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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들의 아파트

[특집 '빈곤'] 편집위원 은희

 그날 역시 이름 모를 누군가가 아파트를 떠나갔다. 저녁이 되면 주차장에 차들이 가득 차던 다른 아파트들과 달리 그 아파트의 주차장은 한밤중이 되어도 황량했다. 차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재개발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철거가 예정된 건물에 인간이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고 사람들은 점차 떠나갔다. 사람들이 떠나간 동네가 슬럼화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나중에는 청소부들조차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텅 빈 아파트 단지에도 여전히 머무르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아파트 단지를 터전으로 삼아 살아온 동네 고양이들이다.

©고양이들의 아파트

그림 설명 시작. <고양이들의 아파트>의 한 장면. 낡은 아파트 현관 앞에 길고양이 한 마리가 서 있다. 그림 설명 끝


 2022년에 개봉한 <고양이들의 아파트>는 재개발이 결정된 아파트 단지의 고양이들과 이들을 살리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의 배경이 된 곳은 한때 아시아 최대 규모의 아파트 단지였으며 지금은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재개발지라는 수식어가 붙은 둔촌 주공 아파트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또 다른 살 곳을 찾아 떠나가지만, 고양이들은 자신의 터전을 떠나지 않는다. 설령 재개발이 시작되고 아파트 건물이 무너지더라도 고양이들은 그곳에 머무른 채 오히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고양이는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고 그 영역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영역 동물이기 때문이다. 무너지는 건물에 숨어드는 고양이들이 맞이할 미래는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들은 건물 잔해에 깔려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고양이를 사랑하는 개개인들은 자신의 마음 하나만을 믿고 힘을 모으기로 결심했다. 둔촌 주공 아파트 동네 고양이의 행복한 이주를 준비하는 모임, 줄여서 ‘둔촌냥이 모임’이 결성되었다.

 

 영화 자체는 2022년에 개봉하였지만, 둔촌냥이 모임의 활동이 시작된 것은 그보다 5년 전인 2017년이었다. 2017년부터 둔촌냥이 모임은 ‘이사 가는 둔촌 고양이’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하며 재건축 지역 고양이들의 입양을 준비했다. 입양공고가 올라온 고양이 중에는 유기된 것으로 추측되는 아이들도 많았다. 매달 정기 모임을 개최하고, 둔촌 주공 아파트 고양이 밥자리 이동 간담회, 아파트 단지 내 개체수 조사, 둔촌 주공 아파트 고양이들의 사진전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던 둔촌냥이 모임은 고양이 ‘스몰비’의 입양을 마지막으로 2020년에 공식적인 활동을 종료했다. 인스타그램 계정 역시 2023년 1월, 3단지에 살던 스몰비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운영이 종료된 상태이다.

 

 그러나 둔촌냥이 모임이 끝났다고 해서 재개발 지역의 고양이를 구하려는 노력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둔촌냥이 모임의 활동은 막을 내렸지만, 활동 종료 이후 해당 모임의 활동가 한 명이 고양이 잡지 매거진인 <탁! (tac!)>을 발행했다. ‘cat’을 뒤집은 이름인 ‘tac’은 “고양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자”는 목표를 가지고 창단되었다. 2021년 6월의 첫 호를 시작으로 매거진 탁은 2023년 7월 기준 총 4호까지 발간된 상태다. 그뿐만이 아니다. 둔촌냥이 모임 이외에도 재개발이 예정된 아파트 단지 내의 고양이를 구하려는 시도는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동대문구 이문동의 ‘이문냥이 프로젝트’, 부산 동래구 온천4구역의 ‘온천냥이구조단’ 등이 대표적이다. 이문냥이 프로젝트의 사람들은 2020년 3월부터 약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총 123마리의 고양이들을 구조하였으며, 온천냥이구조단은 구조된 282마리의 고양이 중 120마리를 근거리에 방사하고 120마리를 SNS를 통해 입양 보냈다. 비인간과 함께 살아가려는 노력은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왜

 

 아파트 단지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지고 ‘인간’에 의해 없어진다. 아파트를 새로 짓고 또다시 철거하는 무수한 과정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들은 고려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아파트 단지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 같이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미 비인간들과 함께다.

