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88 중앙우편대대

소수자의 역전 스토리

by 이지완
약도 독도 되는 인간의 가치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는 종이 된 비결을 이렇게 분석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을 만들고 이에 스토리를 입혀 전파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념체계는 소속된 구성원들로 하여금 참여를 넘어 충성과 복종을 이끌어내게 된다. 욕망의 메커니즘도 같다.


영화를 보면서 하라리의 분석이 자꾸 떠올랐다. 흑인-여성 인권이라는 주제와 세계대전 중 미국의 역할이라는 배경 모두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실화를 배경으로 했다니 더욱 그렇다. 평등, 평화, 국가의 존재 등 모든 가치는 개인들을 홀린다.


여성, 흑인, 전쟁, 차별


영화의 시작은 역시 전투 장면이다. 관객을 잔뜩 긴장시키고 시작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유럽의 어느 전장에서 죽는 파일럿의 품에 피 묻은 편지 하나가 발견된다. 플래시백으로 돌아가는 시공간은 몇 달 전의 미국. 젊은 남녀, 유태인 백인 남자와 흑인 여자의 썸이 펼쳐진다. 입대 직전 남자는 고백을 하고 여자는 기다릴 결심을 한다.


그의 전사 소식에 앓아누웠던 여자는 군에 입대한다. 조지아주에서 훈련을 받는 그녀의 부대(모두 흑인 여성으로 구성됐다)는 드디어 유럽으로 향한다. 그들의 임무는 방대한 우편물 처리. 장병과 가족의 소식이 원활히 전달되지 않아 군의 사기와 국내 여론이 좋지 않기 때문에 생긴 희한한 임무였다.


흑인과 여성이라는 이중차별을 겪던 이들은 보란 듯이 임무를 달성한다. 과장을 기본으로 하는 극의 특성상 불가능한 임무 지시 혹은 실패를 바라는 지휘부의 내심이 부각돼 있다. 그래야 이들의 활약이 돋보일 터. 어쨌든 이들은 편견과 고난을 깨고 임무 수행에 성공한다.


여자는 남친의 피 묻은 편지를 찾게 되고 그의 무덤까지 찾는다. 이제야 그를 보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곁을 지켰던 다른 흑인 병사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영화는 100세 언저리가 된 흑인 여성 군인들의 회고로 끝맺는다.


실제 6888 우편부대의 사진
전쟁과 개인


전쟁은 개인의 비중이 가장 작고 집단의 중요성이 극도로 큰 상황이다. 내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 평화기에는 상상하기 힘들다. 요즘 우리나라가 전시는 아니지만 전쟁 같은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 상생은커녕 살생의 말들이 오간다. 제멋대로 하지 못해 안달 난 미치광이 하나가 초래한 비극이다.


계엄 선포가 초래한 후폭풍의 핵심은 개인 일상의 붕괴다. 전시에 버금가는 공포와 (없어도 됐을) 불필요한 걱정들이다. 집회에는 많은 개인들이 모인다. 찬반을 떠나서 다 안타깝다. 좋게 말하면 민주주의요, 광장의 여론이지만 각 개인의 입장에선 '희생'이다. 참전인 것이다.


감동 뒤쪽에 오는 께름칙함


영화도 그렇다. 감동적인 영화임에 불명하지만 뭔가 개운치 않은 뒷맛이 있다. 후기를 쓰는 지금에야 그 실체를 알 것 같다. 우리에게도 충성할 권리가 있어!라고 강변하는 듯하다. 흑인이어도, 여자라도 나라에 충성할 능력이 있다고! 각자의 행복이 아니라 미국의 안위를 위한 약자의 각성이라는 점.. 그런 측면에서 <포레스트 검프>와도 결이 같다.


이런 부류의 영화 반대쪽에 <퍼펙트 데이즈>가 있다. 퍼펙트 데이즈 이것이 일본 영화라는 점이 흥미롭다. 일본은 전체를 위해 개인이 참고 희생하는 걸로 유명한 나라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모든 배경이 생략된다(어쩌면 그들의 숨겨진 로망인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은 온전히 자기만의 일상을 산다.


약자의 뒤집기는 짜릿하고 감동적이다. 그러나 각자의 행복 이외의 다른 목적이 발견될 때 기분이 상한다. 가령, 직능대표로 국회에 들어간 노동자, 장애인, 성소수자가 권력의 맛을 본 뒤 더 권위적으로 변할 때. 감동적으로 보면 됐지, 이렇게까지 생각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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