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맑은데 나무 사이사이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익숙한 길을 달려 근래 며칠간 일한 농장에 다시금 도착했다. 오늘은 무려 열두명이나 투입되어 얼마나 할 일이 많은가 긴장했다. 하지만 이미 사흘간 열심히 막대기를 뽑고 철사를 감고 울타리를 감는 등 단련이 되어서인지 예상만큼 힘들진 않았다. 두 조로 나누어 흩어진 우리는 쭉 해왔던 일을 지속했다. 얼마 전 캠프에 새로 도착한 아일랜드 커플도 곧장 일에 적응해서, 모두가 말하지 않아도 척척 일을 분담해서 움직였다. 유난히 쓰러진 나무가 많아 그들을 옮기고 깊게 휘어진 쇠막대기를 뽑아 올리는데 시간이 좀 걸렸을 뿐, 나머지 일은 여느 날과 다름 없었다. 서늘한 가을바람 아래 새참으로 샌드위치를 먹으며, 오늘은 왠지 비교적 설렁설렁한 날이 될 것 같은 느낌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이미 5일째 일하는 날이었고 뒷목, 등허리, 손목이 너무 뻐근했다. 내일도 일하는 날이니 마지막 체력은 남겨두어야 한다는 다짐을 했기에,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일 자체는 반복적이고 고됐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회전 도구를 이용하여 쇠철을 기계처럼 감아도 보고 땅에 깊게 묻힌 철망을 우수수 뽑아내기도 하는 등, 소소한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다. 일찍이 두 번째 점심시간을 맞았고 윈도우 바탕화면에 앉아, 조원 모두가 느끼는 통증 완화에 도움이 되는 스트레칭을 공유하며 선선한 공기를 만끽했다.
예상대로 오늘의 업무는 일찍 끝나서 숙소에 도착하니 두시였다. 여덟 시에 시작해 주로 세시에나 일이 끝나기에, 오늘은 갑자기 주어진 여가시간에 무얼 해야 할지 몰랐다. 뜨거운 오후의 햇살을 정통으로 맞으며, 잔디밭에 요가 매트를 깔고 드러누워 안부 전화를 하고 여기서 무얼 먹고 있는지 기록하고 운동을 하다 보니 어느덧 네시였다.
독일 출신 요가 선생님인 D의 주도 아래, 다 같이 모여 빈야사 요가와 명상을 하고 나니 곧 저녁시간이었다. 늘 그랬듯 외부 소식 공지와 그 날 그 날 업무에 대한 피드백이 이어졌다.
어제부터 채식 식단이 저녁 메뉴에 추가되어, 이젠 육류/생선류와 채식 식단을 선택할 수 있다. 망설임 없이 채식 식단을 골랐고 너무 그리웠던 야채를 마음껏 먹을 수 있어 행복했다. 아무리 소수일지라도 목소리 내길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이번에 또 한 번 깨닫는다. 혼자라면 이루지 못했을 변화를 함께 기뻐할 수 있어 작지만 큰 감동을 받았다. 이렇게 조금씩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수렴되고 변화할 수 있는 집단에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저녁 식사 후 태스매니아 출신 배 제작자 할아버지와 한참 담소를 나눌 때 두 가지를 깨달았다. 이 곳엔 가지각색으로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나이가 든다고 해서 여행을 멈출 이유는 전혀 없다는 걸. 당장 여든 세 살인 D는 몇십 년 전 이 곳을 여행할 때 자신을 도와주던 농부들에게 보은하고 도움을 주고자 이 곳에 왔고 어느 정도 일이 마무리되고 이 캠프가 철수하고 나면, 자신이 만든 배를 타고 남극으로 항해할 계획이라고 한다.
여행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건, 내가 가진 시야가 넓혀질 뿐 아니라 스스로 정해둔 한계나 편견을 허물어버리는 해프닝, 사건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