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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다녀온 이야기

[칼럼] 편집위원 숙영

축가 연습


쿰쿰한 냄새가 나는, 지하의 어두운 연습실에 친구들과 모였다. 그리고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룰라의 ‘3!4!’에 맞춰 안무를 연습했다. 언니의 결혼식이 두 달 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7년을 사귄 남자와 결혼을 한다는 언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막내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 그러니까 귀여움을 떠는 것이었다. 그동안 막내 역할을 제대로 연기하지 못한 것을 만회라도 하겠다는 듯이 나는 언니의 결혼식에서 춤을 추기로 했다. 서울에서 함께 지내는 나의 퀴어 친구들을 대동해서…. 


“그런데 룰라에 고XX 있지 않아요? 성범죄자….”


사장님이 축가 연습 이야기를 듣고 말했다. 지난 해부터 이태원의 한 비건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공간 한 가운데에 퀴어 플래그가 꽂혀 있는 곳이다. 


고XX이라는 이름을 듣는 건 오랜만이었다. 축가를 고르려고 노래들을 찾아봤을 때, 그가 룰라의 멤버라는 것을 어디에선가 봤던 것도 같다. 그렇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가 멤버라는 점보다 노랫말의 내용이 언니의 행복을 바라는 편지로서 딱 맞아떨어졌다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사장님의 말을 듣고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노랫말의 내용보다 성범죄자가 속한 그룹의 노래라는 점을 누군가는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예계에 종사하는 많은 남성들의 혐오 발언이나 성폭력 가해사실은 그들의 출연작이나 노래를 ‘불매’하자는 여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노래들과 영화, 드라마 등이 ‘소비’하면 안 되는 것들의 목록에 올라 걸러졌다. 


그러나 나는 언니의 결혼식장에서 울려퍼질 노래로, “여기 숨 쉬는 이 시간은 나를 어데로 데려갈까 – 많은 기쁨과 한숨들이 뒤섞인 이곳에서 – 사랑만으로 늘 가득한 그런 내일로 가고 싶어”라거나, “거친 파도의 바다처럼 때론 아픔도 왔었지만 – 슬픈 바다를 감싸주던 넌 하늘과 같았어”라는 노랫말보다 적절한 것을 찾지 못했다. 이 가사가 어째서, 이 노래를 부른 그룹에 속해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XX만의 것이 되어야 하는가? 무엇보다 그 노래에 맞춰 결혼식에서 춤을 출 것은 고XX이 아니라 나와 내 친구들이었다. 


당황한 내 얼굴을 보고서 사장님은 ‘하지만 그렇게 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 말은 우리는 이미 많은 것들을 가지고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들은, 세상에 아무렇게나 배설된 것들을 주워다가 나의 것으로 만들면서 살아간다. 글, 만화, 영화, 노래 같은 것들은 그것을 만든 사람들-창작자의 몸을 거쳐 나에게 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들이 창작자만의 고유한 것으로 남을 수는 없다. 나 역시도 이것들을 내 몸 속에서 소화시키고 조각내어 새로운 것으로 읽어내고 있다. 그 결과 이것들이 내 몸 속의 어느 부분으로 남게 될 때, 원래의 창작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많은 퀴어들의 생존 방식이 되어 왔다. 


