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자면, 종종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다만 이는 세상에 대한 원망이나 누군가를 협박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유아적인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떨림과 울림 같은, 태어남에서 비롯된 동요를 멈추고 싶다는 갈망, 즉 벼락같은 정지, 역동성의 중지 속에서 배태되는 무(無)의 고요함을 느끼고 싶다는 무모하고도 매혹적인 망상이다.
그 망상은 연인 사이에서 오가는 황홀과 절망, 두 양극단을 오가는 감정의 격동이 빚어낸 고요함과 닮아 있다.
- 격동이 끝난 후 침전하고 용해되어 부드러움의 형태로 다가오는 감정.
- 울부짖고 호소하다, 사랑에 취해 도취된 후 찾아오는 지고의 황홀감, 종교적 제의에서 종종 일어나는 트랜스 상태와도 같은 감정.
(이는 존재론적 불안을 잠재우는 미학적 체험으로 보일 것이다.)
이러한 감정이 배태된 원인은 어쩌면 에반게리온에서 말하는 LCL – 즉 근원으로의 회귀일 수도 있고, 반출생주의를 주창한 철학자 데이비드 베나타의 철학과도 닿아있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리스 우화 속 현자 실레노스의 지혜 -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와 같은 문구와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나의 생각은,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정신병리학적으로 우울증이라고 진단받을 것이며, 생명의 전화, 자살예방 상담 전화 따위와 같은 조치가 필요한 모습으로 비춰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비루한 인식 능력이다. 선악과나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 상징이 보여주듯, 인간이 한 번이라도 생의 부조리를 정확히 직시하는 순간, 그 모순이 인간을 구역질나게 만든다.
이 구역감의 기원, 더 정확히는 이러한 구역감을 유발하게끔 만든 고통, 곧 진실을 마주한 의식이 느끼는 깊은 괴로움 - 그 괴로움은 신심 깊은 순진함에서 벗어나 부조리를 직시하게끔 만들었다. 슬프게도 순진함 덕분에 세상의 진실을 잊고 살 수 있었을 터였지만, 인생은 그 순진한 아이를 박살내버렸다.
도처에 깔린 죽음.
패배감, 무력감, 야만스러움, 괴로움.
생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잔혹한 세상.
삶은, 태어난 것이 초래한 인간의 비극이다. 각자 소포클레스 비극 속 연출을 떠맡은 배우로 무대 위에 서 있다.
관객이 있다면, (만약 그것이 신이라면) 나는 간절히 그를 모독하고 싶은 마음이다. 복수할 수 없지만서도, 그만큼 간절하기에.
철학자 니체와 키에르케고르의 책을 읽는다. 그들은 나름의 논리와 주장으로 삶을 포장하지만, 그 안에 담긴 문장의 농도와 형태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박한 호소가 깊이 스며 있다.
치열한 고뇌와 고통, 그러나 끝내 놓칠 수 없는 희망, 그 절박한 희망.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논제는 ‘자살’이라고 말하며 책의 포문을 연 까뮈가 책의 마무리에서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스를 ‘상상하여야만 한다’”라고 당위적으로 결론지은 것처럼, 철학은 스스로 주장과 논증을 펼치며, 결국 (결코 객관적 진실이 될 수 없지만, 절대적 주관의 진리로 도달하게끔 하는) ‘당위성’으로 초월시키려는 사투다.
그들이 도달하고자 한 실존적 각성의 상태, 곧 사르트르가 말했던 즉자적 존재를 달성하기 위해 인간은 초월성을 갖추며 대자적 존재로서 삶을 수행하듯, 존재는 꾸역꾸역, 반복하면서 삶을 살아야한다.
존재의 충실성. 그것은 영원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