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5. "Attention in the Station, Attention on the Net. Stand by full alarm structural response for high-risk facility at BLDG XXX. This is a three engine response."
오늘도 어김없이 출동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소방서의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소방관이 되고 나서 나에게 생긴 직업병이 있다면 하나는 밥 먹는 속도가 대단히 빨라졌다는 거다. 세상의 모든 소방관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식사 준비가 끝나고 밥 숟가락을 들면 항상 출동벨이 울리는 불변의 법칙을...
한 두 번 식사를 거르고 현장에서 힘을 쏟다가 천국을 경험할 뻔하기도 했다. 그다음부터는 식사시간이 되면 누가 쫓아오지도 않는데 최대한 구겨 넣었다. 어차피 소화는 현장에서 해도 되니까. 이미 출동팀을 떠난 지 오래지만 아직까지도 식사 시간이 채 5분을 넘지 않는 것을 보면 직업병이 분명하다.
또 다른 직업병이라고 하면 어딜 가도 또 누구를 만나도 내 눈은 오직 소방차, 소화기, 비상구와 같은 소방 아이템에만 눈길이 간다는 거다.
2017년 <세계기능올림픽대회> 전초전으로 호주에서 국가대표 평가전이 열렸는데 그때 나는 대한민국 헤어디자인 대표선수의 통역으로 참여했다. 사실 호주를 처음 가 본터라 모든 것이 새로웠지만, 나는 호주의 소방차, 소화기, 안전시스템 등에 푹 빠져 다른 것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뉴캐슬에서의 평가전을 마치고 시드니로 이동했을 때에도 사람들은 오페라 하우스는 꼭 가봐야 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시드니 소방서를 방문했으니까 직업병이 맞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시드니 소방서 소방대원들과 함께 "We are brothers from another mother."라고 외치며 기념촬영도 했다.
2009년 미 국방부 펜타곤을 방문했을 때도, 그리고 미 국회의사당을 방문했을 때에도 나는 오로지 소방이라는 한 녀석만 바라봤다.
짬짬이 시간을 내서 참여하고 있는 해외 자원봉사 역시 나눔의 실천이라는 숭고한 목적 이외에도 나의 사심(私心)이 담겨있다. 2011년 MBC '코이카의 꿈 (스리랑카 편)'에 자원봉사자로 출연했을 때에는 제작진에게 특별히 부탁해 스리랑카 학생들에게 소화기 사용법 교육을 하기도 했다. 비록 갑작스러운 폭우로 인해 촬영분이 통편집되기도 했지만 스리랑카 아이들에게 안전의 씨앗을 뿌려 준 것만 같아 감격스럽다.
2011년 MBC '코이카의 꿈 (스리랑카 편)'에 출연해서 제작진의 배려로 학생들에게 소화기 교육을 하고 있다.
그 이후로도 필리핀, 중국, 홍콩, 아부다비, 두바이, 러시아 카잔 등을 다니면서도 나는 오로지 한 곳만 바라봤다. "아, 이 나라 소화기는 이렇게 생겼구나. 여기는 비상구 표지판이 조금 작네. 어? 여기는 왜 이렇게 해 놓았지? 이거 비상구 막으면 안 되는데. 이 나라 조금 실망이다. 뭐, 그런 것들..."
환한 미소로 맞아준 홍콩의 침사추이 소방서.
통역에게 어렵게 부탁해 촬영한 러시아 카잔의 구급대원들.
호주 시드니 지하철 소방대. 도시의 아름다운 경치와 소방차가 너무 잘 어울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곳이다.
함께 촬영은 어렵고 혼자 찍으라며 사진을 찍어준 시크한 두바이 소방서.
내가 단세포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다른 나라의 문화나 역사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다. 오히려 내가 살고 있는, 또 그네들이 살고 있는 지금 이 장소가 얼마나 안전한지를 확인하는 일에 더 큰 매력과 흥미를 느낀다.
최근 들어 밥 먹는 속도를 조금 늦춰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함께 식사하는 분들에게 불편함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방 이외에 다른 관심사를 갖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누군가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또 그것이 반드시 나여야만 한다는 거창한 대의명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게 나니까 그렇게 하고 싶은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