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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리 피디 Aug 06. 2024

휴가

자리를 비운다는 것


거리가 한산합니다. 휴가철답네요. 올림픽이 열리는 파리에서는 7~8월 한두 달 동안 거의 도시가 마비된다는데 우리는 한두 주 정도 느슨해지는 정도 같아요. 노동에 대한 인식이 나라마다 다르듯, 휴가에 대한 태도 역시 다릅니다.


휴가, 쉬는 짬


휴가는 쉴 휴(休), 겨를 가(伽)입니다. 중국어, 일본어도 같은데 중국어에서는 놓을 방(放)을 써서 '방가'라고도 하는군요.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서는 일하는 것에 대한 반대의 의미은 것 같아요.


서양으로 가봅니다. 영어는 미국과 영국이 좀 다른데 미국은 vacance, 영국에서는 holiday라고 합니다. 추측하다시피 홀리데이는 성스러운 날(holy day)에서 왔습니다. 종교적인 색채가 강합니다. 이태리어 ferie가 같은 계열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긴, 성일(聖日)도 하나님이 쉬었던 날, 즉 안식일이니까 크게 보면 같은 의미겠네요.


미국의 vacance는 프랑스어인 바캉스에서 비롯됐고 비운다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있던 자리를 비우고 떠난다는 의미입니다. 스페인어 vacación, 이태리어 vacanza 모두 같은 뿌리입니다. 스페인어 permiso, 이태리어 permesso휴가를 뜻하기는 하는데 허락의 의미가 짙습니다. 중세 신분사회에서는 영주가 허락을 해야 농노들이 휴가를 갈 수 있었겠죠.


차고 비는 에너지의 원리


모든 자연현상은 순환이 기본인 듯합니다. 돌고 도는 것인데 태양과 모든 행성, 위성들이 돌고, 계절이 됩니다. 자연계뿐만 아니라 인간계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직선을 살고 죽는다 생각하지만 크게 보면 순환입니다. 우리 몸도 자연으로 돌아가고 영혼도 돌아가시잖아요. 역사도 돌고 돈다고 하죠.


순환을 이분화, 단순화하면 차고 비는 것입니다. 봄 가을을 생략하면 여름은 빽빽하고 겨울은 빈 계절이 됩니다. 달은 뚱뚱했다가 홀쭉해지고, 이 때문에 바다도 간만(干滿)-밀물과 썰물이 생깁니다(달의 인력 때문이라는데 문과인 저는 이게 아직도 이해가 안 됩니다). 모든 게 full-empty의 반복이에요.


사람과 사회도 자연의 일부이므로 이 원리가 적용됩니다. 사람마다 조울이 있고 집단에는 부침이 있죠. 어떤 상태가 항상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노동과 휴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생산성이 유지될 수는 없어요. 농사든 제조든 서비스든 부가가치가 높을 때와 효율이 떨어질 때가 있는 법이죠. 그래서 어떤 이들은 사회 변화를 물리학 개념인 엔트로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바뀐 세상의 풍경, 여름휴가


여름에 쉰다는 건 인간에게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우리 종 호모 사피엔스의 대부분은 수렵과 채집으로 연명하던 기간인데(지금이 자정이라면 농사는 23시 40분에 시작되었다나?) 여름은 쉬는 계절이 아니었을 겁니다. 단백질을 공급하던 사냥거리, 비타민을 제공하던 채집거리는 여름에 풍성했겠죠.


정착과 경작, 목축이 자리 잡은 농경사회에서도 여름은 가장 바빴습니다. 역시 곡물 성장이 가장 가파른 계절이기 때문이죠. 노 저어야 하는 밀물 때입니다. 정작 농부에게 휴가는 겨울이었습니다. 할 일이 없는 빈 들판의 계절이죠. 어부에게도 낚을 물고기가 없고 벌목꾼에게도 벨 나무도 없는 계절이었습니다.


여름휴가는 산업화 이후에 일반화됐을 거예요. 공장에서 물건 만드는 일은 기온과 날씨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운 날씨에 공장에서 일하연 일의 능률이 떨어지죠. 기계도 과열되고요. 이때 쉬는 게 여러모로 합리적입니다. 제조업이 쉬면 제조노동자를 상대하는 서비스업도 쉬는 게 좋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름=휴가 공식이 자리잡습니다.


방전과 충전의 무한궤도, 영원할까?


미래로도 가보겠습니다. 슬슬 산업화도 저물고 정보화를 넘어 인공지능과 로봇의 시대가 오고 있어요. 노동과 휴식은 동전의 양면인데 앞으로는 노동의 개념이 확 바뀔 예정이니 휴가 패턴이나 양상도 변하겠죠?


제가 미래학자는 아니지만 주워들은 풍월을 재료로 예측해 보자면, 앞으로 노동시간은 줄고 휴식시간은 늘 것 같습니다. 휴가도 특정 계절에 몰리지 않고 분산될 것 같고요. 농경과 산업화 시절에 미덕이었던 근면, 성실을 지금은 찾기 힘들고 이제 쉬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일터에 베이비붐 세대 선배들 조금 남아 계십니다). 대신 휴식이 당연한 권리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방전 자체가 충분(?)하지 않아 충전의 밀도 역시 낮아질 것 같습니다. 열일하고 푹 쉬는 게 아니라 깨작대며 일하니까 쉼도 애매해집니다. 육체노동뿐만이 아닙니다. AI가 대체할 테니 지적 활동 자체의 강도가 낮아집니다. 배터리가 완방 되지 않으니 완충도 필요 없어지는 셈입니다.


그래도 인간이 완전히 로봇으로 변하지 않고 유기체의 몸을 지니는 한, 순환의 법칙은 유효할 겁니다. 하지만 몰아서 쉬고 떼로 쉬는 문화는 바뀌지 않을까요? 


노동의 자리에서 벗어난다는 것


현재로 돌아와 마치겠습니다. 재빠른 기업들은 이미 일터를 놀이터처럼 바꿔놓았대요. 일한다는 생각을 덜 하게 만들어야 효율이 오르는 아이러니입니다. 그러니 테크 기업들 너무 부러워 맙시다. 영악한 거예요.


바캉스는 노동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인간다움의 필수요소입니다. 낯선 곳에 가야 있던 자리의 의미가 도드라집니다. 여행의 의미와도 같죠. 그러니 휴가 내고 집에서 쉰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하다못해 도서관 백화점이라도 가세요. 비워야 할 공간은 일터뿐만이 아니에요. 집에서도 벗어나야 가정생활도 충전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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