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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기념 소회

by 몽땅별

대학시절동안 읽은 책을 바탕으로 졸업 기념 에세이를 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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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청소년기 시절 선생님과 친척들은 나보고 대학을 잘 가야 인생 성공한다는 말을 많이 하셨다. 세상에 무지한 나로선 그 말을 계명으로 여겼다. 따라서 당시 내 삶의 가치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는 거였다. 다만 막상 대학에 진학하니 허탈감과 공허함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목적을 달성하고 나니 몰려드는 허무감. 이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 나에겐 시급했다. 나는 이 감정을 해결하고, 삶이란 무엇인지, 이 세상은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었다. 고로 해답을 얻기 위해 책을 탐닉했다.


#1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세상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원자론을 펼쳤다. 그에 따르면 세상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물과 바람, 불, 흙을 비롯하여 가족과 친구들, 나아가 우리의 생각과 관념까지도 원자로 구성되었다는 의미다. 그의 사상은 물질에 국한한다.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며 모든 것을 원자의 움직임으로 설명한다. 다만 후대 피타고라스 학파와 플라톤은 그의 사상에 반대했다. 오히려 그들은 수학 혹은 이데아(완전한 이상)라는 절대적 이상향을 제시하면서 모든 사물이나 현상은 이러한 정신적·이상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목적론적 세계관'으로 명명되었다. 나아가 기독교는 종교로써 모든 이들이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도록 못 박았다. 결국 데모크리토스의 사상이 플라톤에 의해 짓밟힌 이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도 여전히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의 영향 아래 놓여있다. 현대 사회는 여전히 '성공', '자아실현', '삶의 목표'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지배한다.


#2

한국은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중시하는 사회다. 이는 리버스 엔지니어링(역공학)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리버스 엔지니어링. 특정 제품을 분해하고 분석하여 원제품의 기술력을 배우는 행위다. 이는 개발도상국의 성장 과정에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선진국의 성장 과정을 그대로 답습하여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개성과 특이성은 불필요하다. 누가누가 더 생산적인지 혹은 누가 더 근면한지가 발전의 중요한 지표가 된다. 결국 한국은 선진국이 되기 위해 '개발'이라는 중요한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에 누가 더 부합한 지가 중요했다.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는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3

리버스엔지니어링을 바탕으로 한 성장의 부작용은 낮은 출산율, OECD 자살률 1위 등의 통계로 잘 나타나고 있다. 인간이 부품으로 대체되고, 부품 중에서도 최고의 부품이 되지 못한 이들이 삶을 포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엄청난 성취를 이룬 자들도 결국 허무감에 빠진다. 인간은 본래 부품이 아니기에 그러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정치적 해답이 중요할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나는 좌파 사상에 빠진 채로 세상을 바꾸자는 주장을 펼치고 싶진 않다. 애초에 그러한 이상향은 허상이며, 도달할 수 없는 세상일 뿐이니까. 혹여나 좌파 사상이 현실에서 구현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목표를 달성한 후에 찾아오는 권태감은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고 우파가 되자는 뜻도 아니다. 우파는 때때로 추악한 경우를 많이 보여준다. 본능 앞에 드러난 추악함을 반성하지 않은 채 떳떳하게 우기는 정치병자들을 볼 때마다 괜스레 나는 그들과 거리감을 둔다. 특정한 정치적 해답보다는 인간의 본질적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가 낫지 않을까. 인간의 삶은 애초에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락가락하다 죽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받아들이고 나서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


#4

물론 비관주의자처럼 세상에 대한 비난만 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자는 말을 하고 싶다. 세상은 내 생각만큼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는 패러다임의 변화에서 잘 알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고안한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은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 시대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틀(패러다임)은 단순히 누적적이고 점진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인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존의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의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혼란과 기존 기득권의 강력한 반발이 일어나고, 기존 이론이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반례가 증가한 뒤 기득권의 반발이 무용할 정도로 세력을 잃어버려야 새로운 패러다임이 뿌리 박히는 것이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 뉴턴역학에서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변화 과정에서 겪은 저항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과학조차 변화가 어렵다면 사회의 변화는 얼마나 더 오래 걸릴까.


