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또 천천히 하는 서핑

6개월 만의 서핑, 시즌오픈

by 담다리담

수요일, 선거일이다. 는 휴일이다. 지난주 금요일 점심시간에 부리나케 사전선거를 했다. 미리 백신도 맞아두었다. 수요일에 하려던 일을 모두 당겨서 해치운 이유는 파도가 수요일에 몰려올 예정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번 주는 내내 파도가 좋을 것 같아." 설레는 마음으로 짐을 싼다.


지난 12월 이후 무려 6개월 만이다. 새로운 회사로 이직하는 공백동안 갔던 것을 마지막으로 이후 6개월 간 내 삶에 서핑은 없었다. 너무 추워서, 너무 바빠서, 이유는 많았지만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느라 서핑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별로 없었다. 그 사이 어느새 날은 완연하게 풀려 따뜻한 태평양의 파도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 나에게도 어느새 여유가 찾아온다. 일이 익숙해지고 몸이 근질거리고 하고 슬슬 서핑을 갈 준비를 한다. 몸이 많이 녹슬진 않았을지 집에서 테이크오프 연습을 슥슥 해 본다. 달리기를 하며 나의 체력은 얼마나 줄어들었는 지도 가늠해 본다. 어느새 삭아버린 내 몸뚱이는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쁘지는 않다.


선거일에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서 전날 밤에 일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양양으로 향한다. 오랜만에 마시는 까만 밤의 양양 바다의 공기는 평소보다 더 짭조름하다. 머릿속으로 나는 이미 바닷물을 마시고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다음 날 새벽 네 시반, 전날 선잠을 잔 눈을 뜨고 반쯤 감은 채 옷을 갈아입는다. 전 날 사온 김밥을 차 안에서 입에 욱여넣으며 선스틱을 바른다.


너무 오랜만의 파도라 조금 긴장이 된다. 마지막으로 파도를 어떻게 탔는지 기억이 안 난다. 조심스럽고도 조급한 마음으로 왁스를 바르고 리시를 차고 바다에 들어간다.


이제 막 해가 떠오르는 바다, 아름답다. 패들 해서 라인업으로 들어가는 와중에 옆에서 누군가가 "선셋 같아"라고 하는 얘기가 들린다. '그렇지? 파스텔색 선셋 같아'라고 속으로 말하며 팔으로 물을 부지런히 밀어낸다.


라인업에 도착하자 파도가 온다. 허우적허우적 팔을 젓기 시작한다. '파도를 잡아야 해!' 마음이 급하다. 그러나 파도는 허무하게 지나가버린다. 옆에서 친구는 말한다. "너무 급해"


한숨을 돌리고 보드 위에 앉는다. 익숙한 공기와 냄새,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명상을 할 때처럼 양손을 두 무릎 위에 두고 숨을 들이쉬었다 내쉰다. 후- 하-. 멀지 않은 바다에서 숭어가 포물선을 그리며 튀어나오는 모습을 본다. 작살로 숭어 잡아먹자는 실없는 농을 치며 파도가 오는 지평선을 바라본다. 맞다, 나는 이 장면 그대로를 사랑한다. 하나도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


다음 파도가 온다. 숨을 가다듬고 천천히 패들을 시작한다. 슥슥 물을 미는 느낌이 나쁘지 않다. 착 하고 정신 차리니 나는 파도 위에 있다. 길이 잘 나지는 않지만 어차피 나는 날을 잘 박지 못하기 때문에 괜찮다. 잽싸게 라인업으로 돌아와 다음 파도를 탄다. 오늘 파도가 꽤 잘 잡힌다. 웜업을 하기에 딱 좋은 파도다. 착착착착 하고 물을 밀고 조금 기다렸다가 보드 위로 올라서면 어김없이 파도에 올라탄다. 신이 난 불나방은 지치는 줄 모르고 파도로 계속해서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러기를 어언 한 시간, 팔이 너덜너덜해지지만 계속 탄다. 팔이 아프고 등이 아프지만 계속 들어간다. 약골불나방의 체력은 금세 바닥이 난다. 쉽게 잡히던 파도가 잡히지 않기 시작한다. 파도에서 내려가지 못해 놓치기 시작한다. 아아- 초반에 체력을 조금 아낄걸, 후회를 하지만 이미 늦었다. 항상 있는 일이었다.


