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only

Draw a sketch. 4

by 공선호

한참 동안 잊고 살았던 노트북을 우연히 켜봤는데 안에 파일이 가득하더라.

뭐가 들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서 하나씩 열어보고 닫고를 반복하다 고등학교 때

찍었던 사진들을 발견했는데 오랜만에 찾아봐서 그런지 반가운 마음이 가득했어.

어릴 때 보물찾기 하다가 구석에 숨겨져 있는 보물을 찾은 것처럼 설레기도 했지.

사진 속에 보이는 내 모습 속에는 장난기 많아 보이는 얼굴과 앞머리는 비대칭으로

되어있고 가방은 큰데 구겨져있는 모양 인 걸 보니 들어있는 건 딱히 없었나 봐.

안경도 지금과 다르게 하얀색 뿔테 안경이고 얼굴에는 여드름도 조금 보이네.


또 뭐가 있을까 하고 다른 파일들을 열어보고 있다가 영화들을 모아둔 파일을

발견했는데 내가 감명 깊게 봤던 영화들을 다운로드하여서 거기에 보관해뒀었지.

오랜만에 보는 영화 제목들이 가득 담겨있는 곳에 또 다른 파일이 있던데

[ 같이 본 영화 ] [ 보고 있던 영화 ]라는 파일명으로 저장이 되어있었어.

하나씩 열어서 구경하다 [ 보고 있던 영화 ] 속을 열어봤는데 딱 하나가 있더라.

그 영화는 예전부터 내가 수십 번이나 보고 또 봤던 영화인데 내용이

너무 마음에 드는 영화 중 하나라면서 너에게 같이 보자고 했던 영화였어.


하루를 어수선하게 보낸 남자와 여자가 저녁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가 마음속에 담아두고 쌓아뒀던 감정들에 대해서 털어내다 말다툼으로 이어져.

레스토랑을 나가는 여자를 뒤따라 남자가 밖을 나왔을 때 여자는 택시를 타고 있는데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를 바로 앞에서 남자는 보고 말아.

여자의 죽음을 인정하며 남자는 슬픈 마음을 안고 잠을 청한 뒤 다음날 눈을

뜨게 되는데 자신의 곁에 여자가 있고 어제와 같은 아침이 시작돼.

그러다 어제 있었던 일이 오늘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남자는 결국 운명은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려.

그래서 여자에게 소홀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최고의 하루를 선물해준다는 내용이야.


영화가 끝날 때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대신해서 죽었다는 걸 알고 이렇게 말해.


내가 사랑하는 법을 알려줬댔어

마음이 가는 대로 사랑했을 뿐인데

죽기 전에 모든 걸 말해주고 싶었나 봐




이 영화를 몇 번이나 다시 봤던 나였고 여자의 마지막 말에 나도 조금은 눈물을 흘렸을 텐데

누구보다 감명 깊게 보고 대사 하나하나 마음속에 새기며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너에게

그렇게 모질게 대하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너보다 먼저였던 걸 보면 아니었나 봐.

영화처럼 만약 내가 너와 이 영화 같이 보던 그날로 돌아가 마지막까지 다 봤다면

내가 너에게 조금은 살갑고 따뜻하게 대해주고 사랑해주면서 지낼 수 있었을까 하며

너는 나 때문에 얼마나 아팠을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오늘 하루를 다 보내버렸네.


그러다 미련 없이 그 파일은 휴지통에 넣었고 삭제시켜버렸어.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고 해도 운명은 바꿀 수 없다는 걸 잘 알려준 영화이기도 하고

결국 영화 같은 일은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란 걸 우린 누구보다 잘 아니까.


아마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도 없는 사이로 돌아갔을 거야. 지금처럼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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