#5

독일의 사회학자 에른스트 블로허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주장했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각자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사회에 적용하자면 21세기 한국에는 저마다의 사람들이 외형적으로 동일한 듯이 살아가고 있지만, 그 내면을 살피면 누군가는 전근대를, 누군가는 근대를, 누군가는 현대를 살고 있다는 의미다. 예컨대 지금 2025년에는 태극기를 흔들며 산업화 시대를 그리워하는 노인들과 K-POP과 리그오브레전드에 빠진 채 저성장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젊은이들이 공존한다. 각자는 다른 시간을 겪고 있다. 시간의 불균형은 다름을 낳는다. 누군가는 유신시대를 그리워할 수 있다. 누군가는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절망할 수 있다. 시간의 차이는 인식의 차이를 만들고, 결국 이해할 수 없는 간극을 만든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우리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6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화해할 순 없는 것일까. 국가적·전지구적 통합은 불가능할지언정 내 곁의 이웃만큼은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가능성은 남아있지 않을까. 에른스트 블로허와 마찬가지로 시간에 초점을 맞춘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를 '세계-내-존재'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가 덧씌운 비본질적 삶을 산다. 세상 속에서 타인의 기대에 사로잡힌 채 무비판적으로 살아가는 상태다. 다만 어느 순간 인간은 죽음을 직시하게 된다. 죽음을 직시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인간이 된다. 질문을 통해 자기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갖고, 나아가 자기가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임을 자각한다. 이를 통해 타인의 기대나 관습에서 벗어나 본래적 삶을 살아가는 계기가 된다. 또한 질문을 한 인간은 타인에 대한 시선이 바뀐다. 자기가 세계 내에서 타인과 관계하며 사물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존재임을 자각한다. 이러한 자각은 타인에 대한 배려를 일으킨다. 타인의 고유한 가능성을 존중하고 그들의 존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진다.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존재에 대한 물음과 타인에 대한 배려로 이어지는 초월적 지평이 되는 것이다.


#7

나아가 타인에 대한 배려를 계명처럼 강조한 철학자가 있다. 프랑스-유대인 윤리철학자 레비나스가 그 예다. 그는 <시간과 타자>에서 윤리적 관계를 철학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에 따르면 시간은 단순한 물리적 흐름이 아니다. 시간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의미를 갖는다. 타자가 나에게 예상하지 못한 존재로 출현할 때에 시간은 비로소 미래성과 개방성을 지닌 채 내 앞에서 흐른다. 그리고 이러한 타자의 '얼굴'을 비로소 맞이할 때 우리는 타자의 얼굴에 대해 응답할 필요가 있다. 타자의 얼굴은 구체적이다. 타자의 얼굴에서 우리는 그의 약함, 그의 가난함, 그의 과부와 고아와 같은 모습을 본다. 타자의 얼굴은 "말없이 나를 죽이지 말라"고 요구하며, 이는 나에게 피할 수 없는 윤리적 계명이 된다. 타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무한한 존재이다. 무한한 존재, 시간의 미래성을 지닌 타자의 얼굴 앞에서 우린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와 수용을 요구받게 된다.


#8

이데올로기와 종교, 형식과 틀에 갇힌 채 타인을 집단화하고 정형화하는 순간이 많다. 부자와 빈자, 강자와 약자, 진보와 보수와 같은 이분법. MZ세대와 586세대, 페미와 반페미, 일진과 찐따, 한남과 한녀와 같은 이항대립에서 우리는 파편적이고 구체적인 타인을 놓친다. 그저 이상화하고, 배척하면서 '적'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사고관에서 타인의 고유성은 사라진다. 타인의 진정한 모습은 소멸한다. 내 곁의 타인도 각자가 각자만의 사정을 지닌 채 괴로워하고 있으며, 인생의 고난과 고통을 견디며 애써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는 빈번히 망각하게 된다. 타인은 적이 아니다. 공포의 대상도 아니다. 그저 나와 다른 존재이다. 나아가 얼굴을 지닌 존재이다. 이러한 구체성을 알 때, 우리는 조금 더 타인을 존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의 고유한 얼굴을 기억할 때, 타인의 고통과 사정을 기억할 때에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


#9

그렇다고 마더테레사처럼 성인이 되자는 뜻은 아니다. 예수와 부처처럼 살신성인의 자세로 살아가자는 뜻도 아니다. 우리는 결국 '똥'을 싸는 존재다. 체코의 소설가 밀란쿤데라가 말한 것처럼 인생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것이다. 인생이 무거워야 하는가, 가벼워야 하는가의 질문에서 결국 우리는 가벼움을 택할 수밖에 없다. 무거움을 껴안은 채 자신의 일상의 가벼움을 견디지 못하고 낭만적 도피만을 일삼으며, 삶의 의미와 윤리의 의미를 이상화해봤자 결국 우리는 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삶의 가벼움과 허무, 고통과 고난의 반복은 계속될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의미의 무거움 조차도 결국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다. 이럴 때면 난 우주를 떠올린다.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지구 전체 인구보다 많은 은하 사이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후미진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 은하. 그 은하에서도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은 우리 은하의 변방, 두 개의 나선 팔 사이에 잊힌 듯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태양계 8개 행성에서 우리는 지구라는 작은 행성 위에 존재한다. 창백한 푸른점과 같은 지구. 그 안에서 우리는 영원을 꿈꾸고, 절대권력을 꿈꾼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순간적인지를 떠올리면 우리는 그저 티끌에 불과하다. 우리가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 종교, 국가, 화폐, 도덕들은 이 광대한 우주에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소멸할 것이다.


