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이든 지칭이든 인칭(人稱)은 그 사회의 계급과 서열을 보여줍니다. 새로 생기는 낱말은 계급투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알려줍니다. 가령, 얼마 전에는 한남, 한남충이란 말이 돌았는데 젊은 남자를 비하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남자'의 줄임말인데 용도가 그렇다 보니 '한심한 남자'로도 통용되죠. 반남성주의, 극단적 페미니즘이 득세하면서 생겨난 말입니다.
조선이 활짝 연 여성 차별
여성 차별은 아주 오랜 얘기지만 조선이 열리면서 성별의 구별은 또렷해졌습니다. 불교 국가였던 고려시대에는 상대적으로(어디까지나 조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성의 결정권과 사회적 위상이 높았답니다. 남녀 구별의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한 조선이 개국하면서 여자들의 입지와 위상은 크게 추락합니다.
아직 고려의 분위가 남아 있던 조선 초기에 여자들의 활약상을 보면 과도기였음을 알 수 있죠. 태조 이성계가 마누라인 신의왕후 눈치를 많이 봤다는 것, 그 아들 태종 역시 왕자의 난 과정에서 원경왕후의 지시에 따랐다는 것 등을 봐서는 여성의 결정권이 작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숭유억불 정책이 실효를 거두면서 여성의 사회적, 그리고 가정 내 입지는 매우 좁아졌습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원래 주나라 왕의 말이었지만 조선에서 더 자주 사용되었죠. 가끔 조선 왕실에도 여성에게 권력이 집중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세조의 왕비인 정희황후 윤씨,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 한씨, 영조의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등입니다. 특히 정순왕후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암탉으로 낙인찍혔죠. 개인의 능력이나 철학에 대한 평가보다 성별로 매도되는 시대였습니다.장희빈과 같은 케이스를 표독스러움으로, 신사임당을 조신함으로 규정함으로써여자가 나대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거둔 겁니다
여성을 향한 멸칭들
미망인(未亡人)은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남편을 여읜 여자를 일컫는 말이죠. 이 역시 고대 중국의 언어였는데 조선에서 널리 통용됐습니다. 이 말에는 남편이 죽으면 따라죽어야 한다는 섬찟한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습니다. 남편을 살해한 것도 아닌데 '버젓이 살아있다는 저주'를 받는 죄인의 입장이 되는 것이죠.
비극적인 역사에 얽힌 말도 있습니다. 바로 환향녀(還向女)인데요,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란 뜻입니다.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 이후 '대규모 볼모단'이 청의 수도인 심양으로 끌려갔습니다.
조선의 생산품 중 가장 인기가 많은 건 '여자'였다고 합니다. 위로는 왕자들(소현세자, 봉평대군), 아래로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숱한 생이별의 현장이었을 겁니다. 강제로 국제결혼을 당해 끌려가야 했던 처녀와 심지어 유부녀도 많았다고 하죠.
십수 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은 환영과 위로를 받았을까요? (아버지인 인조에게 독살당한 소현세자 얘기는 빼고요) 여자들은 버젓이 살아 돌아온 염치없는 존재로 낙인찍혔습니다. 집안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는 이유였죠. 환향녀가화냥녀로 바뀌면서 여자에게 퍼붓는 대표적인 비속어로 자리 잡습니다.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어요. 누구 잘못으로 끌려갔는데 누굴 손가락질한다는 거죠? 이 굴욕의 장본인은 인조를 필두로 한 사대부 남자들이었습니다. 못난 자신들을 돌아보기는커녕 무고한 희생을 치른 약자를 저주한 것입니다. 이데올로기는 이렇게나 무섭습니다.
험담과 저주의 말 잔치
지금은 어떤가요? 메갈, 한남, 김여사, 잼민이, 급식, 흑형, ~충.. 성별, 나이, 인종 등 존재 자체를 비하하는 말들이 난무합니다. 조선시대와는 달리 억울함을 공격으로 되갚을 수 있어 다행인가요? 누구든 욕설을 퍼부을 수 있어 민주화된 걸까요?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이, 조선시대의 여성 차별이, 근대 미국의 노예 거래가 지금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다면요. 탈레반이 재집권한 아프가니스탄은 어떤가요? 읽으면서 가장 많이 운 책, 두 권을 소개하면서 이번 주 말모이 마칩니다.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쫒는 아이, 천 개의 찬란한 태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