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에 깼다. 반쯤 열고 잔 창문으로 빗방울이 들이쳤다. 간간이 번쩍이는 하늘에 맞춰 길고양이 울음소리도 커졌다. 거처 없는 고양이들이 제가끔 비를 피한 구석에서 울었다. 침대 발치에서 같이 잔 우리 집 개도 꼼지락거렸다.
개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불쌍하게 처진 눈을 멀뚱거렸다. 하늘은 세 번 번쩍이면 한 번쯤 큰 소리로 갈라졌다. 갈라지지 않을 때의 소리 여백은 빗방울이 차지했다. 가가호호 붙은 빗물받이를 빗방울이 때리며 하늘의 침묵을 메웠다.
결심한 날 아침과 마주했다. 아침은 밝아오지 않았고 그저 돌아온 아침이었다. 한밤중과 다름없는 어둠이 물러가지 않고 그대로 아침까지 밀어 버텼다. 버티는 어둠의 힘이 완강했지만 시계는 아침을 몰아냈으므로 나는 움직여야 했다.
식탁에서 바나나를 한입 베어 물었다. 수북한 재떨이를 쓰레기통에 뒤집어 깠다. 책상 서랍에서 휴대폰을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위치추적이 되지 않는 폴더폰이며 명의가 없는 대포폰이라고 연락책은 며칠 전 내게 말했다.
연락책은 내게 임무 수행이 끝나는 그 자리에서 성공이면 단축 번호 1번을 누르라고 했다. 실패하면 2번을 누르라고 지시했다.
휴대폰 액정 화면으로 통화 연결을 확인한 뒤 복도 밖으로 최대한 높이 던지라고 연락책은 지시했다. 공중으로 휴대폰이 날아가는 동안 부재중 통화가 반대편에 찍힐 것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자신들이 손에 있는 휴대폰 둘 중 하나로 발신 번호가 찍히면 즉시 임무가 종료된다고 설명했다.
내 임무는 일본으로 건너가 한 여자를 찾는 것이었다. 적어준 주소의 오피스텔로 가서 초인종을 눌러 사진 속 여자가 문을 열면 1번을 눌러야 했다. 여자가 아닌 남자가 문을 열거나 사진과 다른 얼굴의 여자가 문을 열면 2번을 누르는 것이었다.
오피스텔 주소는 오사카 어느 지역 25층이었다. 나는 며칠 전 연락책과 만나 도박빚 3억 원을 단번에 면제받는 계약서에 지장을 찍었다. 어째서 이런 간단한 일로 3억 원이 사라질 수 있는지 불안했다.
연락책은 확실하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얼굴이 팔리지 않은 인물 중 이런 일을 덥석 물 녀석은 나뿐이라고 거들먹거렸다. 3억 원쯤 우리에겐 아무것도 아니란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였다. 연락책은 계약서 두 부를 맞닿은 뒤 내 지장을 경계선에 찍었다. 그리고 한 부를 내게 던져줬다. 계약서 위에는 사진이 포스트잇으로 붙어있었다.
사진 속 여자는 한눈에 봐도 예뻤다. 어디선가 본 연예인을 닮기도 했고 순정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기도 했다. 연락책은 내게 설명을 한참 하는 동안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속에선 “배신자”라는 단어가 이따금 들렸다. 불륜 현장을 덮치는 것인지 아니면 3억 원에 10배쯤 되는 거액 채무자를 색출하는지 나는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으며 도대체 이러한 일이 3억 원의 가치를 가지는 것에 대한 불안감과 돌발상황이 벌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공포감이 불어났다. 그저 선입금으로 받은 현금 1억 원이 든 가방을 확인했고 폰을 내던진 뒤 나머지 2억 원을 받을 장소의 주소를 머릿속으로 되풀이하며 외웠다.