그런데 이것과는 또 별개로, 이런 생존 방식의 존재,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서 벽장 밖의 세상이 전혀 알지 못한다면,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결혼식 당일, 수많은 어른들 한가운데에서 춤을 춘 나와 내 친구들은 모두 퀴어였다. (우리 모두 퀴어라는 선언이나 어떤 ‘퀴어함’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냥 단순하게 다들 어플을 돌려본 적 있고 퀴어 공간을 찾아다니고 또 동성 연애를 해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결혼식에 온 모두에게 내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어떤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한 번도 말해본 적이 없다. 한 다리 건너면 모두를 알 수 있는 그곳에서,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그들은 퀴어로서 살아가는 방식이 나를 구성하는 큰 조각 중 하나라는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퀴어 친구들이랑, 그것도 우리가 퀴어라는 사실을 우리끼리만 조용히 비밀처럼 알고 있는 채로 그곳에서 춤을 추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우리가 퀴어라는 것 그 자체만으로 반드시 어떤 의미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충분히 의미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3!4!’를 언니의 앞날을 성원하는 노래로 재해석하기로 한 것처럼 말이다.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그 자리- 정상적인 미래, 가족, 행복 같은 것들을 축하하고 기원하기 위해 번듯한 옷을 입고서 모두가 모인 그 자리에 우리는 어떤 이상한 자국을 남긴 것일 수도 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는 것들을 비웃으면서, 그런 비웃음을 또 한 번 우리끼리의 의미로 삼으면서…. 그러나 나는 나의 삶에 끈적하게 붙어있는 부분들에 대해서 가족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다. 퀴어 친구들과 할 수 있는 농담들이, 여자친구와 함께 방에 누워있기만 하는 날들이, 손을 잡고 서울의 거리 곳곳을 쏘다니는 시간들이, 이상한 공간에서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서 이상한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들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런 것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것들에 대해 말하게 되는 그 순간부터 생겨날 어떤 균열들을 나는 책임질 자신이 없다. 이런 비밀스러운 비겁함은 우리의 몸짓을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만들기도 했다. 음침하게, 늘상 그랬듯 떳떳하지 않게 우리가 퀴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끼리만 그 의미에 대해서 곱씹게 되는 것이다. 



축하해! (무엇을?)


언니의 결혼식은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동네에서 열렸다. 명산이라 이름이 나 있어서,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오는 이유가 되고 그래서 이곳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큰 산 옆에 있는 예식장에서 열렸다. 그곳에서 지겨울 정도로 서로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어른들을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결혼식장은 정말이지 온갖 상징과 기호가 떠다니는 공간이었다. 행복하고 밝은 앞날을 향해 걸어가듯 웨딩마치를 걸어 나온 언니와 남편은 ‘영원한 사랑’ 같은 것을 맹세하는 글을 읽고, 두 사람의 앞날을 밝혀준다는 의미로 양가의 엄마들이 나와서 촛불에 불을 붙였다. 아빠들은 변하지 않는 마음 같은 것을 가지고 서로에게 항상 버팀목이 되어주라는 내용의 글을 낭독했다.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행복에 두 사람이 진정으로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결혼은 그것을 향한 관문이라고 믿었다. 나 역시도 언니가 이 결혼을 통해 앞으로 행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랐다. 


