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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로 글쓰기

[칼럼] 편집위원 해진

지난해 12월의 어느 날 밤중에 대화를 나누다 문득 결혼이 싫다고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내가 원하는 결혼은 언젠가 가능해질 수도 있겠지만 엄마가 소원하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일이 결코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누굴 만나는지와 상관없이 나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 혹은 언젠간 동성 간 혼인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것과 같은 수많은 ‘진보’의 가능성은 소중했으나 결혼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꾸기에는 영향력이 없었다. 딱 평범하고 평화로운, 큰 고민과 결단이 필요 없는 사랑과 삶은 누구나 갖기 어렵겠지만 법적으로 동성인 누군가와 함께하는 그것들은 아마 다른 종류의 더 큰 고민과 결단을 필요로 할 게 뻔해서였다. 나는 그런 것들마저 평범하기를 바라기에, 전형적인 행복을 바라는 엄마의 소망을 이뤄주고 싶으며 때로는 그러한 행복을 원하기까지 하기에, 내게 결혼은 예견된 실패이다.


그러니까 그 어떤 인식의 변화나 제도의 개선도 이런 미래의 실패는 막을 수가 없는 거다. 무언가를 감싸고 있던 한 층의 편견을 부수고 방해물 같았던 법과 제도를 바꾸는 순간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마법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 변화한다는 감각 속에서도 문제들은 여전하거나, 해결된 것처럼 보이다가도 자주 되풀이된다. 그리고 동성인 사람과 하는 사랑/결혼은 이성인 사람과 하는 사랑/결혼과 같지 않다. 이것들이 그 이유다.

 


예견된 실패


시험을 준비하느라 한동안 눈과 귀를 막고 지내던 나에게 이런 달갑지 않은 기시감을 오랜만에 일깨워 준 것은, 지난 12월 15일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이하 행성인)의 주최 아래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Day With(out) Art’ 상영회 행사였다. ‘Day With(out) Art’는 뉴욕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는 비영리단체 ‘비주얼에이즈’가 매년 세계 에이즈의 날에 개최하는 예술 행사로, 최근 몇 년 동안은 커미션 형태로 HIV 감염 예술가들의 영상 작업을 지원하고 그 중 선정작을 상영해왔다. 올해엔 행성인과 아트선재센터의 협력 아래 한국에서도 상영회가 열렸다.


최근 2,3년동안 《고대문화》에 실린 글 중 HIV/AIDS 감염을 중점적으로 다룬 것은 두 편 정도다. 2021년 여름 144호의 시선 꼭지에서는 〈HIV 감염인과 장애 인정〉이라는 제목으로 HIV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입원을 거부당한 A씨의 이야기를 전하며 HIV 감염의 장애 인정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후 2022 봄 147호에 실린 ‘규정당할 것인가? 규정할 것인가!’에서는 본격적으로 감염인의 장애인 인정 운동이 부상한 배경을 짚으며 ‘장애’의 정의를 의료적 관점에 국한하지 않게 수정하여 HIV 감염을 포함시킬 수 있게끔 재설정할 것을 주장했고, 동시에 언어의 외연과 내포를 변화시키는 일의 의의를 조명했다.


이렇게 두 번에 걸쳐 이슈를 다룬 시점에서 행사에 참여하던 당시의 궁금증은 그리 날카롭지 않았다. ‘에이즈는 ‘문란한’ 동성애자들의 질병이 아님. 의약학의 발전으로 에이즈는 관리 가능하고 현재는 완치를 기대할 수도 있는 만성질환이 되었음.’ 이런 것들은 정말 당연했다. 궁금증의 핵심은 ‘그렇다면’이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제19조(전파매개행위의 금지) 폐지 운동과 장애 인정 운동 진행 중. 그렇다면 이들 운동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뭘 해야 하는가? 이제는 뭔가?”


