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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정혁 Apr 10. 2022

(단편소설) 잿빛 관음증

잿빛 건물 사이로 햇살이 스몄다. 밤을 살아낸 불들이 다시 어둠으로 잠들었다. 사무실 빌딩들은 그 어둠을 살라먹으며 분주했다. 사람들은 바쁜 발걸음으로 도시를 도시답게 수놓았다.


관우는 일찌감치 출근해 마우스를 딸각거렸다. 모니터에 뜬 고객 명단을 보며 캔콜라를 들이켰다. '반려견 몽이의 심장사상충 접종일입니다' '반려견 꼬몽이의 3차 접종일입니다' 등의 안내 문자를 몇몇 고객에게 전송했다. 딸각이던 마우스 소리가 멈추자 관우를 둘러싼 도시 전체가 어둠을 지웠다. 창문을 통과한 햇살이 관우의 손등을 덮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연우가 긴 머리를 한쪽으로 쓸면서 들어왔다. 연우는 6개월째 관우의 동물병원에서 일했다. 연우가 하는 일은 흔히 동물병원 간호사라고 불렸다. 요즘은 '수의테크니션'이란 말이 사용되기도 했다. 관우는 동물병원 수익이 늘자 연우를 채용했다. 10여 장의 서류 중에서 관우가 연우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눈에 띄게 이력서 사진이 예뻤기 때문이다. 관우는 연우를 최종 면접에 불러 "근거리 거주자라는 장점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오래 근무하실 수 있는 분이라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관우는 입이 보통 사람보다 조금 더 길게 가늘어지는 연우의 웃음을 발견했다. 그 특유의 웃음은 섹시하기도 하고 이따금 살기가 느껴질 정도로 독해보이기도 했다. 관우는 그 웃음을 볼 때마다 자신이 연우를 채용한 이유를 되뇌었다. 이상형인 여우상의 섹시한 외모 덕분이란 사실을 상기했다.


'연우 씨, 오늘 문자는 3건만 보냈거든요. 전부 접종인데 약 종류는 메일로 보냈으니 확인하고 준비해줘요.' 관우는 연우에게 업무 지시를 메신저로 보내 놓고 병원 밖으로 나갔다.


병원 앞 대로엔 벌써 차들이 가득했다. 관우는 거의 매일 이 시간에 대로에 나왔다. 대개 오전 9시부터 10시 사이였는데 관우는 이 시간을 좋아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오가는 차들을 보며 관우는 강남이라는 도시가 품은 현상을 음미했다. 요일과 상관없이 이 시간엔 자동차와 사람들이 뒤엉켜 호흡했다. 사람들이 산소를 들이마셔 이산화탄소를 내뱉는 동안 자동차도 연료를 들이마셔 배출가스를 뿜어냈다. 지하철 출구는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사람들을 토했다. 그들 옆으로 줄지어선 나무들은 살랑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는 듯 존재했다. 관우는 이 도시의 배설물이 합쳐지는 장면을 보며 실험용 쥐가 호흡 곤란으로 헐떡거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면서 물끄러미 실험용 쥐를 바라보는 실험자를 생각했다. 나는 실험용 쥐인가? 아니면 실험자인가? 그러한 물음을 이따금 던졌지만 거의 매번 실험용 쥐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다.


실험용 쥐로 우울할 때 관우는 길거리 여자들을 구경했다. 그쯤 돼야 관우는 실험용 쥐가 아닌 실험자가 된 것 같았다. 강남이 다른 도시와 가장 차별화된 게 여자들 옷차림이라고 관우는 생각했다. 단정한 정장 차림의 여자부터 짧고 타이트한 원피스에 화려한 장신구로 포인트를 준 옷차림까지 다양했다. 때로는 튀거나 때로는 난해한 패션이었다. 관우는 매일 병원 앞에서 이런 관찰을 하며 캔콜라를 마셨다.


"혹시 예약 들어온 것 있나요?"


관우는 병원으로 들어가 연우에게 물었다.


"오후에 2건 심장사상충 접종 들어왔는데 이 손님들은 알림 문자 받고 오는 분들이고요. 내일 오후 4시쯤에 3차 접종하러 오겠다고 하는 분 한 분 계셨어요."


출근 후 렌즈를 빼고 뿔테 안경을 쓴 연우가 대꾸했다. 관우는 흰 가운 안에 타이트한 검정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몸매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관우는 부유한 집에서 컸다. 관우 아버지는 대기업 임원이자 워커홀릭이었다. 아버지는 북한 실향민인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런 아버지에게 근면성실이란 곧 일터에 나가 버티고 있는 시간이었다. 관우의 어머니는 미술 학원을 운영했다. 부잣집 딸로 자란 관우 어머니는 시대를 앞선 커리어우먼이었다. 결혼 전 프랑스 유학 경험을 살려 관우를 가졌을 때부터 미술학원을 차려 운영했다. 사회적으로 보면 관우는 전형적인 '강남 키즈'였다.