한편 그곳은 정신없고 복잡한 것들이 오가는 공간이기도 했다. 예식장의 조명은 엄청나게 어두웠다. 이는 결혼식장을 채우고 있는 것들- 여러가지 기준에 따라 서로에 대한 성의와 친분을 확인하는 모습들을 덜 비추기 위한 것이었다. 모든 조명은 신부와 신랑의 행복한 모습을 비추기 위해 존재했다. 그곳에서 나의 위치는 아주 애매했는데,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친동생의 자리 같은 것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에 친구들과 축가 연습을 마저 하느라 식장에 늦게 들어간 나는 식장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엉덩이 붙일 곳을 찾아야만 했다. 엄마와 아빠의 자리가 가장 푹신해 보였고 탐이 났으나,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았음에도 거기에 앉아서는 안 된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엄마 아빠의 자리는 아주 당연하게 단상과 가장 가까운 곳에 두 사람이 함께 앉을 수 있는 소파의 모습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만약 내가 그곳에 앉았다면, 또 내가 아니라 누군가가 그곳에 앉았다면 그 사람은 결혼식에 침범한 존재나 방해물 같은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는 결혼식이 근엄하게 차려 입은 엄마 아빠의 행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곳에 모인 어른들은 이미 어떤 기준들을 모두 알고 공유하고 있었고 나는 왠지 어떤 구체적인 부분들은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어른에 닿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결혼식장의 소파에 앉기 전까지 계속 누가 오는지, 축의금을 누가 얼마나 보냈는지를 체크하느라 바빴다. 나 역시도 멀쩡하고 멀끔한 옷을 입고 수많은 어른들과 손을 잡고 인사를 했다. 잊고 살았지만 그동안 누가 나와 얽혀 있었는지, 그리고 여전히 얽혀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에 사는 동안은 잊고 살 수 있었던 주름지고 텁텁한 손들이었다. 서울에서는 그런 손을 만질 일이 거의 없었다. 아무도 없고 모든 것이 있는 서울에서 나는 애인의 손을 잡고 다녔다. 가끔씩은 그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상대에게 영원함 비슷한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 사실 우리는 영원할 수 없고, 영원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이 지나면 결국 어느 순간에는 무너지고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영원함에 대해 더 많이 말해야만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영원함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 영원함, 흔들리지 않는 것, 견고함, 무언가를 이뤄낸 어른 같은 것들…. 영원함은 안정성과 긴밀하게 맞닿아있는 것이다. 이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고, 행복을 약속하는 무언가로 그려진다. 이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상상력을 크게 발휘하지 않아도 이미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주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방법이 있다. 바로 결혼하여 부부가 된 다음 자녀를 낳아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결혼식은 중요한 인정의 절차로 기능하는데, 모두 알고 있다시피 오직 이성애자 남-여 커플만이 그것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니까 행복이라는 목표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선택하게 하는지를 살펴보면, 행복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최근 들어서는 자신이 이성애자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이런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혹은 비자발적으로 이탈하고 있다. 많은 이성애자 남-여 커플들이 자신들에게 강요되는 인정의 절차를 부담으로 느끼고 피하려 한다. 이는 결혼을 삶의 경로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일 뿐 아니라, 기존의 전통적이고 젠더화된 각본을 따를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쪽에서는…. 결혼을 원하는 퀴어 커플들이 여전히 많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선택할 수 없거나 선택하지 않는 무언가가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정을 획득하기 위한 장치로서 결혼식이 상정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결혼식은 보편적으로 상상되는 형식일 뿐, 퀴어 커플들은 여전히 본인들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어떤 것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 번 어떤 사실 한 가지를 알아챌 수밖에 없다. 퀴어와 영원함, 안정성을 의미하는 것들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있다는 사실 말이다. 물론 어떤 퀴어들에게 영원하고 안정적인 관계는 가능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누가 되었든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는 나를 구성하는 많은 부분들에 대해 영원히 말하지 않고 숨기면서 살아가거나, 혹은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그다지 큰 차이를 갖지 않는 것처럼 굴어야만 한다. “Love is Love”와 같은 구호처럼 성소수자 역시도 이성애자들과 비슷한 종류의 행복을 느낄 수 있음을, 그저 행복의 순간에 함께 할 존재의 성별이 다를 뿐임을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와 그들의 삶 사이에 정말 그 정도 차이밖에 없는가? 어떤 본질적이고 생물학적인 차이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사랑은 그들의 사랑과 정말 다를 것이 없는가? 



거주하기


솔직하게 말하자면 결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엄청난 절망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결혼에 대해서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당장 내일이나 한 달 후라고 하더라도 그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 싶다거나 해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라서 그렇다. 어떤 바람도, 계획도 전혀 없다. 어쩌면 내가 가진 여러 가지 조건 탓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없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또 아직까지 ‘결혼 적령기’로 여겨지는 나이가 아닌 탓도 있겠다. 