[그림1] 빈 무대 뒤편에 빔 프로젝터가 쏘아지고 있다. 흰 바탕의 화면 왼쪽 위에는 ‘BEING AND BELONGING’이라는 글자가, 오른쪽 아래에는 ‘DAY WITH(OUT) ART 2022’라는 단어가 보인다. 그림 설명 끝. ©양승욱


미래는 우리가 걸어온 그 길에 있다고 하는 어느 노래 가사가 있다. 우리가 걸어온 그 길에 정말 미래가 있다면 그것은 ―흔한 상식대로― 어느 직선의 길 위에 놓여 과거와 현재가 결정하는 무엇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제는 지나왔다고 생각하던 과거를 또다시, 때로는 새롭게 마주치는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해결과 변화


〈Los Amarilos〉 - Santiago Lemus and Camilo Acosta Huntertexas

[그림2] 노란 스웨터를 입고 피부를 노랗게 칠한 남자 두 명이 서있다. 그 둘의 머리 위에는 한 캡슐씩 들어있는 노란색 알약들이 들있다. 그림 설명 끝. 

 

콜롬비아에서는 비용 문제로 대다수의 감염인이 세계보건기구{WHO}가 최우선으로 권고하는 약물 대신 황달, 메스꺼움, 두드러기, 두통 등의 부작용을 가진 아타자나비르, 다루나비어 등을 정부로부터 지원받아 복용한다. 모든 약물에는 부작용이 따르지만, 이 작가들은 그중에서도 황달이라는 부작용의 가시성에 주목해 콜롬비아에 사는 HIV 감염인이 약물 복용으로 인해 감당해야 하는 부작용과 그로부터 비롯된 (비)가시적인 낙인, 그것들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감염인의 삶을 다룬다.



〈Memoria Vertical〉 – Camila Arce  

[그림3] 양갈래 머리를 한 여자아이와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인물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흑백 사진이다. 그림 설명 끝.


HIV에 감염된 산모가 제대로 된 예방조치와 처치 없이 출산을 하면 그 자녀는 그로부터 수직 감염된다. 아르헨티나에서는 HIV 감염인 산모 100명 중 5명의 꼴로 수직 감염된 자녀가 태어나는데, 이곳에서는 HIV/AIDS 감염인을 위한 전반적인 의료 정책은 물론 이렇게 수직 감염된 자녀에 대한 지원이 특히 미비한 실정이다. 아르헨티나인 예술가 카밀라는 수직감염인에 대한 공공정책이 부재한 상황에서 지금 자신이 살아있는 것 자체가 복수라고 말한다.



〈Red Flags, a love letter〉 - Mikiki

[그림4] 깨진 TV 화면처럼 화면이 가로로 삼등분되어 색과 사물들이 흔들려 보인다. 바지를 벗은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림 설명 끝. 


어떤 게이들은 마약을 한다. 그냥 마약이 좋아서, 성관계 중에 더 큰 쾌락을 느끼기 위해, 동질감을 가지기 위해, 아니면 마약을 접할 수밖에 없는 환경과 관계 속에서 살고 있어서. 그리고 마약 복용과 성관계는 HIV 감염의 주된 경로들이다. 작가 미키키는 마약의 부정적인 영향과 위험성을 언급하지만 동시에 이렇게 묻기도 한다. “[마약 중독자 생활에도] … 어떤 노련한 기술이 필요하고 … 중독은 누군가 그걸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어나는데, 그럼 차라리 좋은 중독자가 되는 방법을 가르치면 안 되는 걸까?”


그런 거다. 한국에서는 국가와 시·도가 전체 HIV/AIDS 관련진료비/치료비 중 본인부담금을 절반씩을 부담하고 감염인을 위한 법률 상담이나 일자리 상담 등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보았을 때는 국가마다 감염인에 대한 지원 여부와 지원 범위가 상당히 다르며 같은 국가 내에서도 모두가 동등한 치료와 생활을 받지 못하는 것이 그 실정이다. 실제로 전세계 에이즈 환자 중 3분의 2 이상이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청소년 여성의 감염률이 남성 청소년의 감염률에 비해 3배 이상 높다. 앞서 〈Los Amarilos〉와 〈Memoria Vertical〉에서 각각 중심 소재로 다룬 에이즈 치료제의 부작용과 수직감염인의 이야기는 그외 수많은 맥락과 상황에 놓여있을 다른 나라의, 다른 연령의, 다른 성별 정체성을 가진 감염인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U=U(미검출이라면 전파불가능)’의 시기로 접어든 지 7년. 그러나 그것을 모두가, 온전히 누리지는 못한다. 혹은 최선의 삶의 질로 살지 못한다. 모든 HIV 감염인을 일시에 해방시킬 궁극적인 해결책은 없는 것이다.