#10

하지만 우리가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고, 타인을 대면하며,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려고 하고, 그들의 고유성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만큼은 역설적으로 영원하다. 삶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것이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를 이해하고, 누군가 나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일어나는 이 짧은 순간이야말로 무거워진다. 그리고 비로소 이 무게를 통해 가벼운 삶을 더 잘 견딜 수 있게 된다. 결국 우리는 똥을 싸고 사라질 존재다. 세상을 바꿀 수도 없고, 세상은 내 기대만큼 부응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세상을 지배하려고 했던 모든 시도들도 우주적 관점에서 무용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영원을 꿈꾼다. 이상향을 바란다. 이러한 의미추구의 흔적들. 이 작은 흔적들이야말로 삶과 존재를 살아 숨 쉬게 한다. 그리고 나는 내게 묻는다. 나는 오늘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며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11

이럴 때면 난 예수를 떠올린다. 선한 것이 태어날 수 없다고 믿었던 천한 달동네 나사렛. 그곳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죄인과 과부, 고아와 세리를 사랑하며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전파했던 예수를 떠올린다. 그는 죽기까지 사랑을 설파하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고통스러운 순간에서도 죄인들을 용서하였다. 결국 그는 그 사랑 덕분에 신이 되었다. 나아가 석가모니를 떠올린다. 왕족의 아들로 태어나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음에도 친히 고행을 누리며 타인에 대한 자비와 선행을 베풀었던 그를 떠올린다. 미천한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불법을 설파한 후, 죽기 직전까지 진리의 말씀을 전달한 그를 떠올린다. 결국 그는 지혜와 자비 덕분에 부처가 되었다.


#12

다시금 나를 되돌아본다.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본다.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ㅡ열등감, 자격지심, 박살난 가정환경, 조급함ㅡ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다. 이 모든 열등한 감정들은 나를 무겁게 짓누르며,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내 안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던 의문들. "왜 나는 이토록 불완전한가?", "왜 나는 타인처럼 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들은 결국 나를 스스로 갉아먹게 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겪은 열등감, 자격지심, 그리고 타인과의 비교에서 비롯된 고통들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이 만든 그림자와 같은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질투하고 미워했던 타인들 역시 각자의 상처와 괴로움을 품고 있었다. 어쩌면 나보다 더 깊은 고통에서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이제는 나의 부족함이 나를 정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나의 과거를 통해 배웠고, 책을 통해, 종교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겪은 모든 열등한 감정들은 단순히 나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인간답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13

나는 나에게 다시 묻는다. 예수와 부처는 완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타인을 이해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들조차 부족했었고, 그들조차 아파했었다. 그들조차 그들만의 고유성과 개성을 지닌 존재였다. 결국 예수와 부처가 보여준 것은 완벽한 진리가 아니라, 나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려는 사랑과 자비였다. 나 역시 완벽하지 않다. 한없이 가벼운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나를 통해 타인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징표가 된다면 그것만으로 족하지 않겠는가. 삶의 목적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삶에 목적이란 없다. 행복조차도 없다. 그나마 삶의 행복이란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다 죽는 것일 테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선 내가 먼저 남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더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의 폭을 넓히기 위해선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하고, 먼저 베풀고, 먼저 다가가야 하더라. 먼저 그들의 얼굴을 마주하며, 그들의 고유성을 존중하고, 나의 불완전함을 이해할 수 있도록 나를 너그럽게 만들어야 하더라. 그리하여 나는 다짐한다. 이 세상에서 나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고유성을 가졌기에 나를 둘러싼 타인 역시 그들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명심해야겠다. 그리고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며, 그들의 고유성을 존중하고, 그들의 구체성에 공감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나아가 나의 불완전함까지도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는 여유를 갖춰야겠다. 세상이 쉽게 변하지 않더라도, 한 알의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각 개인의 노력이 주변을, 나아가 세상을 언젠가는 바꿀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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