강남에서 태어나 돈 많은 부모 밑에서 경제적 어려움 없이 컸다. 대다수 그 시절 그들이 그렇듯 관우네 부모 역시 시간의 부재를 사교육으로 메웠다. 관우는 동네 아이들이 그런 것처럼 학교 끝나자마자 이 학원 저 학원을 뺑뺑 돌며 해가 질 때까지 온갖 지식을 머리에 넣기 바빴다. 관우는 어린 시절을 누가 물을 때마다 "딱히 할 것도 없어서 집에서 시키는 공부를 했다"고 둘러댔다. 그때 관우는 아무도 없는 넓은 집에 들어가는 게 학원에서 꾸역꾸역 앉아있는 것보다 싫었다. 혼자 먹는 밥은 둘째고 밤늦게 혼자 잠들어야 하는 시간도 있었는데 그땐 정말 끔찍했다.


그러다 손에 넣은 게 컴퓨터였다. 당시 막 보급되던 386 컴퓨터를 아버지가 집에 들이면서 관우의 삶도 달라졌다. 아버지 어머니가 집에 없는 시간은 관우가 컴퓨터를 만지는 시간이었다. 1년 2년 시간이 흐를수록 관우의 컴퓨터 사용 시간은 증가했다. 부모님 모두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면서 더 바빠졌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관우가 눈이 뻑뻑해서 지쳐 쓰러질 때까지 아무리 컴퓨터를 해도 부모님은 집에 오지 않았다. 그렇게 386 컴퓨터는 486 컴퓨터로 업그레이드됐으며 486 컴퓨터는 펜티엄 컴퓨터가 됐다. 도스에서 윈도우 시대로 넘어가면서 관우도 까까머리 시절을 지나 대학 입학이란 테이프 커팅을 했다.


퇴근 후 관우는 모니터에 앉았다. 그는 두 대의 모니터도 모자라 얼마 전 네 대의 모니터로 책상을 꾸몄다. 네 대의 모니터 양 옆으론 작은 태블릿 두 대를 뒀다. 총 여섯 대의 크고 작은 스크린이 책상 위에서 깜빡였다. 마치 증권사 사무실 같았다.


"1번 수면. 2번 일상. 3번 외출. 4번. 4번?"


관우는 눈을 크게 떴다. 모니터를 재차 봤다. 마우스 휠을 돌리며 화면을 재탐색했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화면은 그대로 어두웠다. "4번이면 향이네. 뭐야." 관우는 혼잣말을 하며 태블릿 앞에 있는 캔콜라를 들이켰다. 그때 집에서 기르는 반려견 콩이가 방문을 밀고 들어왔다. 그리곤 훌쩍 뛰어 책상 의자에 앉은 관우 무릎으로 뛰어다. "콩아, 향이네 왜 저러지? 카메라 갈아줘야겠다." 반려견이 코를 킁킁대며 관우의 무릎 냄새를 맡았다. "콩아, 가만있어봐. 향이네 주소랑 비밀번호 좀 확인하자." 관우는 왼쪽 태블릿을 만지작거렸다. 관우는 다시 캔콜라를 마셨다.


다시 잿빛 건물 사이로 햇살이 스몄다. 도시의 불빛들이 근무 교대를 했다. 밤사이 켜졌던 네온사인이 몸을 숨겼다. 그 자리를 오피스 형광등이 대신했다. 사람들은 다시 바쁜 발걸음으로 도시를 분주히 누볐다. 도시의 가쁜 호흡과는 상관없다는 듯 지하철 출구는 오늘도 사람들을 토해냈다. 건물 사이사이를 통과하던 햇살은 관우의 동물병원 창문을 통과해 모니터를 비췄다.


"좋은 아침이에요."


연우가 출근했다. 연우는 무릎을 덮는 베이지색 스커트에 흰색 블라우스를 차려입고 나왔다. 연우는 덜 마른 머리를 연신 쓸어 넘기며 은은한 향수로 관우의 코끝을 간질였다. 관우는 하루의 시작을 연우의 향기에서 확인했다.


"연우 씨, 오늘 4시에 3차 접종분 확인해줘요. 왜 그 있잖아 어제 연락 오신 분. 그리고 점심시간쯤 향이네 연락해서 관절 영양제 투입 있다고 말씀드려요. 진단은 빠를수록 좋다고 해서 일정 잡고요. 난 오늘 외부 일정이 있어서 좀 나가요."


관우는 상냥하게 대꾸한 뒤 업무 지시를 했다.