온몸은 아프지만, 웜업을 할 때는 온몸이 아프도록 구석구석 풀릴 때까지 타 주는 편이 좋다. 몸이 아프더라도 팔에서 등, 등에서 코어, 코어에서 다리까지 온몸이 차례대로 하나하나 아플 때까지 타 주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몸이 다 풀리지 않아 이 고통스러운 웜업의 과정을 고스란히 한 번 더 거쳐야 한다. 몸에게 '이게 서핑할 때마다 네가 익숙해져야 할 강도야'라고 알려주는 것과 같은 작업이다.


고깃덩어리 같은 팔을 달래어가며 파도를 밀어내던 와중 돌연 옆에서 보드 한 장이 날아온다. 앞으로 나가고 있던 내 보드 위에 어떤 보드의 테일 부분이 날아온다. 잘못했으면 엎드려 있던 내 머리에 맞을 뻔했다. 스펀지보드였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음 핀에 보드 아작 났다. 그분은 정신이 없어서 아직 보드가 부딪힌 걸 모르는 것 같다. '저기요-' 하고 불렀다. 보드끼리 부딪혔으니 딩난곳이 있으면 알려드리겠다고 하고 나가서 봤더니 역시나 딩이 났다.


물치만 오면 딩이 난다. 라인업이 짧고 편하지만 그만큼 라인업이 좁아 사람들이 다 모이는 탓이다. 고수들은 미리 사고를 피하지만 아직 어정쩡한 나는 사고를 피할 만큼 시야가 넓지 못하다. 오늘은 사람도 별로 없었는데, 그래도 사고가 나버린다. 내 수준에서 타기엔 이곳은 너무 사고 나기가 쉽다. 아쉬운 마음에 다른 스폿에 가서 허우적대며 남들 타는 거 구경만 하다가 나왔다.


아쉬운 마음에 점심은 막걸리 한 사바리와 김치찜, 황태해장국까지. 천국이다. 역시 시장에 장사 없다! 허겁지겁 정말 잘도 먹었다. 위가 찢어지도록 먹고는 낮잠을 잔다. 한숨 자고 일어나서 오후에도 잘 잡히는 쉬운 파도에서 슬렁슬렁 파도를 잡아 탄다. 만족스러운 올 해의 시즌오픈이다.


양양에 오기 이틀 전,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을 만났었다. 할 말이 떨어질 때 즈음 친구들은 나에게 어김없이 묻는다. 서핑은 잘하고 있어? 하고. 그럼 나는 말한다. 남들만큼 많이 가지 않아서 나는 여전히 초보라고. 하나도 안 는다고. 그렇지만 이번에 오랜만에 서핑을 가서 느꼈다. 나는 안 느는 게 아니라 천천히 즐기며 하고 있을 뿐이라고. 뭐든 무리하기 싫어하는 나의 성향 상 엄청나게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붙잡고 있는 일 또한 서핑뿐이다. 뭐든 불나방처럼 빠르게 뛰어드는 나지만 3년 이상 꾸준히 한 스포츠나 운동은 서핑뿐이다. 빨리 늘지는 않지만 나는 천천히 여유롭게 서핑을 점점 여유를 찾고 느긋하게 즐기기 시작한다.


나는 절대로 서핑의 라이딩하는 짜릿함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성취감만을 좋아했다면 절대 4년 넘게 서핑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서핑하는 바다의 공기, 서핑의 색깔, 뚫어져라 바라보는 지평선의 파도라인들. 바다를 가르며 슥슥 앞으로 나가는 느낌. 즉 서핑의 거의 모든 순간을 사랑한다. 이 점이 나를 이토록 오래도록 서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다시 생각하건대, 뭐 하나 꾸준히 하는 것 없고 무리하는 법이 없는 내 인생에서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행운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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