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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꼼지 Oct 11. 2022

세 달 동안은 인턴이라구요?

  첫 취직은 홧김에 했다.

  재수까지 해서 들어간 대단한 대학을 졸업했는데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이럴 때 운전면허라도 따야 한다길래 아침마다 운전학원에 다녀와도 하루가 너무 길었다. 그래서 영화를 한 편 보고 들어왔더니 엄마가 화를 냈다.

  "네가 지금 영화보고 다닐 때니!"

  서러웠다. 졸업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욱하는 마음으로 방송작가 구인사이트에 들어갔다. 그 때 나는 휴먼다큐를 만드는 방송작가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슨 다큐를 만든다는 프로덕션에서 막내작가를 구하고 있었다. 어떤 곳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이력서를 보냈다. 곧바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주소를 찾아가보니 63빌딩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이었다. 한강 칼바람에 미친듯이 헝클어지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사무실을 찾아갔다. 여기가 정말 방송을 만드는 곳이 맞나 싶게 허름한 사무실이었다. 떡진 머리의 아저씨가 프로덕션 사장이라며 나를 맞았다.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어떤 프로그램을 만드는지는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다. 계약서 같은 걸 쓰지도 않았다. 그저 나의 근로조건을 구두로 통보받았을 뿐이다.

  "급여는 한 달에 80만원이고, 식대나 교통비는 따로 제공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3개월은 인턴이라 80%만 지급될 거예요."

  그 때는 몰랐다.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지. 방송작가의 세계에서는 메인작가가 되기 전까지 몹시 고생스럽다 했으니 그런가보다 했을 뿐이다. 아무 생각없이 집에 돌아오며 심지어 조금 기뻤던 것 같다. 어쨌든 출근할 곳이 생겼으니까.


  엄마에게 취직이 됐다고 통보했다.

  "어디에 출근하는거냐?"

  "다큐를 외주제작하는 프로덕션에 막내작가로 들어갔어요."

  월급이 80만원이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엄마는 잘 됐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외주제작이 뭔지, 막내작가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이해하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방송 만드는 데 작가로 들어갔나보다 생각하셨을 것이다. 문제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맹꽁이같을 수 있었을까. 하긴, 나는 방송작가가 되기로 결정할 때부터 헛똑똑이였다. 방송작가가 뭐하는 사람인지도 잘 모르면서 '신문방송학과 국문학을 전공했으니 방송작가가 되면 되겠다'고 결론을 내리는 건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짓이 아니다.


  어쨌든 그렇게 얼떨결에 방송작가로의 첫 발을 내디뎠다. 첫 출근날, 허름한 사무실로 일찌감치 출근했지만 뭘 해야 할 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함께 일하는 선배 작가가 몹시 다정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냥 선배가 전화하라는 곳에 전화를 하고, 약속을 잡으라면 약속을 잡고, 촬영해 온 테이프를 정리하라면 정리했다. 아무리 그 때를 되돌아봐도 내가 팀에 기여하는 바가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 퇴근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 회사에서 하는 가장 큰 역할은 PD가 찍어온 테이프를 프리뷰해서 메인작가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여기서 프리뷰가 뭔지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프리뷰라는 건 촬영해온 테이프의 내용을 시간대별로 정리해 문서화하는 것, 그러니까 쉽게 말해 촬영테이프의 몇 분 몇 초에 무슨 장면과 무슨 소리가 찍혀있는지 전부 타이핑하는 것이다. 60분짜리 프로그램 한 편을 제작하기 위해 촬영하는 테이프가 수십 개이므로 그걸 모두 프리뷰하는 건 굉장히 시간이 많이 드는 노동이다. 그런데 제작팀이 두 개인 회사에 프리뷰 기계가 한 대 뿐이었다. 나는 두 팀 중에서도 막내였고, 옆팀의 막내작가가 프리뷰 기계를 다 쓸 때까지 프리뷰를 할 수가 없었다.