일본으로 건너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폴더폰을 열어 숫자키를 매만졌다. 오른손 엄지로 폴더폰 위를 튕겨 젖힌 뒤 1번과 2번 사이의 3mm를 구별해 꾹 누르면 끝이었다.
오피스텔 25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호수를 중얼거리며 오른쪽 복도로 걸었다. 2513호가 내 목표였다. 초인종을 눌렀다. 인터폰으로 일본어가 흘러나왔다. 누구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남자 목소리였다. 나는 연락책이 알려준 대로 “오까네”라고 답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돈이라는 뜻이었다.
“오까네.”
저쪽에서 아무런 의심 없이 문을 열었다. 역시 남자였다. 낯이 익었다. 희열이었다.
“너 정구 아니냐?”
괴롭힘 당한 사람은 괴롭힌 사람을 기억해도 괴롭힌 사람을 괴롭힘 당한 사람을 잊는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아니면 고등학교 3년 내내 괴롭힌 짧지 않은 시간이 그가 나를 기억하는 근거였는지도 모른다.
“정구 아니냐고 인마.”
“맞아.”
“아니 여기 어쩐 일이야. 돈 날라?”
희열이는 비웃었다.
어느 날인가 편의점에 가서 콘칩을 사 오라고 했는데 내가 관성대로 새우깡을 사다 줬을 때의 그 웃음이었다. 이 자식이 맨날 새우깡 먹는다고 오늘도 처먹으라네. 인마 새우깡에서 쥐꼬리가 나왔다잖아. 쥐깡 처먹으라고?
희열이는 그날 나를 비웃으면서 때렸다. 퉁퉁 부은 눈으로 나는 다시 콘칩을 사다 주고 다시 몇 대를 맞아 퉁퉁 부은 다리로 초코우유를 날라야 했다. 한 번에 하나씩 주문이 떨어졌고 한 번에 한 부위씩 떨어져 나갈 것처럼 맞았다.
폴더폰을 열었다. 2번을 눌러 복도 창문 밖으로 던져야 했다. 그런데 손이 떨렸다. 어쩌면 손이 떨린다기보다 무의식적으로 1번을 눌렀는지도 모른다. 희열이는 내 휴대폰에 자기 번호를 1번으로 저장했다. 학교 갈 때 1번 눌러서 보고하고 집에 도착하면 1번 눌러서 또 보고해 인마. 그때부터 내 하루의 시작과 끝은 늘 1번이었다.
신호음이 갔다. 그대로 밖으로 던졌다. 사태를 모면해야 했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대답 없이 뒤를 돌아 달렸다. 등 뒤에서 희열이가 뭐 하는 거냐고 소리쳤다. 인마 뭐해? 또 쥐깡 가져와서 다시 가는 거야?
뛰는 내내 번호를 잘못 눌러 나머지 2억 원이 날아갔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저 개새끼는 여전히 저렇게 누군가를 괴롭히며 사는 듯하다는 생각에 하류인생이라고 쓴웃음을 지었지만 당장 먼저 받은 1억 원마저 위태로운 나도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오피스텔 건물 구석에 숨었다. 벌벌 떨며 담배를 피웠다. 봉고차 한 대가 건물 입구에 섰다. 덩치 큰 사내 네댓 명이 내렸다. 25층으로 가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여자가 아닌 희열이를 마주한 정반대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할까.
아마 저들 중 누군가는 휴대폰 단축번호도 하나 제대로 못 누른 나를 찾아 1억 원을 빼앗아 갈 것이었다. 어쩌면 한국행 비행기를 타러 가는 길에서부터 납치 되거나 공항에서 소리 소문 없이 누군가 손에 이끌릴 것이었다. 콘칩을 사 오라고 했더니 맨날 먹던 새우깡을 사왔다며 맞았던 부위가 아렸다. 희열이는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저쪽에서 눈 마주쳤던 길고양이가 차 밑으로 기어가 웅크렸다.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침에 내 발치에서 꼼지락거렸던 우리 집 개가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