"콩아, 향이네 다시 보자."


관우는 자신을 반기는 반려견을 안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마우스를 툭툭 건드리자 모니터가 전부 켜졌다. 1번 모니터를 봤다. 반려견과 주인이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그렇지, 지금 시간엔 한창 놀아야지. 출근 전엔 머리를 비워야 한다고."


관우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모니터 속 여자는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왼쪽으로 누워 TV를 봤다. 옆에 있는 반려견은 그녀의 품에 안겨 배를 까고 고개만 이리저리 돌렸다.


"늘씬하긴 정말 최고로 늘씬하다니까."


2번 모니터에선 여자가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커다란 벽걸이 TV에서 나오는 동작들을 따라 했다. 엉덩이를 뒤로 쭉 빼는 스쿼트부터 큰 짐볼을 이리저리 올라타는 운동까지 다양한 동작을 했다. 관우는 모니터 속 그녀의 몸매 곡선을 훑었다. 옆에선 그녀의 반려견이 커다란 막대 뼈를 물어뜯고 있었다.


"사간 지는 한 사흘 된 것 같은데 이제야 줬나 보네."


3번 모니터에선 거실에 아무도 없었다. 관우는 침실 쪽을 봤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가 남자와 같이 누워있었다. 반려견은 그들 발밑에서 옆으로 누워있었는데 아마도 자는 듯했다. 누워있던 남자와 여자는 서로 껴안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결국 그들은 알몸이 됐다.


"아직 점심도 안 됐는데 저러냐. 하긴 쟤들은 지금이 밤이지."


관우는 캔콜라를 들이키며 흥미롭다는 듯 지켜봤다. 모니터 볼륨을 높이자 여자와 남자의 대화가 들렸다. 관우는 재빨리 동영상 저장 버튼을 눌러 녹화를 했다.


"콩아, 쟤네 너무 뜨거워서 콜라가 다 끓을 지경이다."


관우는 다시 캔콜라로 목을 축였다.


4번 모니터엔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지지직거리는 화면이 이따금 번졌다. 그런데 오늘은 그것마저 없었다. 검은색 어둠이 모니터를 뒤덮었다. 관우는 가슴이 답답했다. 4번 모니터는 숫자 순차에 따라 마지막에 연결한 화면이었다. 그건 곧 신선함을 의미했다. "콩아, 에이스가 말을 안 듣는다. 완전 신입인데. 남자를 만나는지 운동을 하는지 TV를 보는지 전혀 서치가 안 돌고 있어. 소리도 안 나오고 이거 완전 아사리네. 향이도 일을 안 해. 일을."


관우는 다시 한번 캔콜라를 들이켰다. 반려견은 옆에서 관우의 발을 킁킁거렸다.


어둠이 밀려나자 도시가 분주해졌다. 그만큼 관우의 마우스도 빨라졌다.


"안녕하세요."


동물병원 문이 열렸다. 관우의 눈이 빠르게 돌아갔다. 관우는 이미 30분 전부터 원장실 문을 열어 현관 시야를 확보하고 있었다. 웨이브 파마를 한 머리의 여자가 흰 새끼 강아지를 안고 들어왔다. 큰 눈에 흰 피부가 유난히 돋보였다. 몸에 비해 큰 가슴과 잘록한 허리는 스웨터 안에서도 돋보이는 라인을 자랑했다. 딱 붙는 청바지와 대비된 헐렁한 듯 편해 보이는 흰색 단화가 대비됐다.


"전화 주신 분이죠? 달콤이 견주님?"


"네. 3차 접종이요."


연우의 물음에 여자가 배시시 웃었다. '5번, 5번, 5번'이라고 관우는 속으로 외쳤다.


"이쪽으로 오시죠." 대화를 듣던 관우가 원장실에서 나서며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여자는 눈을 아래위로 까딱하다가 고갯짓 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관우는 다시 원장실로 돌아가 안쪽에 있는 약 제조실로 들어갔다. 그리곤 준비한 것들을 하나하나 체크했다.


"컴퓨터 가지고 게임만 하지 마라. 그렇게 매일 남들이 만들어 놓은 판에서 놀면 뒤치다꺼리밖에 못해. 직접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명심하고 이리저리 만져라."


관우가 386 컴퓨터를 받았을 때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관우한테 베이식 책과 도스 책도 같이 줬다. 그건 곧 컴퓨터를 하더라도 게임만 아니면 얼마든지 해도 된다는 무언의 허락이었다. 워커홀릭 아버지는 압축해서 말하는 걸 좋아했다. 관우는 항상 그 뜻을 파악해 움직여야 한다는 걸 어린 시절부터 깨달았다. 그건 맞벌이 부모님과의 시간 절약이자 효율적 대화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뜻에 의하면 한 발 더 들어가서 생각하는 점진적 사고였다.