 

 사실 재개발이 결정된 아파트에 남겨진 고양이들의 삶은 인간의 삶과도 많이 닮았다. 재개발 대상지에 살던 사람들 역시 자신이 살던 공간을 떠나기를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아파트 주거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무허가 불량 주택’ 밀집 지역을 택지로 삼아 아파트를 건설하는 재개발 사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최인기, 2012; 83p). 거주민들은 자기 삶의 터전을 위협하는 것에 맞서 저항하고 투쟁해야만 했다. 제대로 된 보상 없이 강제 철거와 원치 않은 이주를 경험한 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2009년 1월 20일에는 용산 남일당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당시 해당 건물에서는 용산 4구역 재개발 사업에 대해 철거민들이 적절한 보상을 요구하며 생존권 보장을 위한 농성을 벌이던 중이었다. 경찰은 컨테이너와 물대포 차량을 동원해 건물을 포위했다. 진압을 이유로 소방수와 최루액이 섞인 물대포가 건물을 향해 발사되었다. 진압 과정에서 건물에 불이 났고 결국 6명의 사망자와 23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용산 참사’라고 불리는 바로 그 사건이었다. 2018~2019년 무렵에는 강북구 미아3구역의 건물 위에 망루가 세워졌다. 건물은 “너 같으면 나가겠냐 개새끼야. 단결 투쟁”, “대가리 쪼개져도 투쟁은 계속된다. 투쟁!” 등의 문구가 적힌 현수막으로 뒤덮여 있었다. 2019년 가을부터는 본격적인 강제 집행이 시작되었다. 용역들이 들이닥치는 것은 일상이 되었고, 어떤 날에는 하루에 25가구가 집행을 당하기도 했다. 믿고 싶지 않지만,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누군가의 삶의 터전을 앗아가기 위해 국가 폭력이 자행된다. 

2019년 11월 16일 미아3구역 건물 위에 세워진 망루의 모습. ©빈곤사회연대

그림 설명 시작. 2019년 11월 16일 미아3구역 건물 위에 세워진 망루의 모습. 건물 외벽은 “대가리가 쪼개져도 투쟁은 계속된다 투쟁!” 등의 문구가 적힌 현수막들로 가득하다. 그림 설명 끝.


“2019년 9월부터 10월까지 몇 차례 집행이 있었는데 용역들이 한 1000명은 왔었어요. 한번 올 때 400명, 500명 이렇게 와가지고, 한 날은 스물다섯 가구가 집행을 당했어요. 깡패들이 그렇게 쳐들어오니까 저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뒤로는 그거(집행) 당하니까 갈 데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남아있는 집 안으로 들어가서 망루를 세웠던 거죠. 그런데 결국 그 건물마저 올해 빼앗겼어요.”

 

 재개발 지역의 철거민과 고양이는 ‘같은 논리’로 떠나기를 강요받는다. 철거민들은 아파트 단지의 고양이만큼이나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존중받지 못한다. 자신의 집에서 내쫓기는 과정에서 폭력이 자행되거나 설령 누군가가 목숨을 잃더라도 모두 재개발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는 과정에서 발생한 ‘작은 해프닝’ 정도로 치부될 뿐이다. 심지어 고양이들은 철거민들과 달리 자신의 집이 재개발된다는 사실을 알 수도 없으며, 항의 역시 불가능하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죽어가는 것이다. 주택재개발 정비사업은 열악한 주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함이지만 정말 이 목적을 위해 재개발 사업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재개발이라는 단어에는 언제나 시세 차익, 투자, 투기 등의 단어가 따라붙는다. 가진 자들의 탐욕과 이윤 추구가 어지러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재개발 지역에 붙은 “명품 아파트로 보답하겠습니다.”라는 시공사의 현수막이 이를 대변한다. ‘투자’, ‘프리미엄’, ‘이윤 추구’ 등의 말 앞에서 철거민과 고양이의 생존권, 주거권은 순식간에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 흩어지고 만다. 돈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있다는 어린 시절의 가르침은 어느 순간부터 몽상가들이나 꿈꿀 말이 되어 있었다.

©이투데이

그림 설명 시작. 골목길에 내걸린 GS건설의 현수막 사진. “강북 최고의 명품 아파트로 보답하겠습니다”라고 적혀있다. 그림 설명 끝.