한편 〈Red Flags, a love letter〉가 담은 이들의 모습은 ‘이상함, 문란함, 변태적임, 마약과 같은 일탈을 범함, 잠재 에이즈 환자임’ 등 이제껏 흔히 남성 동성애자들(과 성소수자 전반)에게 씌어진 꼬리표를 연상하게 한다. ‘건전’하고 ‘정상’적인 사회의 일원으로는 보이지 않는 퀴어들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가장 간편한 해석으로는 이런 것이 있다. 일상적인 생활이나 마주침을 매개로 관계를 형성하기 어려운 퀴어들은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경로와 공간을 이용해 관계를 형성하고 때로는 성적 접촉에 의존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퀴어들이 주로 특정한 계기와 목적을 가진 만남을 통해서 연결되기에 상대적으로 외모와 경제력 같은 요인들이 다른 사회 집단 내의 관계보다 큰 변수로 작용하는 것 같다고 회상했다. 관계를 지탱시킬 수 있는 장치가 수와 다양성의 측면 모두에서 부족한 것이다. 이때 약물은 만남의 계기나 관계를 지속시키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거부당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약물을 사용할 가능성이 더 높고, 그러면 위험한 섹스를 할 가능성도 커지며, HIV에 옮을 가능성도 높아지며, 그러면 더욱 거부당했다고 느끼게 된다. 이렇게 계속 이어진다.” 이러한 관점은 사회가 퀴어를 ‘불건전’하고 ‘문란’해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결론을 제시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가 가진 수많은 문제들과는 별개로, 퀴어가 정말 말그대로 이상한 사람들일 수도 있지 않은가? 사회 구조와는 상관없이 퀴어가 실제로 이상하고, 문란하고, 변태적이고, 일탈을 범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텐가? 이에 대해 그들을 ‘그렇게’ 만든 사회 구조와 ‘그렇게’ 보이게끔 만드는 프레임을 지적하거나 그들 전체가 성소수자를 대변하지는 않는다는 식의 해명 혹은 대응은 퀴어들이 보편적인 정상 시민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추기만 할 뿐 이미 현실에서 이상하고, …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퀴어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더 현실적인 문제는 성소수자에게 따라붙는 꼬리표를 완벽하게 떼어내는 일은 시작부터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질병관리본부가 (생식기에 상처나 염증이 있는 상태에서 하는 등) 안전하지 않은 섹스가 HIV 감염 위험을 높이는 것이지 동성애와 에이즈 간에는 연관성이 없다고 밝힌지는 5년이 넘었다. 성소수자 혐오 세력이 주로 쓰는 도식은 ‘(남성) 동성애 ― 항문 성교 ― 에이즈’인데, 바로 앞서 적어 놓은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도식에서 ‘팩트’에 기반해서 ‘에이즈’를 떼어낼 수 있겠다. 이후에는 어쩔 것인가? 이성애자도 항문 성교를 하고 모든 남성 동성애자가 (항문) 섹스를 하는 것은 아니니 ‘항문 성교’를 도식에서 떼어내고,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고 지적 받는 또다른 속성들을 해명할까? 실은 애초부터 동화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퀴어들의 삶이 그러한 ‘정화’의 시도를 무력화하는 것이 아닐까.


결국 ‘그렇다면’이라는 연결어는 무용해 보였다. 그건 아주 특정한 국면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도 어느 순간에만 필요하다는 말이다. 돌이켜보면 어떤 위기의 국면이 깔끔히 종식된 적은 한 차례도 없었으며 그 국면이 완결되었다 생각한 이후 그것을 또다시 맞닥뜨리게 되어 낯설어 보이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문제’와 어울리는 단어는 ‘변화’이지 ‘해결’이 아니다. 해결이나 종식 같은 것이 난망하게 느껴지는 삶 속에서 한 퀴어는 이렇게 말했다.


“AIDS 전염병이 끝나면 우린 괜찮아질 거라고 늘 스스로에게 말해왔다. AIDS가 사라지자, 우리는 결혼할 수 있게 되면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다. 결혼도 가능해진 지금은 괴롭힘이 사라지면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고 느낄 수 있는 순간을 계속 기다린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다르다. 이젠 우리가 그걸 받아들이고 해결할 때다.”