그때부터였다. 관우는 게임을 원 없이 하다가도 이따금 프로그램 언어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말 그대로 건드리는 수준이었다. 간단한 계산기 프로그램을 만들어보고 때로는 친구들의 이름 획을 조합해 좋아하는 이성과 이름 점을 봐주는 데에 활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관우는 부모의 빈자리를 컴퓨터로 채우며 몰입 단계를 넘어 탐닉에 이르렀다. 관우는 대학시절 컴퓨터 공학과를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곧 부모에 대한 배신이었다. 차선책으로 관우는 어머니 뜻에 따라 수의학과를 갔다.


관우는 대학 시절 자동 수강신청 프로그램을 홀로 만들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을 수강 시천 기간에 돌리면서 경쟁이 치열한 수업을 창이 열리자마자 자동으로 취득할 수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아침부터 일어나 PC방을 가거나 랜선을 붙잡고 가슴 졸일 때 관우는 TV를 보고 있거나 한쪽에 수강신청 프로그램을 돌려놓고 게임을 하고 있었다. 어떨 때는 친구들이 간절히 원하는 과목의 수강 신청 요구를 그 프로그램으로 들어주고 술이나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관우는 스마트폰이 나오며 새 판이 짜일 때 쾌재를 불렀다. 모바일 시대가 열리자 GPS를 기반으로 한 위치 파악에 주목했다. 관우는 GPS로 사람의 움직임을 파악한다는 것이 특정 세상을 자기 손바닥 안에 넣을 수 있는 것과 같다고 여겼다. 관우는 위치 파악에 더해 소형 스피커와 녹음 기능을 자신의 프로그램 언어로 조합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꿰찬 게 공대 친구의 도움을 받아 이걸 상대방 몰래 넣을 수 있는 '소형 칩'으로 발전시키는 거였다. 위치 파악을 강남구로 세밀히 좁히니 번지수와 다닥다닥 붙은 주거지의 호수까지 파악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 안에 스피커 기능을 넣어 현장의 소리를 채집하는 것도 가능했다.


행운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수의사 생활이 손에 익을 때쯤이었다. 반려동물등록제가 탄생했다. 2014년부터 시행된 이 법은 태어난 지 3개월이 지난 반려견의 등록을 의무화했다. 위반자는 과태료를 물어야 했다. 반려견 인구 1000만 시대에 버려지는 강아지가 많아 시행하는 정책이라고 정부는 홍보했다. 관우는 머리를 빠르게 돌렸다. 예방접종과 중성화 수술을 할 경우 무료 등록을 해주겠다고 병원에 크게 써 붙였다. 특히 1인 가구가 많은 강남구가 타깃이었다. 원룸가를 중심으로 홍보 전단지를 대규모 뿌렸다. 잃어버린 강아지와 슬픔을 강조한 뒤 '애견칩'은 절대 부작용이 없다고 설파했다. 더러 강아지 몸에 넣는 칩 대신 목에 거는 외부 인식표를 선호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때 관우는 데려온 견주를 보고 판단했다. 판단 기준은 단순했다. 견주가 여성이고 관우 자신이 좋아하는 외모면 어떻게든 내부 칩으로 유도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특별히 우리 병원 오는 아이들을 위해 초소형 칩을 쓰거든요."


관우는 입술을 앙다문 채 눈만 웃으며 견주한테 말했다. 조제실에서 얼굴만 내놓은 관우는 말을 한 뒤 견주의 표정을 살폈다.


"안 그래도 잘해주신다고 해서 왔어요. 같이 일하는 언니가 추천을 해줘서."


견주가 웨이브 파마가 들어간 머리를 오른쪽으로 쓸어내렸다. 왼손으로는 강아지의 등을 만졌다. 여자 견주는 이미 연우와 통화에서 3차 접종을 하는 동시에 애견 등록까지 하기로 합의했다. 3차나 4차 접종 때 보통 애견 등록을 하는데 이 동네에서 개를 사랑하고 가장 안전하게 진료하기로 소문난 병원이니 이참에 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연우가 말했을 것이다. 그런 연우의 말에 견주가 동의했음이 분명했다.


"네, 가끔 부작용이 있다느니 하면서 왜곡된 보도를 하는 언론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강남구 같이 사람 많고 이런 곳에선 외부에 인식표 달아봤자 끊어질 염려도 있고 크게 안전하지 않아요. 애기 이름이 달콤이라고 했나요?"


