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생이 필요한 갱년기에 대한 지난 글에 이어 사랑이 필요한 사춘기에 대해 써보겠다. 두 명의 사춘기 동거인을 겪었고 하나를 마저 겪고 있는 관찰자의 직간접 체험을 멋대로 섞어 푸는 썰이니 맹신하지는 말아 주세요.
사춘기는 말 그대로 봄(春)을 생각(思)하는 시기다. 이것은 뭘 뜻하는가? 지금이 겨울이란 뜻이다. 한창 자랄 나이가 웬 겨울이냐고? 사춘기라고 여겨지는 10대 초중반 아이들을 관찰해 보면 확실히 겨울이라 할 만하다. 차갑고 날카롭다. 이들의 냉랭함은 질풍노도, 즉 모진 바람과 성난 파도에 비유되곤 한다. 그 말과 행동은 겨울 바다의 종잡을 수 없는 날씨와 비슷하다. 귀엽고 고분고분하던 아이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짜증과 반항, 퉁명스러움과 울부짖음이 난무한다. 많은 부모들이 힘들어한다. 설득이나 타협을 시도하지만 녹록지 않다. 제 앞가림할 만큼 키워 놨더니 이제 정신적인 스트레스다. 육체육아 대신 정신육아의 단계인 것이다.
느닷없는 눈물의 낀둥이와 막무가내 셧다운의 막둥이. 사춘기의 양상도 사람마다 다르다.
이때가 겨울인 것은 인생의 다음 단계와도 관련이 있다. 이십 대는 청춘(靑春), 푸른 봄으로 표현된다. 중년 이후의 인생은 누런 색이다. 황혼(黃昏)인 것이다. 십 대 아이들의 소원을 물으면 십중팔구 빨리 어른이 되어 자유를 획득하는 거라 대답할 것이다. 청춘을 생각하며 기다리는 시기는 당연히 겨울 아니겠는가? 사춘기라는 명칭도 이해가 된다. 억지인가?꿈보다 해몽인가? 어쨌든...
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사춘기에 대해 많은 부모들이 이렇게 반응했다.
너만 마음을 고쳐 먹으면 될 것을, 도대체 왜 그러니?
마음먹기에 따라 말과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었다. 삐딱함은 훈계로 교정된다고 생각했다(이전 세대의 부모는 매로 다스려야 한다고 믿었다). 지금은 많이 알려진 것처럼 사춘기의 양상은 아이의 뇌가 어른의 뇌로 성장하는 과정에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두뇌의 신경물질이 정상적으로 이동하지 않아 사실 판단이 어렵다고 한다. 외부 정보가 왜곡되는 것이다. 감정 조절을 다루는 뇌 기능도 엉망이 된다(어디까지나 성인의 기준에서). 종합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은커녕 자기만의 세계에 갇히기 쉽다.
뽕잎을 먹고 있는 누에다. 사람으로 치면 유아기인 애벌레 시기. 얼마 후에 사춘기인 번데기가 될 것이다.
나는 이런 과학적인 분석 말고 문학적인 해석에 끌린다. 성충인 나비가 되기 전에 고치를 틀고 꼼짝 않는 번데기의 단계... 그러므로 기지도, 날지도 않는 시기에 귀엽거나 성숙하기를 기대하는 건 잘못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만약 사춘기가 없다면 아이의 두뇌와 성인의 두뇌는 똑같다고 볼 수 있다. 양과 크기의 변화만 있을 뿐... 질적인 전환이 있으려면 무언가 새로운 단계가 있는 게 당연하다.
큰 도움이 되었던 EBS의 다큐 방송. 사춘기 쥐의 행동 관찰을 통해 이 시기의 언행이 생물학적으로 불가피한 것임을 알려주었다.
성별과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사춘기는 중2 병이라고도 불린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1학년은 긴장과 적응의 학년이다. 언행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반면, 3학년은 진로 부담이 큰 학년이라 사춘기 특성이 묻히는 경향이 있다. 중학교 2학년이야말로 바람이 가장 모질고 파도가 제일 높은 조건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성장이 빠른 딸의 경우) 초등학교 6학년도 중2 못지않은데 부담은 적고 적응은 끝난 시기라 그런 것 같다.
내 동거인들의 사춘기 증상은모두 달랐다. 큰둥이는 느닷없는 분노를 표출하곤 했다. 낀둥이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맥락 없는 눈물이었고 이제 사춘기 초입인 막둥이는 비밀주의 양상을 보이는 것 같다. 다큐멘터리와 책, 선배들의 조언으로 나름 대비한다고 했는데도 막상 아이들의 이런 태도를 겪으면 매우 힘들다. 나에게도 감정과 주관이 있기 때문이다. 해결이 아니라 인내만 요구하는 전쟁이라는 사실은 더 힘들다. 뭔가 시원한 결말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아빠들에게 특히더 그렇다. 반면 엄마들은 감정 동화에 따른 실망감과 배신감이 어려운 요소다. 내 배 아파서 낳은 내 새끼가 나한테 이럴 수 있나 싶은 것이다.
말이 말을 듣지 않으면 힘들다.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이 사는 일은 굉장한 인내를 요구한다. 하지만 항상 고삐를 쥐고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엄마의 갱년기와 아이의 사춘기는 최악의 조합이란 말이 있는데 어느 정도 사실이다. 엄마뿐 아니라 아빠도 마찬가지다. 중년은 헛헛함의 시기다. 청년기의 영화를 뒤로 하고 쇠퇴를 받아들이는 나이다. 이런 시기에 자녀의 사춘기를 만나면 멘탈이 붕괴된다. 내 뜻대로 안 되는 일이 늘었다. 그것도 내 유전자가 말이다. 가뜩이나 팔자주름과 뱃살이 신경 쓰이는데 아이마저 제멋대로다. 세월의 야속함이 지나치다.
여기서 갱년의 부모는 여러 유형으로 나뉜다. 싸워서 아이를 이기려는 형, 세월과 나이를 한탄하는 형, 사춘기에게 비위를 맞추며 평화를 지키는 형 등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거리를 두는 형이 가장 낫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닌 만큼 개입을 줄여야 한다. 알아서 판단하고 생활하도록 내버려 둘 필요가 있다. 여기까지 읽고 말은 쉽지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맞다. 어려운 일이다. 특히 학업에 있어 중요한 시기라 챙겨주지 않으면 낙오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춘기는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만큼이나 거칠다. 진압해도 의병은 또 자연발생한다. 일본 경찰과 군대가 아무리 통제 안에 넣고 싶어도 독립의 의지는 맹렬하다. 봄을 생각하는 존재 자체가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갱년기의 부모는 자기 자신의 갱생에 더 집중하는 편이 낫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무한 불확실성의 시대다. 아이들의 미래를 부모의 경험으로 예단하는 건 매우 위험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내 얘기가 아니라 미래학자들의 말이다. 수렵이나 농경의 시대는 대대로 내려오던 노하우를 답습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고 실패를 막는 방법이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서 미래세대에게 가장 방해되는 요소가 부모의 경험일 수도 있다고 썼다. 이는 나처럼 아이를 사랑하지만 방임을 추구하는 부모에게 좋은 핑계가 된다(감사!).
우리는 자녀에 대한 책임감이 지나치므로 어느 정도 무책임해도 된다. 하물며 갱년기와 사춘기의 전쟁이라면 더욱! 사춘기에 필요한 사랑은 어쩌면말없이 가만히 봐주기일지 모른다. 부모의과도한지휘 욕심은 봄을 꿈꾸는 자녀를 겨울에 가둘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