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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리 피디 Jul 30. 2024

시큰둥의 나라

올림픽에서 보는 프랑스의 반항심


프랑스 파리에서 올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1924년 이후로 꼭 100년 만이라고 하니 그들에게는 감격스러울....까요? 올림픽을 반대한다, 센강에 똥을 싸자 등 대회에 대한 불만이 쏟아집니다. 누구를 위한 행사인가를 따져 묻습니다. 역시 항과 혁명의 나라답네요.


시크하다 못해 시큰둥한 국민성


이 나라의 객기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걸 풀면 역사 시리즈가 될 테니 각설합니다. 주제에 부합하게 언어로 소개할까 합니다. 프랑스인들이 자주 쓰는 말 중 하나가 Je m'en fiche (쥬멍피슈)라고 해요. Je m'en fous (쥬멍푸)도 비슷한 뜻인데 번역하자면 내 알 바 아니다입니다.


이 문장은 그들의 시크한 개인주의를 드러냅니다. 친절하기보다는 도도하고 따뜻함 대신 날카로움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눈치가 없으면 욕을 먹는데 프랑스에서는 자기주장이 없거나 약하면 깜보입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받는 걸 매우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 관심 밖의 슈를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느낌입니다. 그러니 쥬멍피슈를 입에 달고 다니겠죠.


똘레랑스의 뒷면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는 관용(tolerance)의 나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개인주의와 관용의 정신이 어울리나 싶은사실 이 둘은 한몸이고 동전의 양쪽면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틀 안에서의 자유로 여기지만(방종은 자유가 아니다) 프랑스에서 자유는 무제한입니다(제한되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사학년 중반 딱한번에서 저는 이런 태도를 견문 관찰한 바 있습니다) 멋지게 살지만 멋대로 사는 파리지엥


자유라는 틀을 절대적으로 여기므로 다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도 신경 쓰지 않는 겁니다. '알게 뭐람'이라고 중얼거리면서요. 이게 관용으로 이어집니다. 내 자유가 중요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자유를 최대한 인정하는 것이죠. 관여가 아니라 무관심의 형태로요. 


그들은 알고 있는 겁니다. 오지랖을 떠는 순간, 순수한 자유는 없어진다는 걸요. 위대한 시민정신 똘레랑스는 방임에서 구현됩니다. 우리나라에서 관용은 용서한다는 느낌인데 저들은 냅둔다(laisser faire)에 가까워요. 뭐라고 지껄이든, 성 정체성이 어떻든, 무슨 옷을 입든 말든 각자의 자유라는 것이죠. '빠리의 택시 운전사'를 쓴 고 홍세화 씨는 정치적 망명 이후 그 이유를 프랑스인들에게 납득시키는 데 애를 먹었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상을 가졌다고 가두거나 때리거나 입국을 거부하는 정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죠.


프랑스라는 아이러니


영어에서 나(I)는 늘 대문자입니다. 그러나 불어에서 나(je)는 문장 맨 앞이 아니면 다른 단어들처럼 소문자로 씁니다. 자기애가 최고인 사람들의 언어치고는 아이러니하죠(나라 이름도 대문자로 쓰지는 않습니다). 제가 느끼는 첫 번째 아이러니입니다.


한편 프랑스는 파업(grêve)과 시위(manifestation)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얼핏 이상해요. 개인주의의 사회인데 시위가 왜 벌어질까요? (전체주의 습성이 강한 일본에서 시위가 벌어지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만).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이들의 데모는 공동체 정신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이해관계 속에서 진행됩니다. 내 삶과 직결되는 문제에만 행동하는 거죠. 사회적으로는 왜 용인되는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쥬멍피슈 되겠습니다. 파업이 벌어졌군, 불편하겠군, 어쩔 수 없지, 쟤들의 자유니까, 쥬멍피슈, 이런 식입니다.


인류에게 자유를 선물했다는 프랑스 대혁명도 공화정을 목표로 시작된 게 아닙니다. 먹을  빵이 부족한데도 왕이 영국을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미국에 퍼주기를 멈추지 않은 게 발단입니다. 먹고사니즘이 혁명의 원인이었던 겁니다. 소위 68혁명이라고 불리는 1968년 젊은이들의 봉기 역시 그 출발은 욕망이었습니다. 대학교 기숙사에서 남녀가 함께 지내는 걸 주장하며 시작된 거랍니다. 자유라는 거창한 구호의 뒷면은 이렇게 개인들의 욕구가 숨어 있습니다.


거창한 담론이나 이타심이 아니라 당장 내 앞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필요하면 왕의 목도 단두대에 올리는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올림픽을 반대하는 파리 시민들 역시 물가가 오르고 번거로운 통제가 벌어지니 반감을 드러내는 겁니다.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요소에 저항하는 정신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합니다.


객기의 나라 프랑스


우리 민족은 기본적으로 눈치와 순응의 유전자가 있는 것 같아요. 비판과 저항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동력은 프랑스와 완전히 달라요. 우리는 정의감과 공명심입니다. 공동체를 위한다는 주장이 아니면 혁명은 고사하고 시위조차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개인들의 욕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의병, 독립운동, 민주화운동과 프랑스에서 벌어진 혁명을 비교해 보세요.


저는 프랑스가 객기客氣, 즉 아웃사이더 정신을 가진 것 같아요. 고 신용복 선생은 이렇게 썼습니다. 모든 창조는 중심이 아니라 변방에서 일어나며 특히 콤플렉스 없는 자유로움에서 비롯된다고요. 이 말이 프랑스인들의 창의성을 잘 설명해 주는 듯합니다. 당연한 것을 거부하고 따지기를 좋아하는 습성이죠.


자유분방하다 못해 어수선했다는 평가를 들은 파리 올림픽 개막식 행사. 물론 그 평가에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올림픽 개막 행사를 뒤늦게 봤습니다. 이들의 자유분방함이 잘 드러나더군요. 으레, 당연히, 모름지기에 물음표를 붙이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내는 것입니다. 다음의 일화를 소개하며 이번 말모이를 마칩니다.


1980년,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죽었을 때 프랑스 국민들은 추모가 아니라 시위를 했는데 역시 그들의 객기는 죽음도 못 말립니다. 구호가 이랬다죠.

우리는 사르트르의 죽음에 반대한다

p.s 대문 사진은 영국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이안 무어가 프랑스 시골로 이사한 뒤의 생활과 느낌을 쓴 책입니다. 엄청 재미있습니다. <영국에서 나흘, 프랑스에서 사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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