관우는 이렇게 대꾸하고 다시 조제실로 고개를 넣어 몸을 숨겼다. 커튼 너머로 "예. 잘해주세요"라는 목소리가 관우에게 들려왔다. 관우는 자신이 만든 스피커 기능을 입힌 칩을 알코올로 닦았다. 뒷면에 연결된 GPS 단자를 매만지며 집에 있을 모니터를 떠올렸다. '4번이 밀려나고 당분간 네가 4번이 되겠네.' 관우는 이렇게 생각하며 밖에 있는 여자의 사생활과 알몸을 상상했다. 오후 4시에 트레이닝 복을 입고 비교적 화장기 옅은 얼굴로 온 여자였다. 차트에 적힌 주소를 보니 병원에서 가까운 원룸가에 살았다. 그 집 앞으론 유흥가가 즐비했다. 게다가 여자는 언니의 추천을 받고 왔다고 했다. 여자가 유흥업소에 종사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4번 모니터는 여전히 검은색이었다. '달콤이네'를 후보로 포섭했으나 여전히 관우에게 4번은 향이네였다. 관우가 4번 모니터에 향이네를 연결한 이후 온종일 그 집을 들여다보지 못한 건 처음이었다. 관우는 향이네 그녀가 그리웠다. 유난히 짙은 검은색 머리에 항상 은은한 향기를 내뿜던 그녀였다. 모니터 속에서 그녀는 향이한테 혼잣말을 자주 했다. 관우는 그게 잠재의식에서 싹트는 외로움 해결법이라고 정의했다.


관우는 그녀가 처음 병원에 와 반려견 향이한테 1차 접종을 하던 날부터 4번 모니터로 그 집을 낙점했다. 단발머리와 유난히 긴 그녀의 눈에 관우는 반했다. 그날 관우는 향이한테 애견칩을 넣은 뒤 집 주소부터 확인했다.


그 뒤엔 컴퓨터에 연결된 향이 애견칩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를 통해 그녀가 집에 들어갈 때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를 확인하고 원격 녹음했다. 그리곤 그 집 비밀번호 장치와 같은 제품을 샀다. 제품을 풀자마자 몇 번이고 눌러보며 비밀번호와 같은 음 몇 4개를 마침내 추렸다. 어느 날인가 그녀가 병원 방문을 예약했을 때 관우는 의도적으로 그 시간에 자리를 비운 뒤 그 집에 가서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렇게 그녀의 집 비밀번호를 풀자마자 관우는 여느 집에 그랬던 것처럼 집에 있는 전신 거울, 신발장 틈, 침대 밑, 싱크대 찬장 위, TV셋톱박스, 냉장고 밑, 화장실 좌변기 아래 수압 조절밸브에 재빠르게 몰래카메라를 설치했다. 불법 기기 판매로 전락한 용산 뒷골목과 인터넷 카페에서 소형 몰래카메라를 구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기술의 발달은 전신 거울이나 유리 뒤편에 붙인 소형 몰래카메라를 육안으로 파악하는 걸 막았다. 사람이 직접 손으로 그곳을 민감하게 훑어서 뭔가 까슬한 느낌을 갖기 전에는 소형 몰래카메라를 확인하기 힘들었다. 지름 1mm에 이르는 단추 구명만 한 소형 몰래카메라가 그렇게 관우와 여자의 사생활을 이어줬다. 관우는 1번부터 3번까지의 관음증을 이러한 기술로 완성했다. 그런데 그런 기술을 뚫고 4번 모니터가 들어오지 않자 매우 갑갑함을 느꼈다.


4번 모니터는 그렇게 사흘째 들어오지 않았다. 관우는 새로 선을 연결한 달콤이네를 우선 태블릿에 연결했다. 여자는 예상대로 밤에 출근해 아침에 비틀거리며 집으로 들어왔다. 반려견 달콤이는 그럴 때마다 여자의 무릎을 두 다리로 긁으며 반겼다. 여자는 대충 몇 번 강아지를 쓰다듬은 뒤 침대로 들어가 뻗었다. 관우는 으레 당연한 것을 본다는 듯 딱히 태블릿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4번 모니터만을 골똘히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찾아가서 확인해 봐야 할까. 그런데 진짜 문제는 비밀번호를 열었을 때다. 만약 집에 여자가 있으면 어떡하나. 그 경우 완전히 이 모든 범죄 행각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가. 풀 수 있는 방법은 뭔가. 관우는 사흘째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선생님, 요즘 부쩍 뭔가 고민하시는 시간이 많으시네요."


연우가 퇴근하려는 듯 병원 입구 전신 거울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관우는 빨간 스커트를 입은 그녀의 볼륨 있는 엉덩이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에 헬스클럽을 끊었는데 아직 적응이 안 됐나 봐요. 피곤해서인지 자꾸 멍하네."


관우는 대충 얼버무렸다.


