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노벨상 수상에서 보듯 비참한 역사는 절망의 배경이기도 하지만 감동의 재료이기도 하다. 일이 전개되는 과정은 불확실하고 가치중립이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평가와 판단이 생기기 마련이고 우리는 지나간 일에 어떤 필연성을 부여하고 싶어 진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아마도 가장 많이 영화화된 역사일 것이다(심지어는 히틀러도 선전용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의 발전과 대중화의 시기였기 때문이고 인류 역사의 가장 큰 비극이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 제작자들에게는 독이 든 성배와도 같다. 진부한 클리셰로 취급될 우려가 큰 것이다. 지금 떠오르는 제목만 해도 10개가 넘는다. 명작이고 히트작이니 내 머릿속에 아른거리지 그저 그런, 폭망한 작품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페르시아어 수업은 진부함에 도전해 성공한 영화다,라는 말은 하나마나한 말이겠지. 모든 작품의 성공은 그런 거니까... 뻔함에서 그치느냐, 보편적 재료에서 관심과 공감을 끌고 독창성으로 심장을 찌르느냐, 어렵고도 뻔한 예술의 전략이다.
시공의 뻔함은 2차 세계대전이란말이면 끝난다. 독특한 건 언어가 이야기를 이끄는 주된 매개라는 점이다. 처형 직전의 유태인이 페르시아인이라고 우기고, 때마침 독일군 장교가 페르시아어를 배우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극적으로 죽음을 모면한다. 문제는 포로로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거짓으로 언어 하나를 통째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 체계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래, 아주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그런데 한 사람의 유태인이 그저 살기 위해 엄청난 양의 단어와 문장 구조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이 영화의 첫 번째 독특함이다.
이것은 약간 코미디적이다. 물론 죽음의 엄중함(첫 장면이 롱테이크로 보여주는 살벌함)은 가볍지 않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페르시아어를 창작해서 장교에게 가르치는 상황은 더 우습다. 들킬까 봐 아슬아슬하기도 하다.실화 기반의 영화라니 더 마음이 졸여진다.
전쟁은 막판으로 흐르고 영화도 끝나간다. 여기서 영화의 두 번째 위대한 독특함이 드러난다. 포로 유태인이 살아남기 위해서 창작했던 가짜 페르시아어는 위대한 기능을 한다(스포일링이 확실하니 이하 침묵). 주인공이 포로가 진술하는 장면과 장교가 이란으로 탈출하려다 가짜 페르시아어를 지껄이면서 잡히는 장면은 묘한 대비를 이룬다.
로베르트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나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를 소환하는 영화다. 얼마나 흥행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결말 부분에서 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눈물이 핑 돈 관객이 많을 것 같다.
역사는 계속 돈다고 했나? 다시 전쟁의 시대다.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에 뛰어들었다고도 한다. 이스라엘과 이란이 포격을 주고받는데 공교롭게도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한쪽은 유태인 인물로, 다른 한쪽은 언어로 출연했다. 물론 가짜이긴 하지만...
주인공 배우는 비굴함을 잘 연기했는데 진짜 전쟁이 난다면 인간으로서의 모든 품위는 버려야 한다. 비굴해져서라도 평화를 얻는 쪽이 당당하게 전쟁을 각오하는 것보다 낫다고 믿는 이유다. 모든 언어에서 '평화'라는 낱말이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억울함'이란 단어는 사라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