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가 조금은 그립기도 해.

Draw a sketch. 20

by 공선호

귀찮은 설거지와 빨래들을 내일로 미룰 수도 있고

컴퓨터 게임을 간섭받지 않고 마음껏 즐길 수 있다던가

친구들 만날 때도 조금은 마음 편히 만날 수 있기도 하고

잠들기 전에 나도 이제 침대에 누워서 잘 꺼라며 말하고

전화를 끊은 뒤 밤늦게 친구들과 술 마시러 나갈 수 있지.


술에 잔뜩 취해 밤늦게 들어와 씻지도 않은 채로

새벽에 잠들고 늦게 일어나도 잔소리를 크게 듣지 않는다던가

네가 좋아하던 드라마 시간대가 내가 즐겨보던 예능프로그램 시간과

겹쳐서 더 이상 양보하지 않고 마음껏 채널을 돌려서 본방송을 볼 수 있다던가

밥해먹기 귀찮을 때 네가 싫어하던 라면과 배달음식을 마음껏 시켜먹을 수 있다던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와서 낮잠을 자는 것도 가능하지.


그런데 이런 생활도 하루 이틀이지 어느 순간 익숙해지니까

가까이 있을 때가 더 좋았다는 생각도 들 때가 한 번씩은 있어.


설거지와 빨래들을 더 이상 미루지 않고 바로 처리할 수도 있고

컴퓨터 게임도 적당히 즐길 수 있을 만큼만 즐길 수 있게 도와도 주고

친구들 만날 때도 조금은 불편해도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있고

밤늦게 잠들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으니 다음날 아침이 개운했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지 않으니 다음날 하루가 무척이나 길게 보였고

내가 보고 싶은 예능 프로그램을 못 보고 내용도 모르는

드라마를 보면서도 니 옆에 앉아서 같이 붙어있는 시간들이 좋았어

라면과 배달음식을 줄이고 밤늦게 먹던 야식을 더 이상 먹지 않다 보니

언제 늘었는지 모르던 내 뱃살들은 조금씩 줄어드는 게 눈에 보였어

낮잠보다 내가 필요로 하거나 해야 할 일들을 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하니까

나름대로 내 삶을 계획적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그냥 너무 이끌리는 대로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난 혼자 지내기에는 아직은 어리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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