"혹시라도 고민 있으면 언제든 털어놓으세요. 털어놓고 얘기하고 하다 보면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까요?"


연우는 특유의 웃음으로 대답했다.


4번 모니터가 일주일째 검은 화면일 때 관우는 결심했다. 그 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계획은 다시 원점에서 확장했다. 감시 대상인 향이네 주인에게 문자를 보내달라고 연우에게 얘기해다. '향이의 심장 사상충 예방 접종일이 다가왔습니다. 시중에서 파는 약이 아닌 이번에 새로 직수입해 들여온 약입니다. 기존 접종 고객 대상 30% 할인가만 받습니다'라고 문구는 자신이 직접 썼다. 1시간쯤 지나자 연우가 "향이네 주인이 오후에 병원을 방문하겠다네요"라고 알려줬다.


관우는 잠가둔 책상 제일 아래 서랍을 열고 소형 몰래카메라를 확인했다. 다섯 개 정도 여유가 있었다. 관우는 다시 향이네 집에 들어가 모든 몰래카메라를 다시 붙이고 나오기로 결심했다. 모든 게 처음이라는 생각으로 계획을 재차 가다듬었다.


"만약 견주님들 오시면 30분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 나한테 바로 문자 줘요. 요즘 계속 두통이 심하네. 집에 좀 있을게요."


관우는 연우한테 이렇게 둘러대고 동물병원을 나섰다. 향이네 집 근처로 가 그 집주인이 집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거울에 붙일 카메라와 침대 밑에서 사선으로 안방 벽을 관찰할 소형 몰래카메라까지 미리 각도를 머릿속에 그렸다. 이미 집 구조를 알기에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관우는 직감했다. 이론상으론 향이 몸에 있는 GPS 작동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관우는 판단했다.


'선생님, 향이 견주님 오셨는데요.'


휴대폰 문자가 온 건 집 앞에 숨어 있은 지 40분쯤 지난 뒤였다. 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도 그 집 건물에서 밖으로 나온 사람은 없었다. 향이네 그녀가 병원에 왔다는 게 관우는 이상했다. 하지만 관우의 조급함은 합리화를 선택했다. 관우는 자신이 잠깐 담배 피우거나 핸드폰을 만지작거렸을 때 나왔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이미 집을 떠난 지 꽤 되어서 어디 다른 곳에 있다가 병원으로 갔을지도 모른다고 단정했다.


그렇게 보면 집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은 게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사실 가장 최선은 향이 몸에 있는 GPS를 확인하는 거였다. 그런데 그건 집에 있는 모니터로만 확인 가능했다. 스마트폰으로의 연결은 관우 계획에 애초부터 없었다. 관우는 누구를 만나거나 혹여 술에 취해 흐트러졌을 경우 휴대폰에 그러한 장치가 누군가에게 들킬 수도 있다고 늘 생각했다. 관우에게 GPS와 소형 몰래카메라의 조합은 오로지 집에서만 즐기는 은밀한 사생활 뺏기 사생활이었다.


"제가 30분 안으로 간다고 좀 말해줘요. 죄송하다고 하고요."


관우는 간단하게 연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리곤 재빠르게 원룸 출입구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띠! 띠리띠! 띠띠띠! 띠띠! "출입문이 열렸습니다." 입구 비밀번호 풀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강남 원룸가 대다수 공동 현관문 비밀번호는 바뀌지 않았다. 배달원과 택배 기사들을 위한 배려이자 거의 집에서 잠만 자는 사람들이 그런 것까지 서로 상의하며 바꿀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302호. 302호. 관우는 혼자 중얼거리며 계단을 한달음에 올라갔다.


"사구육팔칠이삼하나."


관우는 혼자 중얼거리며 비밀번호를 눌렀다. 꾹꾹 터치패드를 눌렀다. "띠리리릿!" 현관문이 열렸다.


집은 냉기가 가득했다. 겨울이라 그런지 더욱 차가웠다. 보일러를 최소 나흘 정도는 돌리지 않은 것 같았다. 양말을 신고 있었지만 바닥은 얼음장이었다. 작은 거실 하나에 큰 안방 하나가 있는 1.5룸인데 방문이 닫혀있었다. 부엌에는 소주병과 맥주병이 나뒹굴었다. 병 주변에 술 방울이 떨어져 있는 걸 보니 바닥에 흘린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관우는 여자가 술 마시는 게 일일 텐데 어째서 집에서까지 먹는지 의아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말린 육포나 과자 같은 간단한 안주조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단 한 번도 4번 모니터에서 여자가 술 먹는 장면을 본 적이 없어 관우는 더 이상했다. 그때였다.


"이 새끼가."


"아악."


