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꼼지 Oct 14. 2022

당신은 브레이크와 엑셀을 동시에 밟고 있습니다.

  5주. 날짜로 환산하면 35일이라는 기간이 한 사람을 평가하기에 충분한 시간일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팀 PD는 5주동안 함께 일하며 나를 방송과 안 맞는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방송일을 하고 싶다며 무작정 찾아왔던 순진한 대학생을 잊지 않고 1년 후에 다시 불러준 바로 그 PD가 말이다.


  이 일을 하지 말라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놀란 내가 얼른 대답을 못 하자, PD가 덧붙였다. 메인작가도 같은 생각이야. 이별을 통보하는 남친을 붙잡을 때처럼 PD에게 말했다. "제가 앞으로 잘할게요..."

  PD는 잘 하라는 말도, 관두라는 말도 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서운한 마음이 솟구쳤다. 일을 잘하지 못한건 사실이지만 처음인데 헤매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하지만 회사는 학교가 아니었다. 나는 일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나를 부적격자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만두라는 말이 진심일까? 아니면 앞으로 일을 잘하라는 충격요법인걸까? 후자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전자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기가 생겼다. 첫번째 회사와 두번째 회사를 아무런 미련없이 그만뒀던 나인데, 이번 회사만큼은 그렇게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만 두더라도 내가 그렇게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보인 후에 그만두고 싶었다.


  일주일의 휴가 후,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출근했다. 그리고 지난 실수들을 만회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그 전에는 중구난방으로 처리하던 일들을 모두 문서화해서 매일 아침 업데이트했다. 취재는 어디까지 됐는지, 섭외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그날의 촬영일정은 무엇인지, 무엇을 진행해야 하고 해결해야 할 사항은 무엇인지 정리해서 메인작가와 PD가 출근하기 전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일을 체계화하자 내가 무슨 일을 해야하는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취재와 섭외도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고 맨 처음에 같이 일했던 메인작가와 다시 일을 하게 되었을 때, 작가가 말했다. "너 이제 일 좀 하는구나?"


  그런데 칭찬을 들으며 나는 기쁘지 않았다. 방송작가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이 길을 계속 가도 될지 고민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방송국은 방송을 잘 만들어 제 날짜에 내보내는 게 최우선인 곳이다. 개인의 삶이나 가정의 행복을 위해 방송을 미루거나 대충 만들 수는 없다.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은 방송이 나가는 그 날까지 방송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시간과 노력과 체력을 갈아넣었다. 그렇게 만든 방송의 크레딧에 내 이름이 올라가는 걸 보면 뿌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방송을 위해 내 전부를 갈아바치는 삶이 행복하지 않았다. 엄마가 어깨 수술을 했는데 방송이 코 앞에 닥쳤다는 이유로 한번도 병원에 가보지 못 했다. 위경련이 와서 한밤중에 응급실에 다녀오고도 다음날 정시에 출근해서 일을 했다. 과로로 쓰러진 선배들이 링거를 꽂은 채 원고를 쓰는 마당에 위경련 따위를 내밀 수 없었다. 친구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나, 너무 피곤해서 좀 쉬고 싶은 마음을 갖는 건 사치였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남자친구도 퇴근하고 새벽 두 시에 방송국 앞에서 잠깐 만났을 뿐이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흔들렸다.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어느 토요일 밤, 촬영을 나갔던 PD가 야식으로 떡볶이를 사다주었다. 떡볶이를 먹던 메인작가가 넋두리처럼 말했다.

  "어제 집에 들어갔는데 애가 나를 보고 울더라."

  "왜요?"

  "맨날 애가 잘 때 들어가잖아. 오랫동안 얼굴을 못 봤더니 엄마한테도 낯을 가리네."

  그 선배는 우리 팀에 있는 다섯 명의 메인작가 중 유일하게 아이가 있는 사람이었다. 막내작가보다는 스케줄이 유연하지만 메인작가도 집에 일찍 들어갈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두 살짜리 딸은 친정엄마가 다 키워주고 있다고 했다.

  

  신혼인 조연출도 고민을 털어놓았다.

  "와이프가 애 낳지 말재요. 자기 혼자 키워야 될 것 같다고."

  "우리같은 사람들은 결혼, 육아 부적격자야."

  "작가님, 결혼식날도 신부대기실에서 원고쓰지 않았어요?"

  "그 때 갑자기 원고수정해달라 그래서 웨딩드레스 입은 채 원고 썼지. 내가 그럴 줄 알고 결혼식장에도 노트북 들고갔잖아."