 환골탈태(換骨奪胎). 뼈대를 바꾸어 끼고 태를 바꾸어 쓴다는 의미로, 전혀 몰라볼 만큼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었을 때 쓰이는 말이다. 재개발과 관련된 뉴스 기사를 살펴보다가 문득 이 환골탈태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집창촌서 주거단지로”… 환골탈태 ‘청량리’ 집값 들썩, “둘리와 응팔의 고향 도봉구, 환골탈태하나…”와 같은 말들이 뉴스 헤드라인에 버젓이 적혀 있었다. 경제적 이윤 추구를 위해 누군가의 삶의 터전을 빼앗는 것이 과연 환골탈태인지 의문이다.


 누군가의 생존권과 주거권 보호를 위한 이야기를 할 때도, 동물권이나 환경 보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도 부딪히게 되는 질문들이 있었다. 우리들은 왜 이러한 문제들에 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동물들의 권리를 신경 쓰고 환경 보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피로감을 안긴다. 기후 변화는 모두 거짓이라는 사람들의 말과 싸워야 하며 수많은 주장 속에서 자신만의 중심을 잡고자 매 순간 애를 써야 한다. 경제적 이윤 추구보다 우선시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는 믿음에 철없고 비현실적이라는 비난이 뒤따라오는 것은 덤이다. 이 모든 피로를 감수하면서 끊임없이 이런 문제들에 관해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학창 시절에는 종종 ‘왜 우리가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에 부딪혔다. 내적 갈등의 문제가 아니었다. ‘왜 내가 굳이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기후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느냐’는 주변인들의 물음 때문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썩 그리 건설적인 대화는 아니었던 것 같다. 자기는 어차피 일찍 죽을 거라서 기후 변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등의 ‘쿨찐 같은’ 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지구평평론자들과 대화한다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결론적으로 이러한 경험들은 나에게 기후변화나 동물권 문제에 대한 책임감의 근거를 증명해 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시달리게 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던 것은 애초에 굳이 내가 느끼는 책임감의 근거를 증명해 낼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때때로 세상에는 논리적인 이유로 설명하지 못하는 감정들이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는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도덕적으로 우월감을 느끼려고 저런다”라거나 “PC한 척, 깨시민인 척한다”라고 비난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욕구가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욕구만으로는 내가 느끼는 책임감과 행위의 당위성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동안 나는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빈곤, 비인간 동물, 기후변화 등에 관해 관심을 가져왔으며, 아마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화단에서 고양이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재개발이 결정된 곳에서 고양이의 사체가 발견되는 것은 특별한 일은 아니다. 사람들이 떠나가면 떠나갈수록 고양이들의 주변 환경이 열악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시민은 아파트 화단에 고양이 사체가 있다며 전화를 걸었다. 시청에서 돌아온 답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건 청소과 담당이니 청소과에 연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화가 끝난 뒤 도착한 것 역시 ‘쓰레기차’였다. 이름 모를 고양이의 사체는 초록색 플라스틱 삽에 들려 대용량 쓰레기봉투에 버려졌다. 쓰레기차는 그렇게 고양이 사체가 담긴 쓰레기봉투를 싣고 떠나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죽음은 시청의 청소 대상으로 분류되어 아무런 존엄 없이 버려진다.

 

 고양이를 비롯해 도시에서 살아가는 비인간들의 권리에 대하여 말하는 일은 매우 복잡하다. 나는 그들의 권리에 대해 말하면서도 늘 그랬듯 치킨을 사 먹을 것이고 친구들과 고깃집에 가서 삼겹살을 구워 먹는 것을 좋아할 것이다. 그런 나 자신을 모순적이고 위선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데?’라는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할 것임을 안다. 꼬치꼬치 따져 묻는 누군가에게 제대로 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더럽게 복잡한 문제에 대한 글을 쓰기로 한 것은 결국 이 문제가 우리 모두와 맞닿아 있는 이야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글을 쓴다고 갑자기 전국 각지의 재개발 계획이 없어지거나 모든 죽어가는 고양이들이 되살아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누군가는 인간의 욕심 아래에서 목숨을 잃는 생명들이 있음을 말해야만 할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인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비인간 동물의 권리에 관해서 이야기하겠다며 야심 차게 시작했지만 내가 죽을 때까지 고양이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할 것임은 자명하다. 인간의 시선에서 멋대로 해석하고 결정하는 짓을 반복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의구심과 찜찜함에 부딪힐 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내가 근본적으로 ‘인간이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기에 내가 이 한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프랑스의 철학자 레비나스에 의하면 주체의 세계는 타자에 의해 구성되며, 따라서 타자와의 관계는 타자성으로부터 사유되어야 한다. 주체의 자유보다 타자가 요구하는 정의를 우선해야 하며 그것을 적극적으로 상상해야 하는 것이다(손영창, 2014: 290; 레비나스(1971)에서 재인용). 이러한 그의 주장처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면서도 윤리적 책임과 의무를 가장 먼저 고려하는 태도가 아닐까. 