관우가 눈을 떴을 때 그의 몸은 식탁 의자에 묶여 있었다. 정신을 차리며 두리번거리니 향이네 그녀의 집 안방이었다. 아직 그 집에 있는 거였다. 관우는 머리를 흔들며 상황을 정리했다. '내가 이 집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향이네 그녀가 술 마신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부엌과 거실에 술병이 나뒹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안방 문을 열었다. 그러자 갑자기 묵직한 것이 내 뒤통수를 쳤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는데 정신을 차렸더니 이렇게 묶여있다. 시간은 느낌상으론 몇 시간 흐른 것 같다. 정확히 모르겠다. 창밖에 암막 커튼이 쳐져 있어서 밖이 환한 지 어두운지는 알 수가 없다.'


관우는 낯선 공포에 이를 맞부딪혀 떨었다. 추위도 한몫했다. 바닥의 냉기가 그대로 올라와 온몸을 휘감았다. 도대체 누가 날 묶었는가. 때린 사람이 날 묶은 건가.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디 있나. 아니다. 그전에 그 사람은 날 왜 묶었나. 혹은 왜 때리고 묶었나. 혹시 내가 4번 모니터로 이 집을 감시했다는 걸 알고 있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뒤통수가 얼얼했다. 꼭 담에 걸린 것처럼 단단히 뭉쳐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목이 답답했다. 아픈 면적으로 봐선 분명 야구 방망이보다는 넓은 면적의 무엇인 듯싶었다.


"일어났나?"


음성이 들렸다. 사람은 없었다. 천정에서 소리가 났다.


"여기야. 위에 위. 머리 위. 블루투스 스피커 안 보여? 그런 거 잘 알면서 선수끼리 왜 이래."


천정 위에 작은 스피커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곳에서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4번 모니터를 찾나?"


굵은 음성의 질문에 관우는 몸이 더 얼어붙었다.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이 자는 누군가. 뭘 어디까지 알고 있나. 의문이 솟구쳤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르는 법이지. 넌 3번에서 만족해야 했어. 4번이 끝인지 5번 6번이 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너의 최대치였어."


굵은 음성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관우는 듣기 싫었다. 몸서리쳤다. 그러나 몸을 옥죄고 있는 줄은 너무도 단단했다. 힘만 빠질 뿐이었다.


"혼란스럽겠지만 지금 딱히 네 대답은 의미가 없어. 그냥 지금은 두 가지 선택만이 있을 뿐이야. 모니터들이랑 GPS 전부 반납하고 사는 것이 하나야. 아니면 모든 증거물을 경찰에 제출하고 재판을 받는 법도 있지. 둘이야."


굵은 음성은 자세한 설명을 이었다. 관우는 땅을 보며 듣기만 했다.


"증거물 재판은 걱정할 것 없어. 내가 클릭 한 방이면 깡통 계정 이메일로 경찰서에 쏴버릴 수 있거든. 너의 모든 인적 정보까지 첨부해서."


관우는 쓴웃음이 났다. 그렇다면 이 스피커 작자는 내 모든 것을 이미 확보한 건가. 아마도 해킹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음만 먹으면 다른 모니터 정보도 쉽게 뺄 수 있었을 텐데 나를 이 지경까지 몰고 있는가. 혹시 즐기고 있는 것인가.


관우는 1번 모니터 이전에 연우에게 실험했던 걸 떠올렸다. 관우는 연우를 채용하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그녀가 항상 작은 껌통을 핸드백에 넣고 다닌다는 걸 알았다. 관우는 이를 실험에 활용하기 위해 GPS를 작은 껌통에 붙여 연우가 갖고 다니는 껌통과 바꿔치기했다. 1번 모니터 확보에 앞선 일종의 실험이었다. 그렇게 연우의 집 비밀번호를 알아 들어갔을 때 혼자 산다던 연우네는 남자의 흔적이 곳곳에 있었다. 취업을 빌미로 그녀를 어떻게 해보려던 관우의 계획은 그날 물거품 됐다. 관우한텐 지금이 딱 그때의 심정이었다.


"왜 나를 이렇게 협박하죠? 당신을 모르지만 이 정도 해킹이면 전부 그냥 빼 갈 수도 있었을 텐데요." 관우는 다 내주고 경찰서행만은 피하자는 결정을 내린 뒤 대꾸했다.


"몰래 뺏는 것과 알면서 뺏는 것은 다르지. 빼앗는 것과 거래를 하는 것도 달라. 혹은 살살 꼬셔서 빼앗기기 싫어하는 걸 빼앗는 것도 다르고. 넌 그 모니터들로 여자들을 빼앗은 거야. 몰래 그들의 생활을 뺏으면서 점점 더 그걸 탐닉해나갔던 거고."


