까이 있는 구둣방에 가서 구두를 수선하는 동안 충동적으로 친구들에게 술 마시자고 연락을 돌렸다. 그리고 면접용 정장을 입은 채 신촌에 가서 밤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다음날 IT회사의 최종면접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집에 가서 그 면접을 준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될대로 되라 싶었다.


  그렇게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간 면접장에 사장이 들어왔다. 면접에서 사장을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사장은 그동안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나의 방송경력에 관심을 보였다.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면접을 보기 위해 준비했던 내용들을 그 면접에서 다 써먹었다. 별 기대를 하지 않아서인지 긴장이 되지 않아 말이 술술 나왔다.


  며칠 후, 최종합격을 축하한다는 연락이 왔다. IT회사였다. 아무 기대도 하지 않고 갔던 회사였는데 최종합격을 했다는 걸 알자 생각보다 많이 기뻤다. 그 회사에서 날 뽑아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백수인 상태로 새해를 맞이해야 하는 운명이었다. 회사에서 보낸 커다란 꽃바구니가 집으로 배달되었다. 합격 소식을 알렸을 때 "거기가 뭐하는 데야?"하던 가족들이 성대한 꽃바구니를 보고는 뭔가 좋은 회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한달 후부터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된다고 했다. 나는 통장에 있던 돈을 탈탈 털어 친구와 일본여행을 떠났다. 더이상 백수가 아니라 예비신입사원이었으므로 날아갈듯한 기분으로 여행을 다녔다. 여행에서 돌아와 며칠 후, 신입사원 합숙 오리엔테이션에 들어갔다. 3주동안 입을 옷과 준비물을 캐리어에 챙겨 집을 떠나며 오랜만에 마음이 설렜다. 모든 게 실패해 선택하게 된 곳이지만, 어쩌면 예상하지 못 했던 곳에서의 새 출발도 괜찮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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