동성혼이 가능해진 이후의, 무언가 통과되고 제정된 이후의 세상이 그렇게 기다려지지 않는 이유는 아마 ‘성공’이라 여긴 직후 찾아올 불안과 찝찝함이 오히려 나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앞선 인용처럼, 가끔 찾아오는 그 감각들이 실은 원초적인 이유에서 비롯했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 허탈하되 명쾌할 것 같다. 퀴어들은 여느 ‘정상’ 성별 정체성과 ‘정상’ 성적 지향을 가진 이들과 같지 않다. 그 둘은 분명히 다르다. “Love is love”는 ‘참’이 아니다. 그 관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육체와 속성과 배치가, 그냥 우리들은 사실로서 정말 다르기 때문이다.

 


성공인지 실패인지 모를


지난 2월 21일에는 ‘퀴어계’에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나라 국민건강보험공단(이하 건보단)은 요건을 충족하는 이들 중 ‘직장 가입자의 배우자, 직계존속(배우자의 직계존속 포함), 직계비속(배우자의 직계비속 포함) 및 그 배우자, 형제·자매’에 한해서만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는데, 지금까지는 사실혼 관계에 있더라도 동성인 부부는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러던 2021년 2월 동성혼 관계인 배우자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달라는 내용으로 소 씨가 건보단에 행정소송을 제기하였고, 이것이 2심 판결에서 승소한 것이다. 판결을 맡은 서울고등법원지부는 동성 부부 또한 “동성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사실혼과 같은 생활공동체 관계에 있는 사람의 집단”이라며 “사실혼 배우자 집단과 동성 결합 상대방 집단은 이성인지 동성인지만 달리할 뿐 본질적으로 동일한 집단으로 평가할 수 있다”라고 판결했다. 


판결문은 법령이나 국가 정책·제도와 그 역할과 지위가 같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한 공적인 의견 표명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것들은 현상황을 진단하고 평가하는 가시적인 기준으로 기능할뿐더러 행정·입법·사법의 영역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도와 대응을 드러내는 창구인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문장들은 정부가 그 앎을 어디까지 확정해 주였고 그것을 다시 어떤 (물질적인) 방식으로 어디까지 내비출지 결정한 바를 보여 준다. 


“평등을 말하는 문장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하나의 문장은 우리가 그것에 부여한 힘을 갖고 있다. 이 힘은 우선 평등이 그 자체를 표방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디엔가 평등이 있다. 이것은 말해졌고, 씌어졌다. 따라서 이것은 입증될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실천은 바로 거기에 바탕을 둘 수 있으며, 이 평등을 입증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을 수 있다.” 그렇게 “법이나 국가 제도는 단순한 지배의 장치…가 아니라, 평등의 논리가 기입되고 법제화되고, 물질적인 힘으로 작동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앞에서 잔뜩 ‘부정적인’ 얘기를 써놓긴 했다. 그렇지만 이런 소식을 미래의 성공을 알리는 일종의 복선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결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할 수도 있고 앞으로 가족 제도도 유연해질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결혼할 수 있음에도 퀴어는 절대로 가지지 못하는 것들이 가슴 아리도록 투명해질 수도 있다. 조금 더 슬프게 그려보자면 저런 판결문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그러면, 저 소송에서 이긴 것은 성공일까? 실패일까? 판단의 시점에 따라 그 둘 중 어느 것일지가 다르리라는 생각이 드는가? 


한편 최근의 HIV/AIDS 감염인의 장애 인정 운동도 돌아 보자. 지난 2022년 9월 9일,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는 《대한민국 제2·3차 병합 보고에 대한 최종견해》를 발표했다. 이는 한국의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이행 현황과 장애 인권 보장 실태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평가하는 공식적인 문서로, 본보고서는 총 5개의 긍정 평가 항목 이외 약 60여개의 주요 우려 항목을 짚었다. 그중 협약의 핵심을 담당하는 제1~4조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위원회는 우려와 함께 다음 사항을 주목한다. 

(a) 「장애인복지법」 상 수정된 장애의 정의를 포함한 장애 관련 법과 정책이 아직 협약에 완전하게 부합하지 않고 시청각장애인이나 HIV/AIDS 감염 장애인 등 일부 장애인의 특정한 욕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

(b) 최근 장애등급제가 6개 등급에서 2개 정도로 개편되었음에도 장애등급제를 포함하여 장애에 대한 의학적 모델이 여전히 당사국에서 만연해 있어, 장애인의 사회통합을 저해하고 적절한 서비스와 지원에 접근을 제한하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

(c) 협약에서 인정하는 권리에 대해 정책입안자, 판사, 검사, 교사 그리고 장애인을 위해 일하는 의료와 보건, 그 밖의 종사자 사이에서의 인식이 부족함.


