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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정혁 Jun 03. 2022

외할머니는 왜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게 된다. 굽이치는 파도처럼 불친절하게 지껄였는데 세상 작은 것도 다시 돌아보게 된다는 얘기다. 무심하게 철썩였다가 밀려가는 파도가 그런 생각을 몰고 오는데 이상하게도 눈앞에 실제 파도처럼 밀려가진 않고 머리에 생각 조각만 잘게 썰어 놓고 떠나간다. 그쯤이면 옆에서 아이는 모래를 뒤집어써서 집에 가면 아내와 저녁 ‘집중 육아’ 시간에 목욕까지 추가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을 만든다. 하지만 머릿속은 파도가 몰고 온 조개껍데기가 모래알에 알알이 박힌 것처럼 상념들로 까슬거린다.


요즘 파도가 가져온 단어 중 하나는 외할머니다. 할머니면 할머니지 앞에 ‘외’가 왜 붙을까. 당연히 친할머니는 ‘친할 친’ 한자를 붙여 쓰고 외할머니는 ‘바깥 외’를 앞에 넣어 구분한 것이 이어져 왔다는 게 내 상식이다. 실제로 인터넷을 뒤적이면 어렵지 않게 그런 풀이를 찾을 수 있다. 남성 중심 사회의 관습이라며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고 아예 할머니가 사는 곳을 중심으로 친할머니 외할머니 따지지 말고 ‘수원 할머니’ ‘용인 할머니’ 식으로 부르자는 제안도 나왔다고 한다. 내가 이 대목에선 사회적으로 어느 수준 합의된 목소리를 뒤늦게 파악한 부끄러운 사람인 거다.


하나 더 재미로 과학적인 분석을 곁들여 네 명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이에서 외할머니가 손자와 손녀를 가장 예뻐한다는 뉴스도 봤다. 이 분석은 부부 사이에서 아버지는 키우고 있는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닐 수 있지만 어머니는 그렇지 않다는 뜻을 전제로 내걸고 있다. 이는 곧 외할머니 입장에서 손자 손녀는 자신의 유전자가 25%는 보장되어 있다는 뜻이므로 아무래도 손길이 더 갈 수밖에 없다는 그럴듯한 설명이다.


다른 사안이었거나 하다 못해 내게 예전처럼 아이가 없었다면 나는 이 하나의 객관성에 가까운 의견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의 난 이런 냉철한 분석에 관심이 없다. 내 경험과 주관으로 보면 외할머니가 손자 손녀에게 지극정성이었던 것은 자신의 딸이 힘든 육아를 자신처럼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커서다. 우리네 외할머니 대다수는 딸이 손자 손녀를 출산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고 그들 신생아를 직접 씻기고 먹이고 재우는 데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외’ 할머니가 아니라 ‘왜’ 모든 건 할머니인가. 이런 질문이 어울릴 정도로 오늘날 외할머니가 지니는 상징성은 앞에 ‘바깥 외’ 자를 붙이지 말자는 말이 어느 정도 상식선에선 합의에 이른 것처럼 인식된다.


바다를 보며 문득 나도 내 외할머니가 사무쳤다. 어려서는 외할머니가 주는 달콤한 미숫가루가 일품이었고 더 어려서는 사촌 형제가 모두 외할머니 아래 모여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날뛰었다. 외할머니는 우리를 먹이고 씻기고 재웠으며 그사이 육아에 지친 자신의 딸에게 자유시간을 주는 것으로 부모 역할을 계속하기도 했다.


커서 이런저런 장례식을 경험한 나이가 됐을 때 생전 다른 이의 장례식장에선 흐르지 않던 눈물이 처음 나온 곳도 외할머니 당신의 장례식장이었다. 그토록 슬프건만 어찌하여 외할머니가 한 줌의 재가 되어가는 공간에 잠깐 모시고도 밥이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가는지 컴퓨터 프로그래밍처럼 자동 입력된 스스로의 배고픔이 역겨워 밥숟가락을 쥐고 눈물을 짜기도 했다.


외할머니도 누군가에겐 부족한 부모였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가혹한 엄마였을 수도 있건만 내겐 그저 세상 가장 따뜻했던 외할머니로 남아 땅으로 돌아갔다는 점이 세대를 가르는 분수령으로 방점을 찍었다. 이는 한없이 아래로만 흐르는 보살핌 속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아닌 부모와 자식과 그 자식의 관계가 정의되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요즘 내 아이는 외할머니를 가장 잘 따른다. 아이는 외할머니를 한 달 가까이 보지 못했어도 다시 만나면 기막히게 외할머니 품에서 떠날 줄 모른다. 이를 보면 나는 외할머니와 쌓은 추억들과 함께 장례식장에서 씹어 넘긴 밥알들이 떠오른다. 생의 법칙은 이렇게 반복되고 유전자 전달 통로가 된 내 육신도 타들어가는 양초와 다르지 않음을 파도 소리가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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