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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예YEEYEE Apr 22. 2024

에헴 할아버지와 고구마씨 1.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깊고 깊은 산속에 에헴 할아버지가 혼자 살고 있습니다. 전에는 모든 걸 함께하던 할머니와 둘이 지냈던 곳이었죠.

 할아버지는 봄의 어느 날 할머니를 떠나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조금씩 말라갔습니다. 통통거리며 북소리가 나던 배는 쏙 들어갔고, 얼굴에선 살과 함께 밝은 미소도 사라졌습니다. 

땀을 흘리며 피곤을 쌓아 잠이 드는 여름, 추수와 함께 겨우 마음을 추스르는 가을. 할아버지는 그렇게 두 계절을 버텨냈습니다.

 가을이 지나고 창고인 광에는 다양한 곡식이 쌓였습니다.

 ‘쾅’하고 부딪치는 소리와 비슷한 이름의 ‘광’은 다양한 물건을 넣어두는 시골의 창고입니다. 어둠이 내려앉은 캄캄한 곳. 서늘한 기운이 흙냄새를 숨기는 광의 구석. 가을걷이를 끝낸 고구마가 쌓여있습니다.

 하나, 둘, 셋. 커다란 종이상자에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삐뚤빼뚤 서울행 주소도 쓰여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구석에 내년 농사를 준비하는 고구마 박스가 남겨져 있습니다. 그 옆에 빨간 바구니에는 어른의 무릎 높이나 되는 커다란 고구마가 놓여 있습니다.

 이 고구마는 혼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할아버지를 웃게 만든 작물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사람의 눈, 코, 입을 닮은 얼굴을 지닌 고구마. 눈썹 모양의 뿌리까지 있어서 할아버지는 농담처럼 고구마를, “고구마씨.”하고 불렀습니다.

 끼이익 광 문이 열리고 환한 빛이 들어옵니다. 문 사이로 구부정한 누군가가 보입니다.

 “에헴.”

 헛기침하며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에헴 할아버지.

 주변을 부끄러운 듯 둘러보던 할아버지가 주머니에서 초록색 뭉치를 하나 꺼냅니다. 탁탁 털어서 펼치니 털모자였네요. 커다란 고구마 앞으로 다가간 할아버지가 중얼거렸습니다.

 “에헴. 고구마씨 선물이다.”

 초여름의 푸름을 닮은 모자를 쓴 고구마라니. 그래서 다른 고구마들과는 다르게 ‘고구마씨’란 이름이 있나 봅니다.

 구부정한 몸을 움직여서 마른 팔로 농기구를 꺼내고 있는 할아버지. 도와줄 누군가가 있다면 좋을 텐데. 깊은 산속에는 할아버지뿐입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손질을 끝낸 농구기를 에헴 할아버지가 다시 광에 넣습니다.

 숨을 돌린 할아버지는 도끼를 집어 들고, 장작을 패기 시작합니다. 청량하게 나무 갈라지는 소리가 숲을 가득 채웁니다.

 긴 하루를 끝낸 에헴 할아버지가 잠이 들었습니다. 드르렁드르렁 코고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할아버지의 코고는 소리에 놀란 걸까? 하늘이 뿌옇게 흐려지더니 커다란 눈송이가 떨어집니다. 앞마당에 소복이 눈이 쌓입니다.

 하얀 눈이 쌓여 갈수록 캄캄한 어둠이 조금씩 뒤로 물러납니다. 유난히 밝은 겨울밤, 광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손톱만큼 작은 틈 사이로 보이는 광 안에서 바스락바스락 뭔가가 움직입니다.

쥐라도 나타난 걸까?

 틈 사이로 흐르는 빛을 따라간 구석 자리. 홀로 놓여 있던 초록색 모자를 쓴 고구마가 흔들거립니다. 건전지도 전기도 없는데 꿈틀거리는 고구마! 덜컹거리는 소음과 함께 밝은 빛이 폭발합니다.

 맙소사! 

 눈, 코, 입이 생긴 고구마가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주변을 살핍니다. 그리곤 몸을 부르르 떨더니 회오리바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고구마의 정령.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고구마지!”

 콧노래와 함께 멈춰 선 고구마씨의 몸통에는 짚으로 엮은 듯 단단해 보이는 팔다리가 튀어나와 있습니다. 잎사귀 모양의 손으로 흘러내린 모자를 고쳐 쓴 고구마씨가 광문을 열고 밖으로 나갑니다.

 하얀 눈 위에 타박타박 고구마씨의 발자국이 찍힙니다. 그 모양이 마치 고구마를 반으로 잘라 눌러 놓은 것 같습니다.

 “춥군.”

 탁탁 눈을 털고 마루 위에 올라간 고구마씨가 미닫이문을 두드립니다.

 “이보시오. 영감님. 문을 열어주세요.”

 드르렁드르렁 코고는 소리가 대답 대신 돌아옵니다.

 “흠. 흠. 영감님.”

 고구마씨가 다시 문을 두드리며 에헴 할아버지를 소리쳐 부릅니다.

 푸른 새벽을 뚫고 들리는 소리. 잠이 깬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거, 누구요?”

 “안녕하십니까. 나는 고구마의 정령입니다.”

 놀란 할아버지가 헛기침했습니다.

 초록색 모자를 쓴 움직이는 고구마라니. 에헴 할아버지는 눈을 비볐습니다.

 “저것은 헛것이 아닌가. 에헴.”

 “무슨 그리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나는 당신이 지어준 고구마씨란 이름을 가진 고구마의 정령입니다.”

 할아버지는 생생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고구마씨가 말했습니다.

 “꿈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것은 현실입니다.”

 “허, 거참. 에헴.”

 부리부리한 눈의 고구마씨가 할아버지에게 성큼 다가갔습니다.

 “영감께서 말벗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맞다. 내, 그때 고구마를 캐며 벗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지.”

 몸을 빙그르르 돌며 멈춰선 고구마씨가 양팔을 쭉 펼쳤어요.

 “그렇죠. 영감님이 빈 그 소원이 이뤄진 것입니다.”

 잎사귀로 된 손을 반짝반짝 흔들며, 고구마씨가 입으로 “뾰로롱.”하고 소리를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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