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w a sketch. 9
오늘 아침에는 비가 안 오길래 우산 안 가지고 갔는데
아르바이트 마치고 나오니까 밖에 비가 엄청 오더라?
창문 밖을 보니까 한참 전부터 비가 내렸는지 도로가 온통 물바다가 되어있던데
집까지는 가까워서 뛰어가면 그만이지만 비 맞으면서 가야 한다는 게 찝찝하잖아.
그래도 집에는 가야 하니까 비 맞으면서 뛰어갔는데 하필 신호등에 걸린 거지.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도로라서 그냥 건너갈까 하자니 옆에 있는 사람들
눈치가 보여서 빨간불에서 파란불로 바뀔 때까지 내리는 비를 계속 맞고 있었다?
그런데 저기 멀리서 다가오는 차가 도로에 고여있는 물 위를 지나가려는 게 내 눈에 보여서
' 이건 딱 봐도 내가 안 피하면 물을 덮어쓰겠구나 ' 싶은 생각이 들어 옆으로 살짝 피했지.
아무리 내 옷은 이미 다 젖었다지만 그걸 덮어쓰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여자 비명소리가 들려서 놀란 마음에 뒤를 돌아봤더니
나랑 똑같이 옷이 다 젖은 채로 우산을 들고 서있는 여자가 있더라고.
내가 피하는 바람에 사람은 그걸 다 맞았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내가 마치 죄지은 기분이 드는 거야.
내가 안 피했으면 저 사람은 나처럼 옷이 축축해지지는 않았을 텐데
괜스레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하다가 눈이 마주쳐서
서로 아무 말도 안 하고 잠깐 동안 바라보고 있었는데 무안했는지
먼저 괜찮다며 배시시 웃으면서 오히려 나를 안심시키더라고.
그 모습에 오히려 제가 더 죄송하다고 차라리 제가 맞을걸 하면서
비를 맞으며 서있었는데 내 옆으로 와서 머리 위에 우산을 씌워 주더라.
그러고는 집 가는 길이 같은 곳이면 같이 쓰고 가자고 하길래 처음에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망설였는데 나를 보더니 갑자기 웃더라고.
그 모습을 보곤 '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은 아니구나 ' 싶어서 같이 왔지.
그래도 내 우산도 아닌 데다가 내 옷은 이미 다 젖었으니까
가까이 붙은 채로 우산을 같이 쓸 수는 없어서 조금은 거리 두면서
걷다 보니 몸의 반은 비를 맞고 반은 우산 쓰면서 걸어왔어.
우연히 가는 길도 같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걸어왔는데
몇 분 이야기 안 해봤는데도 되게 잘 통하다 보니 금세 친해진 느낌이 들었어.
그런데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 같은 기분이 들더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나도 편하게 이야기하다 보니 집 근처까지 벌써
도착했길래 여기 산다면서 우산 감사히 쓰고 왔다고 인사하고 뛰어갔어.
그런데 뭔가 아쉬워서 뒤를 돌아봤더니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길래
그 모습을 보곤 잘 가라며 나도 손 흔들어 주고 그렇게 들어왔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샤워하고 침대에 대자로 누워서 그 사람을 떠올려 봤는데
우연히 만난 사람 치고는 알던 사람처럼 너무 잘 맞으니까 되게 신기한 거 있지?
그러다가 번뜩 든 생각이 있는데 아무리 봐도 나 참 멍청한 거 같아.
연락처라도 물어볼걸 왜 안 물어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