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소설) ‘수포자’의 하루

by 반동희

이모는 남자의 길을 두 가지로 정의했다. 공부를 잘하거나 싸움을 잘해야 한다고 했다. 둘 중 하나를 잘하면 먹고사는 데 지장 없다고 했다.

문제는 잘하는 것이었다. 난 늘 공부도 중상위권이었고 싸움도 맞고 다니지 않을 정도였다. 공부를 열심히 할수록 항상 전교 20등 턱밑에서 수학이 발목을 잡았다.


집에서 과외를 붙여줬지만 수학 머리가 없어 다른 과목을 기하급수적으로 잘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당연히 한계가 있었다. 등수는 매번 고만고만해 나한텐 눈길조차 안 주는 여자를 일편단심 짝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 좌절감으로 자꾸만 다른 쪽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일종의 정신 승리로 그보다 조금 못하지만 나를 좋아해 줄 수 있는 여자를 선택했달까.


다른 과목을 열심히 파고들었다. 그러나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차피 수학에서 다 까먹고 ‘다음 계단 모형 중 1000번째 칸의 블록 수는?’ 같은 마지막 문제를 진짜 그리고 앉아 있을 생각에 갑갑했다. 왜 나는 수학을 못할까. 누굴 닮았을까.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아빠를 닮았다고 결론 내렸다. 그렇다면 나는 싸움을 해야 할까. 아 맞다. 우리 아빠 어렸을 때 학교 짱이었다는데 그걸 왜 잊고 있었지.


싸움을 하기로 했다. 싸움 좀 하는 친구들은 늘 ‘대가리’와 ‘선빵’을 강조했다. 집단의 우두머리를 공략하는 게 중요하며 먼저 때리는 게 장땡이라는 말이었다. 단순한 남자의 세계에서 집단의 짱을 쓰러트리면 나머지는 알아서 설설 길 것이며 먼저 한방 먹이면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설명이었다.


나는 팔굽혀펴기를 하면서 힘을 길렀다. 싸움 좀 하는 그 친구 말로는 펀치력을 기르려면 미는 힘이 세야 했다. 어깨에서 주먹이 뻗어나가는 순발력은 타고나는 것이었지만 거기에 실리는 중량은 키울 수 있었다. 턱걸이는 당기는 힘이었고 팔굽혀펴기는 미는 힘이었다. 마침 턱걸이엔 재능이 없으니 참 잘 됐다 싶었다. 팔굽혀펴기를 석 달 정도 빠지진 않고 했다.


결심이 선 날 나는 우리 반 맨 뒷자리에서 쉬는 시간이 되면 쏜살같이 나가 담배를 피우고 여기저기 싸움판을 휘젓고 다니는 제일 센 놈에게 시비를 걸었다. 녀석을 쓰러트린 뒤 옆 반 대가리를 넘어트리고 그렇게 하나하나씩 접수해 전교 짱이 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내가 우리 반에서 제일 센 놈에게 선빵을 내질렀을 때 나는 그만 수학 교과서가 떠올랐다. 차라리 앞으론 블록 그림을 잘 그리는 쪽을 택해야겠다고 깨달았다. 내 주먹은 정확히 그 녀석의 가슴팍으로 향했다.


그 녀석은 손바닥으로 내 주먹을 막았다. 마치 혼신의 힘을 다해 중거리 슛을 찼는데 골키퍼 정면으로 날아간 느낌이었다. 온갖 싸움 필드에서 백전노장이 된 녀석은 타고난 순발력에 경험까지 더해 내 주먹의 발사각과 속도를 정확히 손바닥으로 가로막았다. 나는 타자가 치기 좋은 공을 던진 투수처럼 오른쪽 어깨가 앞으로 열리면서 비스듬히 몸이 쏠렸다. 쉽게 말해 약 1초간 무방비였다.


수학 과외선생이 도형 단원을 가리키다가 이해 못하는 내가 답답해서 교과서를 아예 돌려가며 설명했던 날, 무수히 많은 괄호가 등장한 방정식을 배우면서 그놈의 분배 법칙이 이해되지 않아 마이너스가 플러스로 계산되고 플러스가 마이너스로 계산되어 정답은 0인데 내 답은 100을 찍었던 날, 좌표 문제를 한창 계산해 점을 찍어야 하는데 도저히 내가 추산해 찍을 점이 답안지 좌표축 안엔 없어 허둥대던 날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녀석의 반격은 시속 150km 한가운데 강속구를 기다렸다는 듯 받아치는 4번 타자 스윙 같았다. 어찌 된 일인지 날아오는 주먹이 내 눈에 보였다. 보통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하면 온갖 오감이 작동해 순간이 느린 화면처럼 흘러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 주먹이 평평한지 혹은 검지 부근이 튀어나왔는지 비디오 판독되는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녀석의 오른발이 동시에 내 왼발을 걷어찼다. 나는 왼 허벅지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을 받으면서 그걸 깨달았다. 그림 같이 꼬꾸라졌다. 그다음은 기억이 없다. 왼쪽 어깨부터 땅에 닿은 나는 눈을 감았다. 머리에선 피타고라스 정리나 싸인 코싸인 탄젠트 같은 것이 두둥실 됐다.


아, 우리 이모는 왜 공부랑 싸움밖에 길이 없다고 했을까. 다른 길은 진짜 없는 걸까. 왜 싸움 잘하는 내 친구는 선빵을 어디로 때려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 않았을까. 왜 타고난 순발력이나 경험이 중량 발휘에 전제 조건이란 건 설명해주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그 녀석 싸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전부 허풍이 아니었을까. 도형이 그려진 수학 교과서를 열심히 돌리던 과외 선생은 지금쯤 좋은 학생을 만나 기량이 만개하고 돈 좀 벌었을까.


코에서 뜨거운 것이 흐르는 순간 쉬는 시간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나는 코너에 몰려 비틀거리다가 라운드 종료 종소리를 듣는 복싱 선수처럼 반겼다.


마침 다음 수업은 수학 시간이었다. 수학 선생은 열심히 함수를 설명했다. x에 있는 공이 네모난 상자를 거쳐 y로 나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질문했다. 오늘은 26일인데 나는 출석번호 2번(앞 수)도 아니고 6번(뒤 수)도 아니고 8번(2 더하기 6)도 아니고 12(2 곱하기 6)번도 아니고 26(절댓값)도 아니라서 안심했다.


코는 여전히 뜨거웠다. 전보다 두꺼워진 내 팔뚝은 풀리지 않은 긴장에 꿈틀댔다. 내 네모 상자는 써보지도 못한 팔뚝 중량이었다. 뒤에서 날아온 작은 지우개 덩이가 뒤통수를 때렸다. 돌아보니 나한테 x주먹을 좀 전에 날린 녀석이 웃었다. 어디선가 2라운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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