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자전 시점 팩션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같은 공간에 몰아두면 어느 수준 친해진다. 병원은 이런 조건에 딱 맞다. 같은 공간에서 주사에 찔리고 고통에 신음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동질감이다.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차단감도 빠질 수 없다. 내집단, 외집단, 준거집단 같은 의미까지도 필요 없다.
같이 쓰는 병실에서 한밤중에 소란만 안 피우면 전부 동지다. 베지밀 한 팩도 나눠 마시고 밖에선 많이 사라진 "한 개비만" 하는 담배 인심도 후하다. 누군가 저 구석 비공식 흡연 구역에서 담배 한 가치만 달라는 환자복 차림의 사람을 외면한다면 그들 동지가 쏠 눈총을 각오해야 한다. 그나마 요즘 달라진 건 전자담배를 만지고 있으면 이 모든 동지 의식에서 피해 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중요한 건 여기서도 할아버지들이다. 나는 왜 노년 환자 절대다수가 할머니가 아닌 할아버지인지 과학적으로 분석할 재간이 없지만 내 경험상 현실이 그렇다. 게다가 할아버지들은 할머니들과 비교해 엄살도 심하다. 보호자가 있건 없건 굳세게 생활하는 할머니들은 보여도 나 홀로 밝은 표정으로 입원 생활을 버티는 할아버지들은 거의 없다. 나이 먹을수록 아이가 된다는 데 여기서 아이는 여자아이가 아닌 남자아이인 걸까. 모든 할아버지는 막대사탕과 아이스께끼를 손에 쥐고 쪽쪽 빠는 아이가 되고 싶어 한다. 차이점이라면 막대사탕 대신 달달한 믹스커피 정도랄까.
그래도 할아버지들을 간과할 수 없는 점이 하나 있는데 그들 중 다수가 대단한 스토리텔러라는 점이다. 할아버지들이 삼삼오오 모여 군대 얘기하는 걸 듣다 보면 지루한 입원 생활 가운데 간만에 뇌파가 파동하고 집중력이 쫑긋해진다. 누군가 이 얘기를 가공하면 재밌는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감정까지 밀려와 나만 듣고 싶을 정도다. 무려 할아버지와 군대라는 단어가 겹친 거다. 상상이 되지 않는가. 특유의 과장이 녹아있음을 고려해야 하지만 어차피 완벽한 사실관계만으로 건조하게 짜인 르포르타주는 이 세상에 없다.
다만 이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으려면 값을 치러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의료보험 잘 된 우리나라 병원에서도 보험 적용 안 되는 건 진통제뿐만이 아니다. 할아버지들의 세상만사 이야기를 들으려면 돈을 내는 대신 날아드는 질문 세례로 통과 의례를 겪어야 한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들이 "저거 왜 저러는 거야?"라며 TV 속 정치 뉴스 앞에서 넘겨짚기 식으로 물을 때가 있다. 일종의 정치 성향 탐문인데 어차피 거의 모든 질문엔 답이 정해져 있으니 내 의지와 관계없는 유체 이탈 화법이 적절하다. 그래야 스토리텔러의 얘기를 들을 수 있으니까. 그것만 유념하면 듣기 좋은 얘기들은 킬러 콘텐츠로 손색없다.
그렇게 할아버지들 얘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그 시절 그 많은 부대장은 왜 그렇게 악랄했으며 또 왜 일개 사병인 우리 할아버지들껜 이따금 찍소리도 못했을까’라는 의문이 샘솟는다. 할아버지들은 전부 일당백을 상대하는 람보였다. 어쩌다가 그 시절 군 생활을 침 튀기며 얘기하는 할아버지가 하필이면 베트남에 참전했던 경험까지 있다면 끝판왕 격이다. 헤밍웨이도 울고 갈 터프함과 테드 창이 떠오를 만큼의 신선함이 주렁주렁 열린다. 어떤 때엔 조지 오웰도 침 흘리며 받아 적기 바쁠 정도로 사실을 바탕으로 한 그 시절 생생한 르포르타주가 눈 앞에 펼쳐진다. ‘저게 정말 사실일까?’라는 의문만 품지 않는다면 꽤 괜찮은 영화를 본 것처럼 할아버지 입에서 튀어나오는 침들 사이로 빨려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할아버지들의 질문 세례와 침 세례로 은총을 받아 새로 태어나면 비로소 주변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그렇다. 병원엔 할아버지들만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은 늘 병원 주변 밖에 있다. 어디로 바람을 쐬러 나가도 항상 마주친다. 환자들이 담배 피우는 은밀한 장소에도 있고 정문에도 있고 후문에도 있다. 밤 10시 넘어서 몰래 들어오는 응급실 쪽문에도 있는 걸 보고 놀라자빠질 뻔했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와 인사를 하고 있다. 거의 두 개의 심장을 가진 모 축구선수와 같다. 그래서인지 그는 늘 누군가와 대화 중이다.
들어보면 온갖 의료 정보를 설파하는 데 의료사고 내서 은퇴한 뒤 평범하게 살다가 입원하게 된 전직 의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두통엔 타이레놀보다 뭐가 좋고 수술 후 간호사한테 진통제를 요청할 땐 어느 회사 제품이라고 꼭 말하라는 식이다. 그가 단순 접촉사고 수준의 교통사고 피해자로 입원한 사람한테도 조언하는 걸 들었다. 다음 날 손해사정사가 그 사람한테 얘기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놀랍기도 했다. 돈 버는 재주와 그릇은 따로 있고 각자 차고 태어난다는 주워들은 말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적 동물의 전형과 반대로 5인실에서 온종일 사방을 커튼으로 치고 자신만의 1인실로 사는 '건물주형 환자'도 있다. 그를 둘러싼 커튼을 보고 있으면 꼭 그 사람 집에 다른 환자들이 월세로 사는 모양새다. 오백에 삼십? 오백에 사십오? 날로 그의 주머니가 두둑해지고 있다.