한편 지구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어떤 나라에서 동성혼이 법제화되었다는 소식 같은 것에 한국에 사는 많은 퀴어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본다. 나는 그것이 딱히 나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고 엄청나게 기쁘지도 않다. 다른 퀴어들만큼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나는 내 위치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동성혼 법제화 운동은 많은 퀴어들에게 자신의 삶과 밀접하게 닿아있는 문제로서 당연히 지지해야 할 의제로 여겨지기 있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마치 성소수자 인권운동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성 부부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고, 파트너와 함께 해온 세월을 부정하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다. 그리고 이러한 차별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중요한 움직임이다. 그런데 이때 목소리를 듣도록 요구되는 직접적인 대상은 국가다. 국가는 차별을 만들어내는 장소인 동시에 승인의 장소로 상정된다. 국가에 의해 인식되고 인정되어야 하기에 운동은 필연적으로 합법성과 보편성의 어휘에 의존한다. 이미 합법성과 보편성의 범주 안에 들어있는 것들과 내가 얼마나 다를 것이 없는지 설명함으로써 그 범주 안에 적극적으로 포함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또 다른 종류의 배제에 기대는 방식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단 한 사람과 ‘정상적’인 섹스를 하는 어떤 시스젠더 동성애자들의 섹슈얼리티가 국가에 의해 승인되고 나면, 이들이 지니던 죄의식, 일탈, 불연속성, 비사회성, 유령성 같은 부정성들은 다른 곳- 여전히 바깥에 남아있는 존재들에게 향한다. 합법적이고 비합법적인 성적 배치에 새로운 위계가 설정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위계는 다시 말해 동성애 규범적이다. 동성애 규범성은 이성애 규범성과 경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하위 범주로 존재한다. 기존의 규범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재생산되고 강화되도록 간접적으로 공모하기 때문이다. 인식되고 인정되기 위해서 무엇이 요구되는지, 왜 결혼이 관계의 가능성을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어야만 하는지, 결혼 그리고 합법성이 유일한 기준이 될 때 섹슈얼리티가 외관상으로 축소되는 것은 아닌지, 법제화 과정이 기존의 규범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닌지, 또 인식과 인정 가능성의 조건을 결정하는 기존 체제에 도전하도록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다른 자원은 없는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는 ‘굳이’ 생각하지 않거나 지금 당장 시급하지는 않은 것으로 남겨둔 채로 말이다. 


우리는 진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진보하고 있다는 믿음을 명분으로 자행되고 있는 많은 것들을 보고 있자면, 진보라는 것을 거부하고 이탈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는 무언가를 향해 단선적인 경로 위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방향에서 얽히고 설키고 있을 뿐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동성혼 법제화 역시 우리 모두가 해방에 한 걸음 가까워졌다거나 역사가 진보하고 있다는 증표처럼 내세워질 수 없다. 동성혼 법제화는 퀴어 커뮤니티가 그것만이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말할 수밖에 없었던 조건과 맥락 속에서 도달한 장소에 불과하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에이즈로 인해 많은 퀴어 공동체와 운동 조직이 궤멸되고, 동시에 돈 많은 백인 게이 남성들이 운동에 유입되었던 당시의 맥락 말이다. 또한 어떤 관계와 돌봄이 지금 사회에서 아주 제한적인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돌봄이 가족의 몫으로만 남겨지는 와중에 퀴어들은 가족이 될 수 없어서, 다시 말해 국가가 제공하는 자원에 오로지 가족의 형태로만 접근할 수 있기에 동성혼 법제화는 유일한 대안처럼 남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동성혼 법제화에 반대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성혼 법제화가 그것 자체만으로 더 퀴어하고 전복적인 것이 아니듯, 이에 반대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또 동성혼 법제화 소식에 기뻐하는 퀴어들과 결혼을 원하는 퀴어들에게 규범에 공모하고 있다며 욕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우리는 규범에서부터 자유로운 어딘가로 도망갈 수 없고, 각자의 최선을 선택하면서 규범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간다. 사라 아메드의 말을 빌리자면 “동화나 위반은 개인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아니라 주체들이 사회적 규범과 이상에 거주할 수 있는 방식과 거주할 수 없는 방식이 낳는 효과(사라 아메드, 2004; 전혜은(2021)에서 재인용)”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결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규범 위에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거주할 것인지, 주어진 공간 속에서 어떻게 타자와 관계를 맺으며 협상해나갈 것인지다. 