굵은 목소리의 음성에 관우는 힘이 빠졌다. 굵은 목소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재빨리 말을 이었다.


"난 빼앗은 자를 굴복해 그가 빼앗은 것을 빼앗는 걸 즐기지. 권력 위의 권력 혹은 힘 위의 힘이야. 넌 시간이 갈수록 한없이 작아짐을 느껴야 해. 정당하게 취하지 않은 걸 더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빼앗겼을 때의 그 서러움에 나중엔 서러운 후폭풍이 몰려올 거야."


굵은 목소리는 준비한 말이라는 듯 말을 척척해냈다.


관우는 집에 있는 캔콜라를 떠올렸다. 태어나 처음 콜라를 먹었을 때의 그 청량감은 이룰 말할 수 없었다. 치킨, 짜장면, 떡볶이, 튀김, 어묵, 순대, 라면, 부대찌개 등등 모든 종류의 음식을 먹고 항상 캔콜라를 마셨다. 캔콜라를 접할수록 처음 마셨을 때의 청량감은 점점 약해졌다. 그럴수록 관우는 더 많은 양의 콜라를 들이켜야 했다. 돌아보면 그건 중독이었다. 중독은 또 다른 중독을 불렀다. 캔콜라 생각을 하니 갈증이 났다. 지금 이 순간 캔콜라가 더욱 간절했다.


"사실 우리는 모두의 감시를 받고 살아. 하지만 그걸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또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살아가기도 해. 그러나 넌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그 선을 넘어 이용했다. 그들의 생활을 가로채 욕구를 채웠지. 난 그런 너의 결과물을 앉아서 빼앗은 거고. 어때? 이게 뛰는 놈 위의 나는 놈이라는 거야."


굵은 목소리가 또다시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는데 서론이 너무 길어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사실 듣고 싶지도 않은데 빨리 하고 끝냅시다. 저나 풀어줘요. 다 드릴 테니까."


관우는 잘난척하는 듯한 굵은 목소리의 말이 듣기 싫었다. 자신이 모든 계획을 짰는데 굵은 목소리가 그걸 책상 위에 앉아 이러쿵저러쿵 보고를 받으며 훈계조의 일갈을 하는 듯했다.


"아니, 이제 됐어. 그깟 3번까지의 모니터는 네가 본 걸 나도 이미 다 봤어. 넌 동의도 없이 벌써 빼앗긴 셈이야. 남의 생활을 싹 모은 그 허브를 나는 앉아서 취득한 거지. 억울해도 할 수 없어. 그럼 남은 일들은 알아서 감당하길."


굵은 목소리의 말이 끊겼다.


"이봐요. 저도 할 말이 있다고요. 이거라도 풀어주셔야죠. 이렇게 가면 어쩌라고요."


관우는 소리쳤다. 그러나 굵은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른 것들도 더 드릴게요. 앞으로 더 수집해 드린다고요."


관우는 계속 외쳤다. 여전히 답은 없었다.


"알았어요. 제발 알았으니 얼굴에 복면이라도 쓰고 와서 손에 가위나 작은 칼만이라도 던져주고 가세요. 제가 떳떳한 일을 한 것도 아니니 신고할 일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고요."


관우의 울부짖음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스피커는 그대로 천장에 매달린 채 전원 단자만 깜빡였다. 눈을 뜬 뒤로 시간이 얼추 20분쯤 지났다고 관우는 생각했다. 그때 관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은 발밑에 있었다. 아마도 자신이 둔기에 맞아 쓰러졌을 때 범인이 빼서 이것저것 뒤져본 뒤 저곳에 둔 것일 거라고 관우는 생각했다. 휴대폰이 울린 건 전화가 아니라 문자였다.


'연우예요. 인간적으론 죄송합니다. 하지만 원장님이 먼저 잘못을 저지른 것이니 그걸 꼭 생각하세요. 그리고 제 이름은 가명이니 혹시라도 절 찾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모르는 번호로 온 문자 메시지가 휴대폰 화면 상단에 한 줄 한 줄 천천히 흘렀다. 관우는 한숨을 쉬었다. 연우와 굵은 목소리가 관계가 있구나. 그럼 연우네 집에 몰래 갔을 때 남자랑 같이 산 흔적이 있었는데 그 남자가 저 망할 스피커의 굵은 목소리인가. 관우의 추론은 그렇게 굳어졌다.


그러나 지금 당장 달라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관우는 향이네 그녀가 집에 돌아왔을 때를 생각했다. 그녀는 관우를 무단 침입으로 경찰에 신고할 게 뻔했다. 관우는 경찰서에서 자기가 왜 묶여있었는지를 설명해야 할 것이었다. 관우는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토했다. 앞으로의 여러 시나리오를 머리에 그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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