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소설) 5월 18일

by 반동희

아버지는 책을 많이 읽어서 죽었다. 머리가 비상해서 선생님 말씀만 잘 들으면 훌륭한 사람이 될 거였다. 그런데 쓸데없는 책을 찾아다니고 거기서 이상한 걸 배워 일찍 떠났다. 책은 아버지에게 엄한 걸 알려줘 죽음을 재촉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 꼬박 1년이 다 되어 할머니는 아버지 방을 정리하며 이렇게 푸념했다. 멀쩡하던 할머니가 내뱉은 마지막 말이었다.


할머니의 시간은 일찍이 멈췄다. 표면적으론 치매가 할머니의 시계를 거꾸로 돌렸다. 아버지 방을 정리하고 얼마 뒤 할머니는 자기 아들 정열이가 17살이던 시절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나를 20살에 낳았고 26살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보다 1살 많았던 어머니는 꽃다운 나이에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나를 낳고 부탁한다며 집을 나갔다.


그렇다면 할머니에게 손주인 나는 무엇인가. 사실 질문 거리도 안 된다. 지금 할머니 세상에선 하나밖에 없는 17살 아들 정열이가 곧 나다.


이를테면 할머니는 내가 책상에 앉아 책이라도 읽으면 엄한 짓 하지 말고 밖에 나가서 뛰어 놀라며 뒤통수를 친다. 분명 할머니는 거실에서 멍하니 티브이를 보고 있었는데 언제 왔는지 그렇게 다가온다. 그때 할머니의 손 힘은 정말로 세서 나는 머리의 얼얼함이 떨어질 때까지 매만지지만 달리 대꾸할 말이 없다.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 신정열은 죽었으되 나와 내가 사는 세상에서만 죽었다. 그 현실에 할머니는 없다. 신정열의 어머니 박막례에겐 홀로 애지중지 키워 영원히 나이 먹지 않는 17살 고등학생 신정열이 있다. 그 안에서 아버지 신정열 역할을 하는 나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17살이었고 내년에도 그럴 것이다.


아버지가 정말 책 때문에 죽었는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아버지가 찾아 읽은 책이 가르친 세상과 할머니가 말하는 ‘선생님 말씀만 잘 들으면’에 따라 당시 선생들이 가르친 세상이 뭐가 달랐는지도 정확히 모른다.


할머니가 아버지 방을 정리할 때 나는 8살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아버지 방을 치울 때 뒤에서 막대사탕을 빨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 방에는 책이 많았다. 하지만 무슨 책들이었는지는 막대사탕보다 내게 관심 없는 주제였으므로 지금도 나는 책 제목을 기억하지 못한다.


할머니는 아버지 방에서 꺼낸 책들을 마당에 쌓아 놓고 몇 차례 나눠 불을 질렀다. 그때 할머니의 등에선 어린 나도 천진난만하게 접근하기 어려운 화가 서려 있었다. 할머니는 불타는 책 더미를 보며 “선생님 말씀만 잘 들었으면”이라고 중얼거리다가 울었다.


1980년 5월 광주였다. 아버지는 늦게 들어간 대학의 복학생이었다. 그날은 5월 18일 시작된 비극의 한가운데를 지난 5월 24일이었다. 아버지는 우측 늑골 하부에서 좌측 늑골 하부를 관통하는 총상을 입었다. 5월 18일을 일으킨 발포 명령자가 여태 불분명하다고 세상은 떠들던데 아버지의 늑골을 쏜 총의 발포자도 끝내 찾지 못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신문과 티브이는 시간이 흘러 역사적 죽음이라고 떠들었다. 물론 ‘역사적 죽음’으로 눙쳐지는 수많은 젊은이의 희생 속에 아버지도 이름 없는 대학생으로 담겼다.


익명의 죽음은 거시적으로 ‘역사’에 담겨 칭송받을 수 있었지만 남겨진 당사자의 시선에선 그런 테두리에 담기 힘든 비극이자 세상의 종말이었다. 할머니의 공감각도 그렇게 종말을 맞아 생물학적 삶만 남았는데 그 결과가 죽기 오래전 17살 정열이를 제멋대로 가둔 변종 형태로 계상됐다.


17살 아버지는 호두과자를 좋아했던 것 같다. 할머니는 지금도 내게 어디서 사 왔는지 모를 호두과자를 먹으라고 건넨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무미건조하게 말한다. 정열아 좋아하는 거 사 왔다. 먹어라. 아버지 묘비에서도 할머니는 간단했다. ‘고이 잠들어라.’ 할머니가 왜 그렇게 간략하게 묘비명을 적었을까. 그것은 또 다른 분노의 표현이었을까.


나는 이제야 그때의 5월이 어땠는지 아는 나이가 되어 궁금하지만 역설적으로 물을 수 없는 처지가 됐다. 나는 할머니의 세상에서 17살 외아들 신정열이 되었으므로 그것은 성립할 수 없는 질문이며 할머니 세상에선 존재할 수도 없는 논제로 치워졌다.


그저께 티브이 뉴스에선 광주의 비극을 야기한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나왔다. 그의 일가족도 조명되어 티브이를 장식했다. 이렇게들 살고 있구나. 여러 생각이 겹쳤다. 17살 신정열이 존재하는 할머니의 세상에서 그와 그의 아버지는 어떻게 살까. 그 세상을 사는 할머니는 답을 알 터인데 애석하게도 신정열이 되어버린 나는 어떻게 물어야 그 답을 구할 수 있을까.


입안에 모래가 가득 찬 것처럼 까슬까슬했는데 마침 할머니가 내게 다가와 호두과자를 내밀었다. 정열아 좋아하는 거 사 왔다.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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