병실 얘기가 나왔으니 덧붙이자면 침대에 누워있는 자세만 봐도 환자의 평소 성향이 나온다. 몸을 뒤로 젖힌 채 TV에서 눈을 떼지 않는 환자는 '카우치 포테이토'의 전형이다. 그의 주말은 늘 그럴 것이다. 부연하자면 이들은 대개 심각한 중증환자가 아니고 손가락이 다친 정도다. 자매품으로 온갖 뉴스에 박식한 '시사 평론가'도 꼭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이슈가 그의 침대에서 새로 탄생하며 그가 덧붙이는 현실 분석과 전망이 말들 사이로 빠지지 않는다. 중요한 건 사실관계 전달보다 분석과 전망이 육십 퍼센트 더 많다는 것인데 그래서 더 람보 할아버지가 겹친다.
반대로 한시도 침대에 눌러 있지 않는 사람도 있다. 휠체어를 타고 나갔다가 들어온 후 곧장 목발을 짚고 나가는 식이다. 뭐가 다른지 생각해 볼 문제다. 겨드랑이가 심하게 아팠거나 허리를 바싹 세우고 싶었던 건 아닌가 싶다. 인간은 직립 보행으로 두 손이 자유로워지면서 지구를 정복할 수 있었다. 자연의 이치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또 다른 어떤 이는 아예 밥 때에만 들어온다. 아침 먹고 땡, 점심 먹고 땡, 저녁 먹고 땡이다. 저 멀리서 그가 보인다면 간이 덜 된 병원 밥이 곧 도착할 시기다. 알람 시계가 따로 없다. 게다가 이런 부류는 침대에 적혀 있는 이름 석 자가 그의 처음과 끝이다. 어디 다른 병실 가서 손해보험 상담이라도 하는 걸까. 그들의 빈 침대를 보고 있으면 알뜰살뜰 바쁘게 살던 우리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우리 할아버지도 노년 스케쥴 근무로 우리 가족이 놀러 가면 거의 매일 집에 없었는데 명절이면 기가 막히게 아침 차례를 지내고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 집안 분위기가 클래식처럼 묵직하고 히터 바람처럼 방바닥으로 깔렸다.
이러쿵저러쿵 나열하고 보니 이들 모두를 상대해야 하는 간호사를 잊었다. 간호사를 얘기하자면 정말 극한 직업이란 생각밖에 안 든다. 내가 아는 수준에서 비유하자면 싸구려 쇼핑몰 반품 소비자를 상대하는 콜센터 직원보다 이천삼백 배 정도는 힘들다. 24시간을 3교대로 틀어막는 것에서부터 온갖 종류의 환자를 상대하고 이따금 들어오는 민원도 해결해야 한다. 그래도 이들에게 '미션 임파서블'이란 없다. 혹독한 위계질서 속에서 끝내는 전부 해낸다.
주변에 간호사 지인이 있어 그 힘든 생태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근데 전부 겉핥기였다. 그렇다면 과연 베트남전 람보 할아버지와 모든 임무를 수행하는 간호사가 대립하면 어떨까. 며칠간 이어진 궁금증에 하늘이 도왔는지 실제 이런 장면을 목격했다. 인슐린 주사를 맞지 않겠다는 람보 할아버지와 병원에서 가장 인상 좋고 심지어 막내인 간호사가 손을 밀고 당기며 실랑이를 벌였다.
무려 베트남전에서 전우를 등에 업고 날아드는 포탄을 피해 부대로 복귀한 뒤 머리에 ‘별’ 계급장을 딴 부대장을 향해 큰소리 뻥뻥 친 그 할아버지였다. 부연 설명이 길었다.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하는 왕년의 람보와 그걸 손에 든 막내 간호사의 전쟁은 1분도 안 돼서 끝났다. 온갖 핑계를 대던 할아버지는 손을 내준 뒤 "아프다니까" 하면서 어린아이처럼 훌쩍였다. 나는 람보에게 막대사탕 아니 믹스커피를 한 잔 타서 건네고 싶었다. 비로소 한 세대가 흘러 완력은 다른 곳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처럼 입원 생활을 포함하면서 그간 쓰던 잡문들 대신 먹고 싶은 음식을 토막처럼 쓰게 됐다. 게딱지 비빔밥, 한우불고기 버거, 메로나에 쏘맥, 참치 무한리필에 청하, 문 닫기 직전 마트의 떨이 오리고기, 참치마요덮밥, 떠먹는 피자 등등 구체적이다. 군대 훈련소 시절에도 이런 건 해본 적이 없는데 왜 이러고 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누가 뭐 먹자고 하면 "아무거나 먹자"라고 습관적으로 말해왔는데 돌아보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그 아무거나였다. 퇴원 후 언제 그런 게 먹고 싶었냐는 것처럼 지금도 냉장고를 아무렇게나 뒤져 아무거나가 된 초코파이에 흰 우유를 홀짝이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구성은 람보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했던 조합이었다. 람보 할아버지는 오늘도 인슐린 주사를 맞았는지. 맞고 또 엉엉 울었는지. 심지어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인 간호사가 대거리 할 상대조차 안 되어 또다시 막내 간호사에 손을 찔렸는지. 아프다고 눈물이 차올라서 고개를 든 순간 누가 믹스커피는 타줬는지. 상념 속에 그렇게 가을이 가고 바람이 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