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소설) 빨간 맛

by 반동희

정해진 길을 따랐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학교에선 모범생이었다. 집에선 어디 내놔도 빼놓지 않는 아들이었다. 엄친아까진 아니었다. 그렇지만 취업난에 덜컥 이름난 대기업에 합격했다.


전부 부모가 깔아 둔 길을 천천히 밟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고학년엔 중학교 선행학습을 했다. 중학교에 들어선 외국어 고등학교 입시 준비를 했다. 외국어 고등학교 합격 뒤엔 유학을 계산했다. 사람들이 명문대라고 부르는 곳에 합격해 적당히 1년의 자유를 만끽하다가 군대에 다녀왔다.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미네소타에 있는 한 대학원을 마쳤다.


트라우마가 생긴 건 부지불식간이었다. 빨간색만 보면 온몸에 진땀이 흘렀다. 티셔츠 뒤가 흥건해졌다. 아무리 축구를 해도 멀쩡하던 발바닥이 미끈해졌다. 이마엔 땀방울이 맺혀 콧등을 타고 흘렀다. 겨드랑이 온도는 급상승해 이러다가 상의가 보기 싫게 젖을 것이라는 걱정을 몰고 왔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8월이었다. 반 1등을 차지하면 용돈 30만 원을 한 번에 주겠다는 약속을 집에서 받아낸 뒤 그걸 이룬 그날이었다. 30만 원을 들고 동네 백화점에 갔다. 곧바로 13층으로 직행해 사고 싶던 블루투스 스피커와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CD를 사고 오는 길이었다.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맨 앞 칸 탑승구에 서서 쇼핑백을 매만지며 들떴다. 늘 앞서야 하니 지하철도 앞 칸만 타라는 건 큰 사람 되기 위해 큰길로만 다니라는 것과 더불어 우리 집 규칙이었다. 열차가 들어오니 한걸음 물러서라는 방송이 나왔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순간이었다.


"아악."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솔' 정도의 높은음이었다. 본능적으로 눈이 돌아갔다. 머리가 긴 여자가 선로에 뛰어들었다. 오른쪽 팔꿈치를 접어 얼굴을 다가오는 지하철 쪽으로 가리면서 여자는 추락했다.


자세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냥 난간에 서 있다가 발을 선로로 내린 것이 아니었다. 뒤에서 달려와 공중에 떠서 추락하는 속도와 자세였다. 명백한 자살이었다. 달리는 열차에 맞서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호하게 몸을 내던지는 극한 장면이었다. 여자는 공중에 뛴 점프가 역할을 끝낸 뒤 중력의 힘으로 머리부터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여자의 다리가 위로 들리면서 발이 보였다. 빨간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가 지면과 수평을 이루는 순간 열차가 지나갔다. 순간 보고 말았다. 선로에 떨어지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의 눈동자는 컸다. 눈동자에서 흰자가 넓어지면서 장면이 멈췄다. 열차의 3분의 2가 지나가고 나서야 모든 게 정지됐다.


머리가 멍했다. 빨간 하이힐이 아른거렸다. 쇼핑백을 들고 있는 손에서 땀이 났다. 이마에서 땀이 콧등을 타고 윗입술까지 흘러내렸다.


얼마 후 경찰이 왔다.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었다. 경찰은 내게 본 것을 그대로 설명해달라고 했다. 나는 첫마디로 빨간 하이힐을 봤다고 했다. 바싹바싹 타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여자가 오른팔로 열차 쪽을 막으면서 추락했다고 말했다. 머리가 꼬꾸라지는 순간 열차가 치고 갔다고 했다.


역에서 나와 버스를 탔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집에 도착해서 쇼핑백을 던져 놓은 뒤 침대에 누워 천장만 봤다. 집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경찰에 말한 걸 되풀이하기 싫었다. 그날 이후 경찰에서 연락이 온 적도 없었다.


빨간색만 보면 평점심을 찾기 어려웠다. 빨간 표지로 만든 책, 빨간 색연필, 빨간 티, 빨간 의자, 빨간 모자 등등 이 세상에 빨간 것이 그렇게 많은지 그날 이후 깨달았다. 미술시간에 배운 색의 3원색이 현실로 다가왔다. 저 색은 빨강에 뭐를 섞어서 나올까. 질문이 꼬리를 물고 따라다녔다.


국가대표 축구 경기라도 있는 날이면 나는 축구가 아닌 빨간색에 흥분했다. 멀쩡한 소개팅 자리에선 상대가 빨간 소지품이나 옷차림이라도 차리고 나오면 횡설수설했다.


하루는 정말 마음에 드는 여자가 소개팅 자리에 나왔고 나는 약속 장소에 조금 늦어 죄송하다는 말을 한 뒤 더욱 열심히 소개팅에 임했다. 꼭 첫사랑을 보는 것 같았다. 마침 상대편 분위기도 좋아서 간단하게 술 한잔하러 가자고 일어나는 순간 그 여자가 빨간 하이힐을 신고 있는 걸 봤다. 내가 생각하는 외모와 취향은 기본이고 우리 부모가 제1원칙으로 두고 있는 집안까지 완벽한 여자를 나는 대충 둘러대고 보내버렸다.


공부할 때엔 빨간 펜으로 밑줄도 그을 수 없었다. 빨간색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만 더욱 커졌다. 빨간색은 곧 빨간 하이힐 주인공의 눈동자였다. 빨간 펜이 밑줄을 긋고 간 활자를 따라 여자의 눈동자가 입체적으로 커졌다. 꼭 3D 안경을 쓰는 기분이었다.


그 여자의 눈동자는 나한테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그저 우연히 마주쳐 아무런 메시지도 없는데 나 혼자 해석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야. 분명히 자기 팔로 열차를 막았고 흰자가 커졌어. 지하철 소리를 들으며 후회했을지도 몰라. 하루도 그날 생각을 안 한 적이 없었다.


세상을 인지하는 눈에서 빨강을 지워낼수록 거대한 심리 장막은 높아갔다. 뒤늦게 트라우마 극복을 위해 심리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워낙 굳건히 다져진 것이라서 극복이 쉽진 않을 것이라고 검진 센터에서 구구절절 설명했다. 무엇보다 모든 치료가 눈을 감으면 원점으로 돌아갔다.


어느 미국 드라마에선 사형수와 눈을 마주치면 그 혼령이 따라붙어 간수들은 눈을 절대 마주치지 않는다고 했다. 또 어떤 드라마에선 익사한 시체를 걷어 올릴 때 잠수부들은 절대 그 눈을 봐선 안 된다고 교육받는다고 했다. 그들의 눈은 흰자가 극도로 커진다고 했다.


그날 지하철을 타지 않았다면? 백화점에 가지 않았다면? 30만 원을 받지 않았다면? 아예 반에서 1등을 하지 않았다면? 그보다 더 먼저 부모의 기대를 위해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온갖 질문이 역산되어 원점을 타고 기어 올라왔다.


시각 공포는 나날이 공감각으로 치환되어 오감을 휩쓸었다. 눈앞에 그 여자 눈동자를 띄우는 프레젠테이션이 되었다.


어디서 보니 개는 부분 색맹이라고 했다. 사람처럼 세상을 총천연색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색의 3원색 중에서 빨강을 인식하는 세포가 없어 식별할 수 없어 그렇다고 설명했다.


개 눈이 부러웠다. 나는 개 눈을 갖고 싶었다. 빨간색이 길어올린 빨간 맛을 알게된 다음부터 줄곧 무의식 중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정말로 개 눈을 갖기 위해 움직일 때였다.


나는 유기견 센터부터 찾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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