  낮에는 선배가 시키는 일을 하면서 느슨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프리뷰를 했다. 눈이 빠지도록 프리뷰를 하고 나면 새벽 한두시였다. 집에 갈 엄두가 나지 않는 시간이었다. 여의도에서 경기도의 우리 집까지 택시비를, 심지어 심야할증까지 붙었을 어마어마한 택시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사무실 구석 소파에서 무릎담요를 덮고 잠을 잤다. 아침은 초코파이에 커피, 점심은 한솥도시락을 먹었다. 밥 한번 사주지 않는 사장 대신 선배 작가가 종종 밥을 사주었지만 그것도 하루이틀이었다. 그렇게 먹고 그렇게 자면서 이틀에 한번씩 퇴근을 하자 순식간에 다크써클이 얼굴의 절반을 덮었다.


  첫 아이템의 제작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원고를 넘기고 한숨 돌리게 된 선배가 물었다.

  "돈은 얼마받기로 했니?"

  "한 달에 80이요. 그런데 첫 세달은 인턴이라 80%만 준대요."

  그러자 선배가 화를 냈다.

  "미쳤네. 작가가 인턴이 어딨어! 세 달 인턴한 다음에 너 여기에 정규직 작가로 취직시켜 준대니? 4대보험도 안 되고, 아무것도 보장 못 받는데 돈이라도 제대로 받아야지!"

  내가 섭외를 개떡같이 해도, 경험없는 조연출이 촬영을 거지같이 해와도 한번도 화낸 적 없던 선배가 불같이 화내는 걸 보며 그제야 알았다. 뭔가 잘못됐구나. 밥 먹을 돈이 없어서 초코파이로 연명하고, 차비가 없어서 집에 못 가는 게 정상이 아니라는 걸 그 때야 깨달았다.


  그렇게 현실을 알게 될 때쯤, 첫 월급이 나왔다. 월급 80만원의 80%에서 세금까지 제하고 나니 통장에 육십몇만원이 찍혔다. 첫 월급을 받았는데 전혀 기쁘지 않았다. 한달을 꼬박, 그것도 이틀에 한번씩 퇴근하면서 일하고 받은 돈이라기엔 너무 적었다. 시급으로 계산해보니 최저시급도 안 됐다. 대학생 때 잠시 아르바이트로 일했던 편의점으로 돌아가는 게 돈을 더 많이 벌 것 같았다.


  누군가 그랬다. 일이라는 건 재미있거나, 돈을 잘 주거나,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좋아야한다고. 그 세 가지 중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 하는 직장은 뒤도 돌아보지 말고 떠나야 한다고 했다. 내가 하는 일은 재미있지 않았다. 돈은... 뭐 말하기도 참담할 지경이었다. 사람은 좋았다. 선배 작가는 정말 너무 좋은 사람이고, 같이 일하던 PD도 좋았다. 하지만 그 좋은 사람들이 그 곳에 발을 붙이지 못 했다. 배울 게 많다고 생각했던 PD는 한 편을 제작하더니 바로 떠났다. 선배 작가도 나에게 다른 곳을 알아보라고 했다. 오래 머물 곳이 아닌 것 같았다.


  다시 방송작가 구인사이트에 들어갔다. 웬만하면 지금 다니는 곳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 때 내 눈에 들어온 곳이 있었다. 외주제작사가 아니라 방송 본사의 프로그램에서 올린 글이었다.

  - 막내작가 구함. 주급 30만원. 주5일 9시에서 6시까지 근무. 식사 제공.


  모든 게 훨씬 나았다. 나는 아무도 없는 캄캄한 사무실에서 또다시 이력서를 보냈다. 회사 사람들 몰래 면접을 보고, 며칠 안에 출근했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만 두겠다는 말을 하고 3일만에 회사를 옮겼다. 어차피 상도덕 따위 존재하지 않는 회사였으므로 나도 그렇게 회사를 옮겼다. 인턴 기간이 세 달이라던 회사에서 두번째 월급을 받기 전에 탈출했다. 그 회사에서 일하는 50여일 동안 내가 받은 돈은 백만원 남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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