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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 Jan 28. 2020

주한미군과 자원봉사 (2)

제주도에서 러시아 카잔까지.

모든 부서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주한미군은 대체로 자원봉사에 대해 관대한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다. 휴가처리도 일사천리. 물론 자리를 비우기 전 자신이 맡은 업무를 확실히 처리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나에게 자원봉사는 예방접종과도 같다. 집과 직장을 반복해서 오고 가다 보면 타성에 젖기 마련이고, 무엇이 감사한 일인지, 왜 행복한지 생각하지 못한 채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런 점에서 자원봉사는 나태함을 막아주는 예방주사일 뿐만 아니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과 직장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데 큰 의미가 있다. 2주간 자리를 비우며 철저히 혼자가 되어보면 감사와 행복의 마음이 절로 샘솟는다. 아울러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새로운 배움을 얻기도 하고 봉사를 하는 동안 소방관으로서 안전문화를 전파할 수도 있다.


예전에는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방문해 청소를 돕는다든지 연탄을 배달하거나 집을 짓는 노력봉사가 주를 이루었다면, 최근에는 자신이 가진 재능을 기부하는 방식으로 봉사가 한층 다변화되었다. 국내나 해외 따지지 않고 자신의 여건이나 상황에 맞게 참여하는 봉사도 늘어나고 있다.

 

2011년 'MBC 코이카의 꿈 (스리랑카 편)' 해외봉사를 다녀온 후 매년 2주씩 하기로 결심한 자원봉사. 제주에서부터 러시아 카잔까지 그렇게 나를 찾는 여정이 시작됐다.



2012년 제주 세계자연보전총회 (World Conservation Congress)  

아름다운 섬 제주에서 펼쳐진 국제규모의 행사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설레는 일이다. 처음 제주에서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반드시 참여하고 싶은 마음에 소방관 정복을 입고 면접시험에 응시했다. 그 모습이 좋아 보였을까? 아니면 나이 때문이었나? 이유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얼떨결에 2천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의 대표라는 중책도 맡게 되었다.


2012년 제주 세계자연보전총회에서 자원봉사자 대표로 선서를 하고 있다. (출처: 연합뉴스)


이 행사는 '자연의 회복력 (Resilient Nature)'이란 주제로 무려 180여 개국이 참여한 환경분야의 가장 권위 있는 행사다. 나는 2주간 의무실에 영어 통역으로 배치되어 크고 작은 부상이나 질병을 치료하는 일에 함께 참여했다.

 

하루 백여 명의 환자를 돌보고 치료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자료화면: KBS 제주)


하루 일과를 마친 후에는 자원봉사자들의 안전을 챙기고 문제가 생긴 곳에 나가 조율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자원봉사자 한 명이 실종되어 찾아 나선 일, 요르단 공주가 한라산 등반을 하겠다고 해서 동행했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식은땀이 날 정도다.  


2012년 제주 세계자연보전총회 성과보고를 마치고 유영숙 당시 환경부 장관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큰 사고 없이 행사를 마쳤을 때 2011년 스리랑카에서 나 자신에게 했던 약속을 지켰다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세상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소통으로 돌아가는구나." 마치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와 세상을 처음 바라본 것처럼 '집과 직장'이라는 패턴의 껍질을 깨고 내가 본 세상은 경이롭고 신기한 모습 그 자체였다.        




스포츠와 통하다.

제주에서의 기억이 가물가물 해질 즈음, 2013년 인천 아시안실내무도대회에 통역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근무할 부서의 이름이 낯설다. 반도핑부 도핑관리실.

 

"간혹 언론을 통해서 들었던 선수들이 뭐, 부정행위하는 거 찾아내는 곳인가?" 그렇게 시작된 도핑검사와의 만남은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과 2015년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를 거쳐 2016년에는 아예 정식으로 도핑검사관이 되는 것으로 연결됐다.


도핑검사는 선수의 건강보호와 깨끗하고 공정한 스포츠 문화를 만드는 것이 주목적이다.  


2013년 '인천 아시안실내무도대회'


2015년 여름을 뜨겁게 만들어준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다이빙 경기장.  


그렇게 시작된 스포츠와의 만남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자원봉사가 취미가 되고 취미가 또 좋아하는 일이 되는 선한 연결고리가 또 나를 어디로 이끌어 줄까?  




나는 국가대표 통역이다. 

2017년과 2019년 국제기능올림픽 한국대표팀 자원봉사 통역으로 선발됐다. 2년마다 열리는 기능올림픽은 대한민국 기능인들의 자존심으로 우리나라는 현재까지 19번의 종합 우승을 거둔 바 있다.


2017년 아부다비 대회를 앞두고 국가대표 평가전을 위해 호주와 중국을 다녀왔다. 그때 나는 '헤어디자인 (Hairdressing)' 대표선수의 통역을 맡게 되었는데 20년째 같은 머리를 하고 있는 나에게 헤어는 너무나 생소한 분야다. 염색약 이름도 새로 외워야 했고, 헤어 도구의 명칭, 대회 규칙, 채점방식과 과제명도 익혀야 했다.  

  

2017년 호주 뉴캐슬 헤어아카데미에서 개최된 국가대표 평가전을 모두 마치고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7년 중국 충칭에서 열린 국가대표 평가전 개막식에서 참가국 선수들과 임원진이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7년 아부다비 대회 헤어디자인 경연을 마치고 33개국 선수와 임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지난해 러시아 카잔대회에서는 '목공 (Carpentry)'분야의 통역을 맡았다. 참가했던 한국 선수가 은메달을 따는 쾌거를 거둬 보람도 2배.


2019년 러시아 카잔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일본, 말레이시아, 독일, 러시아 통역요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스리랑카에서 시작된 자원봉사가 제주도, 인천, 광주, 호주, 중국, 아부다비를 거쳐 러시아 카잔까지 이어졌다. 지난 9년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나를 만났다. 그리고 세상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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