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시끌벅적한 말들 때문이었다. 아주머니 너덧 분이 전라도 사투리로 전직 대통령 욕을 하고 있었다. '거시기'로 시작해 '거시기'로 끝나는 낯선 운율 속에서 대통령이란 단어가 유독 귀에 꽂혔다. 다른 말들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해 흘러들어왔다가 그대로 흘러나갔다. 지독한 직업병이었다.
어쨌든 눈은 떴지만 눈꺼풀이 무거워 시야가 흐릿했다. 겨우 물체가 인식됐는데 커다란 TV가 눈에 들어왔다. TV 화면 안에는 지난겨울 탄핵당한 전직 대통령 모습이 나왔다. 배경은 익숙한 청와대가 아닌 법원이었다. 문득 관련 일정이 머리에 스쳤다. 이날은 탄핵 이후 피의자 신분이 된 전직 대통령의 첫 재판 날이었다.
그제야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 지금 내 상황이 인지됐다. 난 헐렁한 주황색 티셔츠에 회색빛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등을 딱딱한 바닥에 댄 채 사지는 쭉 펴서 팔자 좋게 누워있었다. 말랑한 베개가 아닌 목침으로 뒤통수를 받친 채 멍하니 형광등을 얼마간 바라봤다. 난 그렇게 태어나 처음 와보는 여수의 어느 찜질방에서 평일 오전 10시가 다 되어서야 "거시기" 소리에 눈을 떴다.
여행의 시작은 충동적이었다. 대선 TF팀에서 일했다고 대체휴가를 받았다. 그게 발단이었다. 작년 국정농단 TF에 끌려갔다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TF행이었다. 하지만 둥지를 옮겼으니 사실 반박할 근거도 못됐다. 그렇게 그냥 버텨냈다. 다만 갑자기 생긴 휴가를 오롯이 나만의 시간으로 채우자고 결심한 순간 내 손은 이미 기차표 예매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하고 있었다.
서울역에서 출발할 수 있는 여러 노선을 검색하다가 여수에서 멈췄다. 여수 밤바다 노래가 머리에 떠올랐는데 사실 그게 이유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비교적 자주 가는 동해도 아니고 집에서 그나마 가까운 서해도 아닌 그저 남쪽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여수 밤바다에 대한 기대는 솔직히 크지 않았다. 그냥 기차표가 필요했고 예매할 수 있는 목록 중에서 제일 남쪽이 여수였다. 그게 여수행 표를 구매한 이유 전부였다. 그렇게 끊은 기차표는 2시간 뒤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KTX 열차였다. 서울역에서 출발이었다.
집 문을 열고 서울역 티켓 창구까지 50분이 걸리니 시간은 충분했다. 짐만 챙기면 됐다. 옷부터 챙기기로 했다. 집에서 잘 때 입거나 강아지랑 산책할 때 입는 감색 반바지 차림이었다. 거울을 보니 어느 한 군데에도 이물질이 묻어있지 않았다. 티셔츠는 10년 전 ABC마트에서 운동화 사고 사은품으로 받은 회색 티셔츠였다.
마구잡이로 입었는데도 목이 늘어나지 않아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그대로 오케이였다. 옷차림은 통과였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었다. 누구 눈치를 볼 일이 없었다. 혹시 내 옷차림 때문에 동료나 상대방이 창피해하거나 하지는 않을까 생각할 필요가 평소에도 거의 없었지만 이날은 아예 없었다.
책 2권을 늘 갖고 다니는 백팩에 넣었다. 지갑은 반바지 오른쪽 주머니에 넣었다. 휴대폰은 강박관념처럼 늘 그렇듯 왼쪽 주머니에 담았다. 머리는 어젯밤에 감았으니 문제 될 게 전혀 없었으며 물 부족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하루쯤은 예의였다.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랐지만 돌아서면 자라는 게 일인 녀석이라 굳이 휴가에서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휴대폰보다도 무거운 면도기 따위에 내 열량을 쓰기 싫었다. 양말은 당연히 크록스에 발을 넣을 것이라 신을 필요가 없었다. 특히 양말 신고 크록스를 신는 건 요플레에 밥을 말아먹는 것만큼 눈에 띄는 일이니 주목받기 싫어하는 내 성격엔 신을 일도 챙길 일도 없었다. 10분은커녕 5분 만에 한반도 남쪽으로 튕겨 나갈 여행 준비가 끝났다.
한껏 기분을 내고 서울역에 도착해 베트남 밥 요리를 테이크아웃으로 먹었다. 메뉴 이름이 어려워 그냥 베트남 밥 요리로 부르기로 했다. 그렇게 다른 여행객들이 하듯이 똑같이 따라 하며 열차를 기다렸다. '음 10분 남았군. 신문이나 하나 살까?'하는 생각으로 종합일간지 2부를 역에서만 볼 수 있는 이름 독특한 편의점에서 1600원에 구매했다.
그리곤 열차를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를 태울 쇳덩이 님이 오질 않았다. 심지어 제시간이 됐는데도 엉뚱한 열차 번호와 행선지의 기차가 눈앞에 왔다. 뭘까? 삶은 또 왜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정말 별의별 생각을 "열차 안 타시나요?"라고 묻는 안내원 앞에서 했다. 다시 표를 봤다. 출발지에 '용산'이라고 찍혀있었다. 그럼 지금 서울역이 아닌 용산역에서 날 태울 기차가 이렇게 서 있겠지? 명백한 사실이 내 머릿속에서 나를 때렸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럼 뭐하나. 움직여야 할 건 기차가 아니라 나였다.
괜히 뿔이 났다. 기차표 애플리케이션을 켜서 서울역에서 다른 곳으로 가는 표를 검색했다.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것도 같이 검색됐다. 책 2권밖에 안 든 가방이 갑자기 노트북이라도 든 것처럼 무거웠다. 크록스에 반바지 차림인데도 등에서 땀이 계속 나서 더웠다. 수염 덥수룩한 내 몰골과 왼쪽 뒤통수 쪽이 눌린 내 머리 모양은 종이 신문 2부와 함께 어느덧 노숙자의 모습과 닮아가는 기분이었다. '이거 이불 아니에요. 보고 싶어서 무려 1600원이나 주고 샀습니다'라고 등에라도 써 붙이고 싶었다.
그렇지만 다리가 먼저 무거워졌다. '그냥 집에 갈까?' 하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하지만 서울역과 용산역을 한데 묶어 검색하는 애플리케이션 따위가 나를 위한 '휘게 라이프'에 태클을 거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억울함에 전투력이 상승했다. 직업 특성상 회사가 용산에 있는데도 자주 가지 않는 용산역에 그렇게 가기로 했다. 씩씩거리던 기운이 조금 잠잠해졌을 때쯤 나는 용산역 어느 쓰레기통에서 베트남 밥 요리 테이크아웃 상자를 버리고 기차에 올라탔다.
<더 읽기>
나 홀로 여수 여행② 1년 차 뱃사람 코스프레
https://brunch.co.kr/@komsy1201/200
나 홀로 여수 여행③ "여수 참 넓죠?"
https://brunch.co.kr/@komsy1201/201
나 홀로 여수 여행④ 여행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https://brunch.co.kr/@komsy120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