  "그래도 작가님은 신혼여행은 갔잖아요. 저는 신혼여행도 못 갔어요."

  "신PD는 신혼여행 못 갔나? 왜 못 갔지?"

  "갑자기 태풍와서 재난방송편성되는 바람에 우리 방송 밀려서 결혼식만 간신히 하고 신혼여행 못 갔잖아요! 저 결혼하자마자 이혼 당할뻔 했어요."

  

  박수를 치며 웃어대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홀로 심란해졌다. 나는 가정을 꾸리고 싶었고, 아이를 낳고 싶었고, 잘 키우고 싶었다. 취미생활도 하고 싶었고, 친구들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방송일을 계속 하려면 그런 것들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했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은 분명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방송 때문에 삶이 흔들릴 때마다 괴로워하는 나에게는 어쩌면 방송인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걸지도 몰랐다.


  방송작가로 일을 잘 하고 싶은 마음과 내 삶을 갖고 싶은 마음. 이 두 가지 마음이 끊임없이 부딪혔다. 그러자 불면증이 찾아왔다. 하루 16시간을 일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밤새도록 심장이 두근두근거리며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나의 고민과 상관없이 방송국 시계는 쉼없이 움직였고, 나는 피로와 불면을 끌어안은 채 꾸역꾸역 일을 했다.


  그 해 12월 31일, 사무실 TV로 제야의 종이 울리는 걸 보며 혼자 새해를 맞았다. 평소라면 같이 야근하는 사람들이 더 있었을 테지만 날이 날인만큼 일이 급하지 않은 사람들은 전부 퇴근을 한 상태였다. PD는 편집실에, 메인작가는 작업실에 있어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 한 마디 나눌 사람이 없었다. 한 해의 끝과 시작을 이렇게 보낸다는 게 서글퍼졌다.


  그래서 자료조사를 하다가 우연히 찾았던 온라인 우울증 테스트를 해보았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 우울증 수치가 너무 높게 나왔다. 돌아보니 나는 '사무실이 있는 15층에서 뛰어내리면 번에 죽을까?' 라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있었다.


  그 테스트는 나를 '브레이크와 엑셀을 동시에 밟고 있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온라인에서 대충 해 본 테스트에서조차 가고 싶은 마음과 멈추고 싶은 마음이 혼재해있는 나의 마음이 드러난 것이다. 브레이크와 엑셀을 동시에 밟고 있는 자동차는 머지않아 고장이 날 것이다. 인간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그날부터 나는 브레이크와 엑셀 중 어느 것에서 발을 떼야 할 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5년 후의 미래, 10년 후의 미래를 상상해보자 답이 나왔다. 나는 방송일을 더이상 하고싶지 않았다.


  그렇게 세번째 퇴사가 결정됐다. 이전의 퇴사는 회사가 너무 구려서, 같이 일하는 사람이 너무 못되서 어쩔 수 없이 했던 퇴사였지만 이번의 퇴사는 의미가 달랐다. 아예 방송 세계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한 퇴사였으니까. 나에게 '일 좀 한다'는 평가를 내렸던 작가 선배가 다른 팀으로 옮기게 해줄테니 일을 좀 더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나는 거절했다. 방송을 만드는 일은 굉장히 매력적인 일이지만 나와 잘 맞는 일은 아니었다. 나에게 이 일을 하지 말라고 말했던 PD는 이 모든 걸 예상했던 걸까? 하지만 그의 말을 듣지 않은 건 잘한 일이었다. 만약 그 때 떠났더라면 나는 방송일에 미련을 둔 채 계속 근처를 맴돌았을 것이다.


  방송국에서 일을 하는 동안 나는 이전에 모르던 나에 대해 알게 됐다. 나는 내가 일에 미쳐 밤을 새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규칙적인 삶에 행복해하고, 내 삶을 아기자기하게 가꾸어나가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방송일을 하기 위해 준비했던 시간과 비용, 그리고 방송국에 다니는 동안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은 내가 나를 알기 위해 지불한 것들이었다.


  방송국을 나오던 날, 노트북과 자질구레한 짐들을 챙겨 나오며 몹시 홀가분했다. 갈 곳이 정해져있지는 않았다. 그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하고 주말에는 쉬는 보통의 회사에 다니고 싶었다. 통장에 남아있던 사백만원으로 가족들과 제주도에 한번 다녀온 후, 종로에 있는 어학원에 등록했다. 하반기 공채가 시작되기까지는 반년 정도가 남아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