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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정혁 Dec 23. 2020

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갈 때

아내와 나는 그날을 하루 앞두고 눈이 오길 바랐다. 과학의 발전은 손 안에서 거의 모든 걸 해결하게 만들었으므로 무교인 우리는 본능적인 기도에 기댈 것이 아니라 곧바로 검색창에서 일기예보를 확인했다. 마침 예보에는 적설량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눈이 올 확률은 과반을 넘었다. 이대로라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제법 하얀 이불을 덮고 우릴 맞이할 터였다.


우리가 그토록 바란 화이트톤의 그날은 아이가 태어나는 날이었다. 아이 이름의 한자에는 흰 눈을 뜻하는 또 다른 한자와 같음 음이 예정되어 있었다. 출산일에 하늘에서 눈이 내리길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아이를 위해 바라면서 준비하고 실현되길 소망한 생애 첫 선물쯤이 되었다. 차 앞 유리에 덮인 소복한 이불을 걷어내면서 나는 분만실에서 움트는 생명과 맞이했을 때의 나를 상상했다.


“ㅇㅇ(태명)이 아버님 아이와 산모 모두 건강합니다.”


분만실 한쪽에서 손 모으고 웅크려 있는 나를 간호사가 낭랑하게 부른다. 나는 손등으로 이마에 땀을 닦은 뒤 엉거주춤 일어서 간호사에게 향한다. 간호사는 활짝 열린 분만실 문을 내 등 뒤에서 닫은 뒤 내 앞으로 아이가 있는 바구니를 보여준다. 나는 저 먼 옛날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그 할아버지와 그 할머니와 또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들로부터 전해진 내 유전자의 결정체를 맞이한다. 물론 이 아이는 내 아내의 저 먼 옛날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그 할아버지와 그 할머니와 또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들로부터 전달된 유전자도 오롯이 걸러 받아 내 눈앞에서 숨 쉬고 운다. 나는 생명과 유전과 우리 가족의 스토리북이 이쪽 페이지에서 저쪽 페이지로 넘어가는 바로 앞에 서서 애잔한 눈으로 아이를 쳐다본다. 그러면 아이는 나를 보며 응애 하고 우렁차게 울면서 자신이 살아있고 호흡하고 있으며 저 먼 옛날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시절부터 우리는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음을 주지 시킨다. 나는 저 먼 가슴 아래서 발현된 순도 백 퍼센트의 감동이 눈앞의 아이를 통해 메시지로 되돌아오는 것을 감각적으로 느끼며 눈물을 찔끔 흘린다. 결국 나는 아이에게 “내가 아빠야. ㅇㅇ아. 너무 반가워”라고 기억도 못할 말을 자동으로 쏟아내고 “산모는 건강하죠?”라며 간호사가 이미 알려준 말을 되물어 확인한다.


이런 상상 속에서 나는 자동차 유리에 담긴 축복과도 같은 타이밍의 눈을 쓸어냈다.


분만실로 운전해 가는 길은 아이유의 좋은 날과 같았다. 어쩜 이렇게 하늘은 더 파란 건지 오늘따라 왜 바람은 또 완벽한지 모를 정도로 황홀했다. 무섭게도 끼어드는 서울 운전자들은 그냥 모르는 척 못 본 척 지워버린 척 내가 아내에게 속사포로 내뱉는 설렘으로 전부 삭제되었다.


분만실 앞에선 시뮬레이션한 대로 이마에선 땀이 났다. 나는 두 손을 모은 채 문 앞 복도에서 한껏 웅크리고 충실한 관찰자처럼 분만실 문만 응시했다. 수만 가지의 혹시 모를 상황까지 위험 인자를 돌리면서 오가는 모든 사람의 순서를 머릿속으로 외우기도 했다.


“ㅇㅇ이 아버님 아이와 산모 모두 건강합니다.”


예상보단 다소 저음의 간호사가 나를 불렀다. 이제 나는 준비한 내 모든 기억을 복기해 당황하지 않고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면 될 터였다. 하지만 현실은 상상에 있지 않았고 실재의 그 상황에 담겨 차려졌다. 나는 저 먼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아득함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그저 “어어” 거리며 뒤뚱거리기 바빴다. 아이가 연출한 모든 첫 만남은 완벽했지만 내가 한 것이라곤 버벅거리며 기껏해야 어어 거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은 사실의 기록으로도 남았는데 아내와 나중에 돌려본 그 순간의 내가 찍은 영상엔 내가 어어 거리는 소리와 아이가 우는 것 외엔 아무 음성도 담기지 않았다. 심지어 간호사가 아이 손가락과 발가락 개수를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내가 그것 먼저 확인하라고 신신당부한 미션을 이행하지도 못한 실패자에 불과했다.


이것이 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순간이구나. 이것이 생명의 호흡이구나. 이것이 모든 각양각색 군상의 출발점이구나. 이것이 비로소 인생이라는 명징한 글자의 신호탄이구나. 이것이 비로소 인류의 역사를 설명하는 태초의 사실이구나. 나는 이런 하나마나한 생각들을 아이가 다시 분만실로 들어간 뒤 홀로 남은 복도에서 했는데 이런 자명한 것들은 전부 글로 배운 것들이어서 결국은 마주한 현실보다 뒤늦은 복습에 불과했다. 다시 질문을 확대할 수밖에 없었는데 도대체 읽어서 배우는 것들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읽어서 배운 것을 쓰고 요식 하는 행위란 무엇이란 말인가. 끝내는 애초에 분명한 사실적 현실을 살고 살아내면서 짬을 내어 글로 배우는 간접 학습들과 분석들이란 상념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인생무상이란 단어를 이제 막 태어난 아이 앞에서 내세우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나는 아이 울음을 보면서 글을 써서 밥을 버는 내 외길을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도대체 왜 쓰는가. 오래도록 자문된 이런 질문은 재차 부메랑으로 날아들어 밥을 위한 것 외엔 어떤 대체 점도 없다는 괴로움으로 파고들었다.


아이야 너는 부디 나와 다른 길이 있다면 한 뼘이라도 더 나은 그 길을 가렴. 세상은 책상 위 종이와 펜에 있지 않고 세상은 땅과 하늘 사이에 있으며 땅과 하늘 사이에는 머리로 표현되기에 앞서 눈으로 먼저 다가오는 실재들이 있단다. 아이야 부디 너는 읽고 쓰는 것을 알아야겠지만 그보다는 또 다른 이들과 말하고 듣는 것에 더욱 충실한 사람이 되어라. 네가 태어난 날은 귀신 같이 안 오던 눈이 하늘에서 내려왔고 또 네가 태어난 날을 기점으로 마치 그날의 눈이 축복인 것처럼 감쪽같이 그쳤단다. 아이야 어쩌면 좋니. 아이고. 아이고. 인생의 한 페이지는 그렇게 찰나에 넘어갔고 나는 뒤늦게 울었다. 아이야. 아이야. 나는 고작 어어거렸구나. 아이야.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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