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여행하다가 맹장수술받으면 차 한 대 값!?

살다 보니 이런 일이, 여행자의 맹장수술-1

by 박꿀꿀

발리를 떠나려던 날 아침이었다.

배낭을 다 꾸려놓고 체크아웃시간까지 1시간 정도 남았음을 확인하고 좀 더 빈둥거려야지, 하고 침대에 누워있던 때였다. 인도행 비행기티켓을 다시 확인하면서 공항까지 가는 시간을 계산하려는데 슬슬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 발리밸리 또 시작이네.

발리에 온 지 2달째, 위생이 안 좋은 발리 사정 때문인지 ‘발리밸리’라고 불리는 배탈이 난 것은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발리밸리는 발리여행자들이라면 많이들 겪는 증상이라 그날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점점 통증이 심해졌다. 몇 분 후,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오른쪽 아랫배가 아파 올즈음 나는 직감했다.

이건 뭔가 큰일이 났다는 걸.

급기야 구토까지 시작한 나는 변기 앞에 무릎을 꿇고 신음소리를 내며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는 상황에 처했다. 곧이어 호텔에서 불러준 엠뷸런스가 도착했고, 나는 그대로 우붓에서 쿠타시내의 큰 병원까지 구급차를 타고 1시간을 실려갔다. 진통제를 링거로 맞으니 30분쯤 지나서는 통증이 가라앉았다. 구급차 안에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내 머릿속은 온통 비자문제, 오늘 밤 비행기티켓 생각뿐이었다. 오늘자로 관광비자도 만료되어서 내일부턴 불법체류자 신세인데. 오늘 밤 꼭 인도로 떠나야 하는데. 심지어 인도행 비행기티켓은 가장 저렴한 걸로 구하느라 취소불가조건이 달려있는 티켓인데. 인도에서 묵을 호텔까지 다예약해놨는데.

당장 취소가 안 되는 것들이 한가득이었다. 쿠타로 가는 1시간 내내 내 머릿속엔 아픈 내 몸이 아니라 취소값으로 날릴 돈만 날개를 달고 둥둥 떠다녔다. 그런 내 심란한 마음을 뒤로하고 구급차는 쿠타의 Bimc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발리 쿠타의 Bimc병원.

발리 쿠타의 병원은 동네병원보단 컸고, 대학병원에 비해선 작았다. 응급실 내부는 침대 3-4개 정도가 놓여있고, 일요일 오후인 시간대임에도 한산한 느낌이었다. 의사들은 내 증상을 묻고 배를 수차례 눌러보더니 아마도 ‘어펜딕스’ 문제인 것 같단다. 어펜딕스가 뭔데!? 생전 처음 들어본 영어단어에 겁에 질려 검색창에 손을 떨며 검색해 보았다.

‘appendix, 맹장/충수‘

맹장염이라니. 정확한 용어는 충수염이란다. 의사는 지금 바로 ct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했다. 검사 전 직원이 찾아와 내미는 영수증엔 오늘의 응급실 비용과 검사비용이 적혀있다.

ct검사비, 링거비, 진료비 총 160만 원.


뜨악하다. 이렇게 큰돈을 한 번에 결제해 본 경험이라곤 아마도 큰맘 먹고 맥북을 살 때였나. 이거 자칫해서 수술이라도 하게 되면 한 오백 쓰겠네, 나는 약간의 불안감과 함께 카드를 내밀었다. 그나마 한줄기 구원의 빛처럼 떠오른 건 여행 전 가입해 둔 여행자보험. 건강체질이었던 나로서는 과연 이걸 쓸 일이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필수라기에 고개를 갸우뚱대며 들어둔 보험이었다. 필수라고 귀띔해준 그 누군가와 가입버튼을 클릭한 과거의 내게 찾아가 납작 엎드려 발등에 키스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걸 바로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는구나. 그렇게 결제가 이루어지고 나서야 모든 검사가 시작되었고 어둑한 밤이 되어서야 검사결과가 나왔다.


검사결과는 급성충수염(맹장염).

의사는 당장 내일 아침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에 가서 수술을 받겠다고 하니 비행기를 타면 터질 가능성이 높단다. 비행기 안에서 아까의 그 고통이 시작되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결국 여기서 수술을 받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나니 또다시 비자문제가 떠오른다. 근데 내일부터 나는 불법체류자신세인데 이걸 어쩌나. 병원 직원이 자초지종을 듣더니 서류를 떼어주겠다며, 이런 응급상황은 보통 이민국에서도 이해해 주니 걱정 말라고 한다. 그래, 법 이전에 사람 있지, 이렇게 아파서 수술받겠다는데 비자가 다 뭐야.


응급실 침대에서 입원실로 이동하기 직전이었다. 아까 영수증을 건네주었던 직원이 또 다가왔다. 발리사람들 특유의 친절한 미소를 띠며 걸어온 직원은 수술비와 입원비를 결제부터 해야 수술이 가능하다고 말해주었다. 그녀의 손엔 무시무시한 금액이 적힌 영수증이 들려있다.

수술비와 3일 치 입원비는.. 총 880만 원.

영수증을 받아 들고 놀라 눈썹을 치켜뜬 나를 보며 직원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수술한 뒤 경과를 봐서 진료비용이 약 2백만 원 정도는 더 추가가 될 거라고. 점점 치료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아까 찾아본 여행자보험의 한도가 떠올랐다. 4만 달러인 한도를 보며 설마 이만큼이나 쓸 일이 있을까, 하며 보장금액을 다 쓰려면 병원 vip실에서 칵테일이라도 주문해 마셔야겠다던 농담하던 때가 떠올랐다. 초보여행자의 시건방짐을 반성하며 침을 꼴깍 삼키곤 카드를 내밀었다.

결제를 기다리며 만일 나나 내 가족이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이 돈이 없었다면 참 서러운 일이 생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라는 건 이렇게 중요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으면서도 한국 가면 이거 100만 원도 안 하는 수술인데, 하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나의 스페인친구는 답했다. 스페인에서는 의료비는 다 공짜인데.

한 사람의 생사가 가진 돈뿐만 아니라 타고난 나라에도 달려있는 걸 보니 이런 걸 타고난 운명이라고 부르는 걸까 싶다.

그렇게 공포의 결제가 끝나고 나는 날이 캄캄해져서야 2인실에 입원했다. 친절한 간호사님이 들어와 이것저것 혈압을 재보고는 다음날 아침 7시에 수술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갔다. 소독약 냄새가 나는 조용한 병실에서 잠들기 전 나는 충수염을 검색해 보았다. 맹장 끝에 달린 작은 돌기를 충수라고 부르고, 어떤 원인으로 충수가 막히거나 염증이 생기면 수술로 잘라내는 게 최선이라고 한다. 이 손가락만 하다는 장기의 염증하나 때문에 인도여행도 못 가고 작은 병실에 누워 경차한대값을 순식간에 잃은 걸 생각하니 가슴이 쓰리다. 아무리 여행자보험이 있다지만 만일에, 아주 만일에 돈을 못 받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까지 든다. 게다가 아침에 있을 수술을 생각하니 조금은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인도네시아의 의료 수준은 우리나라의 몇십 년 전이라고들 한다. 어느 글에는 인도네시아에서 수술을 받다가 과다출혈로 의료용 헬기까지 탔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까지 있었다. 하지만 당장 링거를 꽂고 병실에 누워있는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중얼거렸다. 이 모든 것은 운명, 운명, 운명.

다음날 아침 6시,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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