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편집장 현정
여러분의 안부를 물으며 이 면의 운을 띄워 보아도 괜찮을까요. 감히 무엇부터 말할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는, 그래도 같은 슬픔에서 시작하고 싶어 어떠한 사건을 배치해 보지만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다른 사건들이 눈에 밟혀 ‘너무 많은 일들’이라며 얼버무리곤 불성실해질 수밖에 없는 요즘, 여러분은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가요. 온갖 곳에서 쏟아지는, 각기 다르지만 종종 닮아 버린 슬퍼할 이유들을 보고 읽다 보면, 내가 보고 읽는 사람이라는 사실, 그리고 대부분 보고 읽을 뿐인 사람이라는 사실이 무겁고 무섭게 다가옵니다.
수전 손택은 그의 책 『타인의 고통』에서 전쟁과 사진을 중심으로 이처럼 고통을 쳐다보는 것에 관해 말합니다. 그는 보는 사람으로서 우리 위치의 한계를 날카롭게 인정합니다.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올 수 있는지, 그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할 수 있는지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라고요. 우리는 이미지를 통해서 본 것에 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곤 하며, 이는 우리에게 좌절감을 안겨 준다고요. 하지만 그는 보고 있는 우리의 거리가 잘못된 것만은 아니라고 등을 토닥여 주기도 합니다.
사진은 현실을 추상화하므로 뭔가 도덕적으로 그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며, 저 멀리 떨어진 채 타인의 고통을 겪어볼 수 있는 권리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지금까지 시각의 특징을 찬양해 온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지나치게 인적(또는 도덕적) 대가를 지불해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뒤로 물러선 채 사색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옛 선인들의 말을 빌려 말해보자면,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그와 동시에 누군가를 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1]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도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도 말합니다. 우리의 생각 혹은 감정은 변하기 쉬우며,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곧 시들해지는 법이라고 말입니다. 쳐다보는 당신의 감정을 오직 연민만으로 간추릴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손택의 논의를 따라 글을 이어 보자면, 손택은 연민이라는 감정적 반응이 우리의 무력함 뿐 아니라 무고함을 증명해주며, 이는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거나 부적절한 반응이 될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쓰며 우리의 등을 토닥이던 바로 그 손으로 같은 등을 떠밉니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2]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맨 처음의 행동을 해볼 수 있을까요. 그 고민을 지니며 모아 본 몇 개의 방법들을 나누어 봅니다.
누군가는 다음 장에 놓인 방법들 역시 쳐다보는 것에서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고 평할지 모릅니다. 미안하지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잘 닦여진 가상 공간을 통해 다가가는 이야기, 그리고 너무나 간편한 노력으로 가능해지는 100원만큼의 기여는, 어쩌면 여러분이 생생한 그들의 고통을 더 빠르게 삼키고 잊는 데 도움을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무책임한 자기만족만으로 귀결할 위험을 가지고 있음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들을 소개하려는 이유는, 이 창구들이 누군가에게는 정말 최초의, 최선의 발걸음이 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가령, 부지런히 새로운 아픔의 범위를 넓혀 가기에는 도무지 힘이 나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그럴 때를 위해 안전장치를 미리 깔아 둡시다. 두 팔을 뻗어 신문을 펼쳐 보지 못하는 날에도 메일함의 뉴스레터 혹은 유튜브 채널의 새 동영상은 성실하게 당신의 손끝을 찾아갈 것입니다. 함께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또 이렇게 전달하고 있는 사람들이 화면 너머에 있음을 어렴풋이 상상해볼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 나갈 힘이 없는 날에는 당신에게 도착한 이야기부터 들어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곤 그렇게 조금은 덜 수고스럽게 연결된 아픔들에 대해 손가락을 움직일 힘 정도까지만 만들어 봅시다. 공감 버튼을 누르거나 게시물을 작성해 딱 100원을 얻고, 꼭 그만큼 정확하게, 당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그것에 대응하는 이들에게 도착하도록 합시다. 겨우 100원만큼의, 그러나 분명한 완주는 그들이, 그리고 당신이 다시 일어나 볼 힘을 내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렇게도 높아만 보이던 연결과 실천의 문턱들을 하나씩 낮춰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더 오래, 멀리 걸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래의 첫 방법들에서 당신이 이어나갈 발자국들이 궁금합니다.
- 다음 방법들은 대부분 온라인 환경에서 참여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링크 접속이 편리하도록 다음 노션 페이지에 방법들을 정리해 두었습니다. (http://tiny.cc/komun-window)
- 혹시 이 방법들 외, 알고 계신 연결과 실천의 창구들이 있나요? 고대문화와 나누고 싶으시다면 다음 설문지에 남겨주세요! 감사히 위 노션 페이지에 추가해 두겠습니다. (http://tiny.cc/komun-your-window)
편집장 현정 / byulgot@gmail.com
[1] 수전 손택 (2004). 타인의 고통. 171-172.
[2] 같은 책. 154.
참고문헌
단행본
수전 손택 (2004). 타인의 고통. 이재원 (번역).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