언니의 행복


언니는 나보다 7살이나 많아서, 항상 어른 같이 보였다. 우리는 강원도의 작은 시골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같은 집에서 살았고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쳤다. 언니는 언제나 나보다 이미 미래에 살고 있는 존재처럼 보였고 그래서 언니가 보여주지 않는 어떤 구석들을 나는 항상 알아내고 싶어했다. 언니의 일기장을 자주 훔쳐봤던 건 그래서였다. 언니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가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다고 믿었다. 언니가 옆 동네에 있는 대학교에 가면서부터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아졌고, 내가 서울에 와서 살게 되면서부터는 우리가 선택한 삶의 궤적은 접점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아마도 우리의 삶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다른 모습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런 차이를 만들어낸 것은 무엇이었을까? 강원도에서 언니가 살아가는 동안 나는 서울에서 살게 되어서? 이것도 아니라면 언니는 결혼을 하기로 마음 먹었고 나는 레즈비언으로 살아가고 있어서? 아마도 많은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 우리를 다르게 만들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것들 속에서 우리가 최선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혼식장에서 언니에게 쓴 편지를 낭독했었다. 언니가 어떤 선택을 하든 언니를 믿는다는 말을 했다. 이 믿음은 단순히 같은 성씨나 비슷한 유전자 같은 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다. 언니가 거쳐온 삶의 과정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어떤 맥락을 가지고 있는지를,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언니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자 노력했는지를 알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믿음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장소에서 언니의 결혼과 행복을 응원하고 축하했다. 결혼은 행복을 약속해주지 않는다. 언니가 결혼했기 때문에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결혼을 선택한 언니의 최선을 축하하려는 것이다. 최선을 선택하기를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언니의 선택이 최선임을 알아주는 것이다. 


‘3, 4!’의 노랫말처럼, 여기 숨 쉬는 이 시간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머물게 된 그곳에서 우리의 몸에 아로새겨진 것들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아로새겨진 채로 우리가 택한 최선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또 다시 최선을 택할 것이다.



편집위원 숙영 / sonsy213@gmail.com


참고문헌

단행본

김순남 (2022). 가족을 구성할 권리. 오월의봄. 

사라 아메드(2021). 행복의 약속. 성정혜, 이경란 (번역). 후마니타스.

전혜은 (2021). 퀴어 이론 산책하기. 도서출판 여이연.

주디스 버틀러 (2015). 젠더 허물기. 조현준 (번역). 문학과지성사. 

제니퍼 M. 실바 (2020). 커밍 업 쇼트. 문현아, 박준규 (번역). 리시올.

J. 잭 할버스탬 (2014). 가가 페미니즘. 이화여대 여성학과 퀴어 LGBT 번역 모임 (번역). 이매진.


논문 및 저널

나영정 (2015). 한국 성소수자 운동과 제도화의 역설. 뉴 래디컬 리뷰, 진보평론 2015년 봄 제63호, 228-257. 

윤조원 (2017). 리오 버사니의 퀴어한 부정성: 친밀함을 넘어서는 『친밀함의 가능성들』. 비평과이론, 22(1), 137-162.


기사 및 온라인 자료

오혜진 (2019.11.20.). 허윤, 오혜진의 백일몽 7 '퀴어 판타지'를 발명하는 영광. 접속일 2022.01.20. Retrieved from https://thepin.ch/think/p7nu3/daydream-7 

이연숙 (2019.04.29.). 급진적 부정성을 위해서. 접속일 2022.01.25. Retrieved from http://www.zineseminar.com/wp/issue01/%ea%b8%89%ec%a7%84%ec%a0%81-%eb%b6%80%ec%a0%95%ec%84%b1%ec%9d%84-%ec%9c%84%ed%95%b4%ec%84%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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