 “결국에는 홀로 주체의 자유가 몰고 올 전쟁을 극복하고 타자와의 공존의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홀로 있는 주체나, 전쟁에서 살아남은 주체들 간의 계약이 아니라 전쟁에서 억압당하고 착취당한 타자의 자유와 권리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우선성은 윤리적 고려로부터 출발해서 가능하다(『전체성과 무한』 (Totality and Infinity)(Emmanuel Levinas)).” 


 비인간들은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들이며 인간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많다. 병에 걸린 길고양이들은 인간의 치료가 필요할 것이고, 재개발 지역의 고양이들은 인간이 주는 밥 없이는 굶어 죽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도 어느 재개발 지역에서는 고양이가 건물 잔해에 깔려 목숨을 잃고 있을 수도 있다. 인간의 적극적인 돌봄 의지 없이 도시에서 고양이가 자신의 생을 유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이는 고양이가 인간에 비해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양이가 살고 있는 ‘도시’라는 공간 자체가 인간을 기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만을 기준으로 설계된 공간에서 이에 속하지 못한 생명체들은 인간에게 의존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어쩌면 고양이를 비롯한 비인간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윤리적 차원의 문제를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 어떻게 조직되고 설계되어 있는지, 그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출발점이 될지도 모른다.



편집위원 은희 | a0520choi@naver.com


[1] “동네고양이와 활동가들의 숨겨진 생생한 이야기,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요” (2023.04.20.). 한국일보.

[2] [뷰엔] 재개발에 사람은 떠나지만, 길고양이는 남는다 (2020.03.19.). 한국일보.

[3] [정성철 칼럼] 2020년, 철거 지역엔 여전히 망루가 있다 (2020.01.20.). 민중의소리.

[4] ‘집에 머물라’면서 집을 빼앗아 갔다 (2020.10.23.). 비마이너.

[5] “집창촌서 주거단지로”...환골탈태 ‘청량리’ 집값 들썩 (2023.07.12.). EBN 산업경제.

[6] 둘리와 응팔의 고향 도봉구, 환골탈태하나…재개발·재건축 14곳 진행 (2023.06.08.). 비즈한국.


참고문헌


논문 및 저널

김영걸 (2021). 레비나스 대면 윤리의 동물 적용 가능성 고찰. 현상학과 현대철학, 90, 35-56.

박주식 (2013). 윤리학과 해체론 사이에서: 레비나스와 데리다 가로지르기. 새한영어영문학, 55 (1), 21-46.

손영창 (2014). 간주관성에서 절대적 타자성으로 - 사르트르, 레비나스, 데리다에 관해서. 대동철학, 66, 275-302.


기사 및 온라인 자료

고은경 (2023.04.20.). “동네고양이와 활동가들의 숨겨진 생생한 이야기,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요”. 한국일보, Retrieved from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41916310001618?did=NA

정성철 (2020.10.23.). ‘집에 머물라’면서 집을 빼앗아 갔다. 비마이너, Retrieved from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51

정성철 (2020.01.20.). [정성철 칼럼] 2020년, 철거 지역엔 여전히 망루가 있다. 민중의소리, Retrieved from https://www.vop.co.kr/A00001462253.html

어기선 (2023.01.20.). [역사속 오늘리뷰] 1월 20일 용산 참사 발생. 파이낸셜리뷰, Retrieved from http://www.financialreview.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450

송지혜 (2021.01.16.). 재개발 지역에 남은 영역 동물 고양이. 시사IN. Retrieved from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639

박지윤 (2020.03.19.). [뷰엔] 사람 떠나도 고양이는 남는다… “재개발은 거대한 학대의 장”. 한국일보. Retrieved from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2003181317729606

이승욱 (2022.06.24.). 인천 재개발구역 ‘고양이 이사작전’...”까망아 이젠 떠나야 해”. 한겨레,  Retrieved from https://www.hani.co.kr/arti/area/capital/1048343.html


인스타그램, @dunchoncat. 접속일 2023.08.12..


영상자료

정재은 (2020). 고양이들의 아파트. 영화사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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