위원회는 당사국에 다음을 권고한다.

(a) 국내 장애 관련 법률과 정책을 협약의 조항에 비추어 검토하고, 특히 심리사회적장애인, 지적장애인, 시청각장애인, HIV/AIDS 감염 장애인 등의 모든 장애를 아우르는 장애 개념을 채택하여, 그들의 특성과 욕구가 인정되도록 보장할 것.

(b) 의료적 장애모델의 요소를 인권적 장애모델의 원칙으로 대체하고, 장애인에 대한 법적·환경적 장벽을 파악하는 것과 자립생활 및 완전한 통합 증진을 위해 필요한 지원의 제공을 지향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여 장애판정제도의 방향을 다시 설정할 것.

(c) 장애인단체의 긴밀한 참여를 통해 공공 정책입안자, 판사, 검사, 교사, 그리고 장애인을 위해 일하는 의료 및 보건 그리고 다른 종사자에게 협약상의 장애인의 권리와 당사국의 의무에 대한 역량 강화 프로그램을 제공할 것.


이는 147호에 실린 ‘규정 당할 것인가? 규정할 것인가!’에서 제기했던 문제와 크게 다른 점이 없다. 이 글은 2022년 봄을 기점으로 한국 정부가 인정하는 장애의 규정, 그리고 그것을 비롯시키고 그것에서 비롯한 한계 상황 등을 짚었으니, 몇 개월 간격을 두고 발표된 유엔의 평가가 글과 내용상 유사하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 평가는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인 2014년에 이뤄졌던 첫번째 평가와도 아주 유사하다. 실제로 보고서에는 ‘여전히’나 ‘아직’ 등의 단어가 곳곳에 적혀 있기도 하다. 아마 계속해서 팔로업 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여전히’인지 아니면 ‘그렇다면’인지를 확인하고 무엇을 말하고 쓸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앞으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도 이것을 통해 무엇이 변할 수 있는지도 모른 채.


《고대문화》의 기조는 ‘세계를 변혁하는 대항 언론’이다. 한 체제가 끝날 때 마다 가는 회의 겸 MT인 체제개편에서 우리는 우리의 기조에 대해서 이런 얘기를 나눈다. ‘(책 마감도 잘 못 지키는 판에) 글을 통해서 대체 무엇이 변혁될 수 있을까. 행사를 열고,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사람들에게 무엇이라도 알림으로써 《고대문화》는 과연 세계를 변혁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 물음에는 항상 이런 대답이 뒤따른다. ‘다른 그 무엇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우리의 세계는 바뀌고 있다’라고.


지난 몇 년 동안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글을 쓰며 적어도 나는 이제 실패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보거나 겪고도, 우리에게 가능한 것이 (전진이 아니라) 실패밖에 없을지라도 크게 슬퍼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러니까 무엇이 성공이고 실패인지 헷갈리는 세계, 나의 선택이 포기인지 지속인지 몰라도 되는 세계로 접어든 느낌이다. 그러니 이 시점에서 글을 쓰는 소용에 대해서 되돌아보자면, 사실 평등이 쓰였으니 평등이 입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약 무언가 쓰였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증명되어야 한다면 세상에 쓰인 모든 것이 당위적으로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미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과 이미 이곳에 쓰인 문장들은 돌이킬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무슨 상태로든 될 것이며, 어떻게든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 혹은 글쓴이는 자기 자신을 과제로 삼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최선이라고 믿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예견된 실패로 향하고 있다. 결혼, 인간 관계, 그 무엇을 마주하든 문득 신경을 건드리는 기시감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글을 씀으로써 누군가는 어떤 결심을 (해야) 한다. 그 뿐이다.


 

편집위원 해진 / jnnnterm@gmail.com



참고문헌

논문 및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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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2021). PL 마음의 창으로 보기.

연구모임 POP (2022). 켐섹스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한국 상황에 대한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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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및 온라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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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한국의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이행 2·3차 보고에 대한 유엔 최종 견해 (2022.10.18.). 비마이너. Retrieved from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4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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